1950년 6월 25일 일어난 북한 ‘남침 전쟁’의 의미는 올해 ‘6·25’ 기념행사에서 조그마한 변화가 있었다.

여지껏 국가보훈처 등에서 사용하던 ‘6·25사변’이 ‘6·25 전쟁’으로 바뀌었다. 또한 6월 24일에는 교육인적자원부가 “1950년 6월 25일-53년 7월 27일 남북한 간에 벌어진 전쟁을 ‘6·25전쟁’으로 교과서에 쓰도록 권유했다”고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도 이튿날 ‘6·25전쟁 57주년 참전용사 위로연’에 참석하여 말했다.

“끊임없이 상대를 경계하고 적대적 감정을 부추겨서는 신뢰를 쌓을 수 없고 화해와 협력의 대화도 이뤄질 수 없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가운데 전쟁을 예방하는 현명한 안보가 필요하다.”

“한·미 동맹은 우리 안보와 군 발전에 큰 힘이 돼 왔지만 언제까지 미국에 의존할 수 없으며 우리 안보는 우리 힘으로 지켜 나가야 한다.”

6·25 참전용사인 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 등이 참석한 위로연에서 언급한 말로는 조금 이상하다.

2003년 5월 14일 미국에 처음 가본 노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 연방의사당에서 하원 지도부와 만났을 때였다. 한 노(老) 의원의 ‘방안을 울릴 만큼 커다랗고 굵은 목소리’(이진 전 청와대 행정관이 2005년 12월 펴낸 <참여정부, 절반의 비망록> 중)가 들렸다.

<“1950년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우리는 미군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대통령께서 미국에 대한 우호적 입장을 공식적으로 천명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한국은 미국에게 빚이 있습니다. 50년간 보호해준 것에 대한 빚이 있다는 것을 젊은 세대에게 말해주십시오.”>

당시 노 대통령을 수행했던 청와대 제1부속실 소속 국정기록 비서관이었던 이진 씨는 “당혹감과 불쾌감을 느낀 것 같다”고 썼다.

노 대통령은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과 알링턴 국립묘지를 참배한 후 참모들에게 말했다.

“한국에서 촛불시위하는 거 가지고 미국이 펄펄 뛰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참전기념관을 둘러보니까 내가 미국사람이라면 나라도 펄펄 뛰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나라가 어디에 가서 5만 4,000명이 죽었으면 우리도 풀 서비스를 받기를 기대할 겁니다. 머리 허연 할아버지들이 한국에 대한 애착이 강합니다.”

노 대통령은 하루 전인 5월 13일에는 뉴욕에서 코리아 소사이어티 만찬장에서 구설수가 뒤따를 말을 했다.

“만약 53년 전 (2003년을 기준) 미국이 우리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정치범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오늘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다.”

이 대목은 이진 비서관의 책에는 없었지만 노 대통령은 앞서 말한 나이 많은 의원의 발언과 참전기념관 참배 후 느낌을 직접 써서 그 책에 넣었다.

<40년 전 한국은 미국을 위해 베트남 전쟁에 갔다. 지금은 미국을 위해 이라크에 가고 있다. 동맹이라는 평등한 친구관계는 어떻게 빚을 갚고 나야 이루어지는 것인가….>

무엇이 4년 전 노 대통령의 인식을 ‘평화와 통일’을 준비하기 위한 ‘6·25 전쟁’으로 변화시켰을까.

답이 될는지 모르겠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 미국 참전을 결정한 과정을 기술한 해리 트루먼 대통령(1884-1972)의 <회고록>(<결정의 시대>, <시련과 희망의 시대> 2부작, 56·57년에 발간)이나 부시 대통령도 일독했다는 엘리자베스 스펄딩 교수(1966년생. 크래몬트대 부교수. 워싱턴 프로그램 책임자)의 <냉전의 첫 번째 전사(戰士), 트루먼 봉쇄 그리고 국제자유주의 다시 만들기>(2006년 5월 발간)를 노 대통령은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트루먼의 <회고록>에는 6·25 전쟁 참전의 큰 이유가 담담하게 적혀 있다. 미주리주에 갔다가 워싱턴으로 급히 돌아가는 대통령 전용기에 앉아 개전 하루가 지난 시점에서 내린 단호한 결의의 배경이었다.

<나의 세대에게 이 사건은 강자가 약자를 침공한 첫 사례가 아니었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에게 자유세계로부터 아무런 저항 없이 한국에 쳐들어가는 것이 허용된다면, 어떠한 작은 나라도 더 강한 인접 공산국가의 위험과 침략에 저항할 용기를 갖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은 채 내버려진다면 비슷한 사건이 2차 세계대전을 초래했던 것과 똑같이 3차 세계대전을 의미하게 될 것이었다. 또한 한국에 대한 불법적 공격이 저지되지 않는 한, 유엔의 기반과 원칙이 위험에 봉착하리라는 것은 명백했다.>

트루먼은 미국의 관료, 장군, 지한(知韓)인사 중 처음으로 45년 9월 18일 ‘해방을 즈음해’ 성명을 냈다.

“태극기가 ‘고요한 아침의 땅’에서 다시 펄럭이는 가운데 맞이한 조선의 해방을 축하한다.”

스펄딩 교수는 트루먼을 ‘냉전의 첫 번째 전사’로 보는 이유를 요약했다.

“트루먼의 신념, 주장, 판단력, 정책은 어떻게 봉쇄정책을 펼 것인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냉전이란 어떤 것인가를 미국인과 세계 자유인들에게 알리려고 했다. 그러므로 그를 첫 번째 냉전 전사라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노 대통령과 대선주자들은 트루먼의 <회고록>을 꼭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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