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일자 중앙일보 이상일 워싱턴 특파원의 ‘한국전문가 총 출동, 소용돌이 한국대선 촉각’이란 기사가 눈길을 끈다.

<<데이비드 스트로브 전 국무부 한국과장은 “미국이 한국 대선과 관련해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건 한국의 반미 감정을 촉발하는 돌발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상황을 잘 관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 코리아 소사이어티와 아시아 소사이어티는 다음달 7일 한국 대선과 한미 관계 등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어 한국의 유력한 대선 후보들이 내놓은 외교정책을 점검할 계획이다.

… 워싱턴의 한국 특파원들과 접촉하는 미 국무부 관계자나 연구기관 인사 중엔 “갑자기 대선 구도가 바뀌고 그에 따라 여론도 출렁거리고 있어 너무 헷갈린다” 며 “한국에서 사람들이 왜 점을 치는지 알 것 같다”고 말하는 이들도 여럿이 있다.>>

이런 때에 11월 8일 한미협회(회장 구평회 E1 명예회장)는 6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6회 한미친선의 밤’을 개최했다.

이날 한미협회는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 소사이어티 이사장(1927년생. 73~75년 CIA한국지부 총책임자. 89~93년 주한 미국대사)에게 ‘한미 우호상’을 수여했다.

적절한 수상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 CIA의 한국 우두머리를 지내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73년 납치 때 구했고 친한적인 인사로 알고 있다.

한국전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가장 추운 겨울전쟁’이 되었을 때 그는 윌리엄스 대학을 나온 학사로 CIA에 투신했다. 사이판에서 북한, 중국, 베트남 등지에서 모은 난민들을 요원으로 길러 공중 투입하는 일을 했다.

올해 전미 도서상 최종후보작으로 뽑힌 뉴욕타임스 CIA담당기자 팀 웨이너(88년 국내 탐사보도로 퓰리처상. CIA와 국방부의 방만한 자금사용을 파헤침)의 ‘잿더미 유훈(Legacy of Ashen)-CIA의 역사’(7월 발간)에는 세 대목 이상이 그레그에 관해 적혀 있다. 물론 웨이너는 그레그를 인터뷰 했다. 이를 요약한다.

<<한국전쟁 초기 CIA 비밀작전국은 1,000명의 요원을 한국에, 300명을 타이완에 보내 김일성과 마오의 독재를 살피도록 했다. 이들 중 윌리엄스대학을 갓 졸업한 도널드 그레그가 있었다.

임무를 맡은 그의 첫마디는 “코리아가 도대체 어디 있는 나라야”였다. 전복, 파괴 등 군사작전 후 그는 사이판에서 2,800만 달러를 들인 CIA 훈련소의 교관이 됐다. 그레그는 피난민 캠프에서 건장한 북한 농촌청년들을 뽑아 짧은 기간 훈련을 시켰다. 이들은 영어도 못 익힌 채 CIA요원이 되어 북한에 투입됐다.

그레그는 그 후 버마(64-66년) CIA 책임자로 일했다. 1951~1982년 31년간을 CIA에서 일하다가 부시(1세)부통령의 안보보좌관을, 89~93년 주한미국 대사로 일했다.

그레그는 회고했다. “우리는 OSS(2차대전 때의 전략작전처)의 발자취를 밟았다. 우리의 적은 잘 조직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무엇을 하는지를 몰랐다. 나는 가끔 상관에게 ‘무엇이 우리의 임무’냐고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우리는 훈련을 마친 한국, 중국인을 북한, 중국에 투하했다. 우리는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은 언제나 내 마음을 짓누른다. 내가 밝히고 싶은 진실은 “CIA가 한밤중에 무턱대고 휘두른 칼 짓”이라는 것이다. CIA는 명성만 높았지 실적은 처절한 것이었다.>>

그레그를 대사로 모셨던 주한미대사관 수석무관 제임스영 대령(1941년생, ROTC로 63년 임관. 73년 국방정보국 요원으로 네 차례 한국 파견)은 2003년 낸 ‘한국을 지켜보며-한미 관계의 내막’에서 그레그에 대해 요약했다.

<<나는 96년 대령으로 제대하고 지금까지 40여 년간 한국에 눈길을 주며 살았다. 네 번째 한국에 다시 갔을 때 그레그 대사가 부임했다. 그와 함께 한국 여러 곳을 다닐 때마다 그는 회고했다.

“6ㆍ25때 너무 많은 청년들을 북한에 보냈어.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야”하며 괴로워했다. 그는 반미, 무역, 북방정책이 소용돌이치는 노태우 정권 때인 89~93년을 대사로 보냈다. 내가 겪었던 5명의 대사 중 가장 한미관계를 이해한 분으로 생각한다. 그는 89년 부임한 지 얼마 안돼 광주를 공식 방문했다. 김대중 야당 당수가 전화로 말릴 정도였다. 무엇보다 그는 한미 무역 균형, 노태우의 북방정책에 큰 기여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전 그레그 전대사를 만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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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