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통령 중 8번째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1월 6일 84회 생일을 맞았다.

7일에는 1962년 이후 그가 잠시를 빼놓고 40여 년간 살아온 ‘동교동’이 ‘서교동’으로 통합돼 행정동병 ‘동교동’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은 김대중 도서관과 자택이 들어선 이곳에서는 71년 1월 28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인 그가 미국에 간 사이 폭발물사건이 발생 했다. 그가 후보가 되었을 때 그는 ‘동교동’의 보스였고 4월 27일에는 539만 5,900표를 얻어 박정희 후보보다 116만 표나 뒤졌다. 73년 도쿄에서 납치됐다가 돌아온 곳도 ‘동교동’이었다. 그는 민주화 운동시절(72~87년) 54회나 ‘동교동 자택 연금’을 겪었다.

그런 ‘동교동’의 이름이 사라지는 역사성을 알았기 때문일까? 그는 6일의 84회 생일을 조용히 보냈다. 1일 찾아온 신당과 민주당 대표들에게는 아쉬움을 털어놨다.

<<두 번 진보세력이 정권을 맡았으니까 이번엔 보수세력으로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국민의 판단이 컸다. 이번같이 처참하게 진 적이 없으며 건전한 민주주의를 위해 아쉬운 일이다.… 나와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켰던 표를 덜 모았다. 위기임에 틀림 없다.… 창조한국당 문국현, 민주당 이인제 후보가 합세했으면 합세했다는 것만으로 힘이 컸을 텐데 … 더욱 걱정스러운 점은 이런 추세가 앞으로 계속 이어져 민주주의에 상당한 적신호를 올리게 되는 상황이다>>

DJ의 발언으로 보아 그는 작년 12월 25일께 나온 월간조선 1월호의 조갑제 편집위원이 쓴 ‘2007대선의 의미-좌파반역을 선거로 진압한 것은 한국민주주의 위대한 승리’를 읽지 않은 것 같다. 조갑제는 이 기사 중 ‘아홉 대통령과 열 번째 대통령’ 대목에서 DJ를 평가했다.

<<좌익 활동가 출신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이후 좌경적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현대그룹을 통해서 4억 5천만 달러를 김정일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보낸 끝에 2000년 6월 평양회담을 성사시켰다. 비밀송금으로 김정일에게 약점 잡힌 신세가 된 그는 김정일의 대남적화전략지침을 그대로 수용한 6ㆍ25선언에 합의함으로써 한국을 적화의 길로 내몰았다. 김대중의 노선을 이어받아 2002년에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QKR의 반국가적 노선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는 위선적 평화론의 전도사가 되었고 김정일 대남적화전략의 핵심인 한미 연합사 해제, 보안법 폐지, 연방제 통일안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한국을 북한정권의 인질로 전락시킨 끝에 주적 집단의 핵무장을 허용하고 말았다.>>

DJ는 또한 동아일보가 12월 28일부터 시작한 ‘DJ-노정부 반면교사…’ 시리즈를 읽어 보지 않은 것 같다. 이 시리즈 (1)회의 ‘거꾸로 간 국민통합’의 리드는 짧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자칭 ‘진보정부’였다. 하지만 국민적 공감대 없이 대한민국 현대사를 ‘오욕의 역사’로 규정하고 한국의 주류세력을 ‘청산대상’으로 몰아 붙이며, 무리한 편가르기와 이념적인 정책 실험으로 혼선과 갈등을 초래한 끝에 민심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이 정치권 안팎의 대체적인 평가다. 두 정부는 대선승리에 대해서 각각 ‘50년만의 정권교체’ ‘직접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며 자신감이 확신으로, 결국은 맹신이라는 극단적인 나르시시즘(자기만족)으로 치달으며 스스로 표방했던 ‘국민통합’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는 지적도 많다.>>

그럼 DJ는 대선을 앞두고 한국일보가 10월 16일부터 시작한 시리즈 ‘시대정신 대논쟁’(2007년 12월 책으로 출간)은 읽었을까?

한국일보 시리즈는 DJ정부에 대한 여론조사를 요약했다.

<<1987년 이후 한국 사회 발전에 가장 많이 기여한 정권은 김대중 정권으로 조사됐다. 응답자들은 김대중(40.7%)에 이어 노무현(15.3%), 노태우(9.2%), 김영삼(8.4%) 정권 순으로 한국사회 발전에 공헌했다고 평가했다. ‘사회발전에 기여한 정권없다’는 답변과 무응답자는 26.3%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끈 국민의 정부가 우리사회 발전에 가장 많이 기여했다는 의견은 모든 연령ㆍ지역ㆍ직업별 응답자중에서 1위였다. 특히 호남(65.8%), 30대(45.3%), 학생(53.6%)에서 지지가 높았다. 또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지지자(34.7%)나 자신의 이념 성향을 보수라고 밝힌 사람(32.6%) 가운데서도 김대중 정권의 사회 발전 기여도가 1위였다. 1997년 첫 여야정권 교체를 이룬 뒤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공로 때문에 것으로 분석된다.

’동교동’의 이름은 사라졌어도 DJ 김대중 대통령의 이름은 사라질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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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