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楚)나라 회왕 때에 진나라 ‘장의’가 초나라 간신인 ‘근상’과 ‘자란’을 움직여 회왕을 진나라로 오게 해서 인질로 잡게 된다. 이 때 초(楚)의 기둥이자 충신인 굴원은 회왕에게 장의의 말을 듣지 말고 그를 죽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회왕은 결국 머나먼 진나라 땅에서병사(病死)한 뒤 시신이 되어 초나라로 돌아온다. 회왕이 죽은 뒤,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였지만 간신에게는 눈에 가시였던 굴원(屈原)은 변방으로 추방되고 결국 그는 동정호(洞庭湖) 남쪽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진다. 국내에서 최근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중국 드라마 ‘미월전(羋月傳)’을 보면 이들의 이름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굴원은 ‘근심을 만난다’는 뜻인 이소(離騷) 뿐 아니라 어부사(漁父辭), 회사부(懷沙賦)를 지었으며, 후에 가의(賈誼)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어 굴원을 조문했다고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에 전해온다. 이소에는 자록시(薋菉葹) 즉 납가세, 조개풀, 도꼬마리, 애(艾, 쑥), 갈(葛,칡), 초(椒,산초), 살(樧, 오수유), 국(菊), 지(白芷), 두형(杜衡), 여몽(女夢:토사자), 승(繩:사상자), 게거(揭車:(마))같은 한약재가 나온다. 이소(離騷)에는 모두 55 종(種)이나 되는 약물이 수록되어 있는데 송나라 때 오인걸(吳仁杰)은 이소(離騷) 속에 포함되어 있는 본초(本草)에 관한 약물학 지식을 다시 정리하고 주해(註解)하여 이소초목소(離騷草木疏)를 저술하였는데 산해경(山海經)에만 근거하여 고증한 관계로 다소 오류가 있다. 진(晋)의 상거(常璩)가 저술한 화양국지(華陽國志)를 보면 주나라 무왕이 파촉의 군대와 함께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대가로 제후에 봉하면서 특산물을 받게 되는데 그 목록 속에 ‘마’ 즉 산약(山藥)도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 부터 산약은 중요한 음식과 한약으로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동요(薯童謠)의 서동(薯童)은 ‘마를 파는 아이’라는 뜻이다. 마는 조선후기에 고구마, 감자가 청이나 일본으로부터 유입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자생해서 우리 선조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던 몇 안 되는 구황작물이었다. 이런 이유로 민간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마를 먹기도 하고 한약으로 쓰기도 하였다. 요즘도 산약은 특유의 끈적거리는 점액질로 인해서 날것으로 먹으면 위벽을 코팅해줘서 위산이 과다해서 생기는 속쓰림과 더부룩함을 잡아준다는 생각에서 민간에서 많이 복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산약은 마, 참마, 산약의 뿌리줄기를 한약재로 사용한다. 대개 11-12월에 채취하는데 전분질이 많아서 잘 말리기가 쉽지 않아 반드시 대나무 칼로 껍질을 벗기고 나서 말려서 쓴다. 전분이 16%정도 되고 점액질이 있어 끈적끈적하다. 맛은 달고 감촉은 깔깔하고 성질은 따뜻하다. 산약은 성미가 아주 차거나 아주 뜨겁거나하지 않아 비위장의 기운을 북돋우고, 끈적이는 점액질로 음(陰)을 보하지만 체기를 유발시킬 정도가 아니라 비위의 기능을 무난하게 보(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한약이다. 입에 깔깔한 느낌을 주는 삽미(澁味)는 강력한 수렴작용을 하는데 산약의 깔깔한 성미도 폐와 신장으로 가서 밖으로 새는 것을 강력하게 거두어들인다. 산약을 비위기능을 강화하는데 많이 쓰이는 것으로 알고 있겠지만 신장으로 가서 소변이나 대변, 정액이 함부로 새는 것을 거두어 들여서 정력을 강화하거나, 폐로 가서 기침같이 밖으로 내 뱉어지는 것을 강력하게 끌어당겨 해수와 천식을 치료할 목적으로 많이 쓰인다. 산약은 태음인약이다. 태음인은 덩치만 크지, 매운 맛은 없어서 남에게 잘 따지지도 못하고 왠만한 주변의 상황을 다 이해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남에게 함부로 딴지를 걸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이 시비를 걸어오면 사소한 일에도 크게 불안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태음인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대변이 딱딱하게 굳어지거나 설사를 한다. 이런 설사를 치료하는 한약이 청심연자탕(淸心蓮子湯)이다. 대표적인 한약이 산약과 연자육인데 둘 다 강력한 삽미(澁味)가 있어 대변 속의 물을 거둬들여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 코피 나는 태음인 아이에게 코피를 거두는 산약보폐원탕(山藥補肺元湯)을 써봄직하다.

하늘꽃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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