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선친께서 한약방에 근무를 한 덕택에 잠시 동안 대구의 약전골목에서 보낸 적이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주인집에서 김장을 했다고 해서 가져온 김치가 특이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당귀 같은 한약재를 갈지 않고 통째로 김치의 속에 넣어서 버무린 것 같다. 어른들은 돈 주고도 먹기 힘든 보약처럼 그 김치를 아껴먹었지만 어린 필자는 한약의 특이한 향취가 낮 설어 그 김치를 먹는 일이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끔 한약방에 들리면 가게 한편에 사슴뿔 같은 것이 걸려 있어 장식용으로 걸어 놓은 것인지 알았는데 나중에 한약재로 쓰이는 녹용인 것을 알고 별의별 것을 다 한약으로 쓰는구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선친께서 한약을 공부할 양으로 사놓은 방약합편(方藥合編)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고 살아남아, 누렇고 퍽퍽해서 잘 못 넘기면 부스러기가 되서 날아갈 것 같은 모습을 띠고 내 책꽂이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지금에야 그 녹용 하나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 알게 되었다. 열 가지 오래 사는 사물을 십장생이라 부르는 데 그 중에 수명이 25년 정도 밖에 안 되는 사슴도 들어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고라니, 순록, 노루 등도 모두 사슴의 이웃사촌이라 녹용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보양(補陽)의 효과가 현저하게 떨어져 매화록(梅花鹿)과 마록(馬鹿), 그리고 엘크 정도만 녹용(鹿茸)이란 한약재로 유통된다. 녹용(鹿茸)은 사슴의 청년기에 해당되는 5살 정도 때에 뿔이 두 개 정도 날 때 잘라서 쓰는 것이 효과가 가장 좋다. 어린 사슴의 처음 난 뿔은 효과가 썩 좋지 않다. 매화록(梅花鹿)은 중국에서만 서식한다. 마록(馬鹿)은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뉴질랜드에 서식한다. 예로부터 러시아산 마록을 원용(元茸)이라 불렀다. ‘으뜸으로 치는 녹용’이란 뜻으로 최상품의 품질로 인정했고 다른 녹용보다 2-3배 비싸다. 중국산 마록의 녹용은 일명 ‘깔깔이’로 시중에서 유통된다. 이 둘은 건조하는 과정에서 뿔의 피를 제거한 다음 건조해서 붉기가 덜 붉다. 뉴질랜드산 마록은 ‘뉴자’로 유통되며 뿔에 피가 있는 상태에서 냉동건조하기 때문에 붉다. 엘크는 캐나다나 뉴질랜드에서 자생하지만 일부 사슴에서 사슴이 미치는 ‘광록병(狂鹿病)’이 있어 유통이 되지 않는다. 녹용은 그 자체로 높은 가격대가 형성되어 있어서 수많은 유사품이나 밀수품이 시중에 유통될 수 있어 수입증서나 품질보증서를 반드시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유사품으로는 와피티(Wapiti), 무스(Moose), 사슴순록(Caribou)이 있다. 사슴의 뿔인 녹용이 왜 보양약이 될까? 사슴은 양기(陽氣)가 뻗쳐서 영하 40-50℃ 정도로 추운 시베리아 같은 환경에서, 그 환경을 극복하고 머리꼭대기까지 영양물질을 보내서 매일 뿔이 2-3Cm까지 자라며 2-3 개월 내에 60-70Cm까지 자라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추운데 사는 사슴의 뿔일수록 가장 최상의 녹용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이유로 녹용은 위치에 따라 품질이 나눠진다. 제일 윗 부분부터 분골, 상대, 중대, 하대로 불리는 데 추운 지방에서 가장 꼭대기까지 기혈(氣血)을 공급해서 매일 자라나는 부위인 분골부위가 가장 비싸다. 그 부분은 사슴뿔 하나를 잘라도 1할이 채 안 나온다. 그 다음은 ‘상대’인데 조직이 치밀하고 기혈이 가장 많은 부분으로 분골 못지않게 고가로 거래되는 부분이다. 혈(血)을 보하는데 좋다. 평소 건강이 많이 좋지 않은 경우는 분골과 상대위주로 쓰고, 조금 좋지 않을 경우는 상대와 중대를 혼합해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뿔을 잘랐다고 그냥 녹용으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뿔에 난 털을 불을 피워 태우고 유리조각 같은 것으로 긁어서 제거한 후에 막걸리에 넣어서 살짝 찐 다음 썰어서 말려 사용하거나, 고무장갑에 소주를 가득 채워서 소주를 먹여 썰어서 말려 사용한다. 간혹 국내의 사슴농장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슴뿔을 가지고 보약을 지으러 오는 경우가 있다. 이 때는 소주에 녹용을 30분 정도 담가서 피를 제거한 후에 다른 한약재와 섞어서 쓴다. 참고로 국내 사슴농장에서 사육한 사슴뿔은 한약재인 녹용으로 분류되지 않고 식용으로 취급된다.

하늘꽃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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