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에 ‘붕(鵬)’이란 거대한 상상의 새가 등장한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북해(北海)에 거대한 물고기 한 마리가 살고 있는데 이름은 ‘곤(鯤)’이다. 곤의 둘레는 몇 천리인지 모를 정도로 컸다. 곤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은 ‘붕(鵬)’이다. 붕의 등 역시 몇 천리인지 모를 정도로 컸다. 붕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면 양 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다. 한번 날아오르면 3천리 높이로 날고 단번에 9만 리를 날아간다.

지난 1월 29일 카타르의 도하에서 막을 내린 EPGA(유럽프로골프)투어 시즌 두 번째 대회 커머셜뱅크 카타르 마스터스에서 우승한 왕정훈(23)의 골프 역정을 보면 그가 상상의 새 ‘붕’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진다. EPGA투어에 뛰어든 사연이나 투어 경력 1년도 안되어 3승을 거둔 과정을 좇아보면 결코 연작(燕雀, 참새나 까치 같은 작은 새)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5월 모로코와 모리셔스에서 각각 열린 EPGA투어 핫산Ⅱ 트로피 대회와 아프라시아뱅크 모리셔스 오픈에서 2주 연속 드라마 같은 대역전극을 펼치며 연승하기 전까지만 해도 왕정훈은 연작(燕雀), 즉 무명이었다. 그 전에 간간히 아시아투어와 KPGA투어에 참여했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한 탓에 골프팬들의 뇌리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1995년 9월 7일생에 180cm 73kg.

훤칠한 체격에 앳된 얼굴이지만 그가 펼치는 플레이는 그 또래의 수준을 한참 넘었다. 상황에 따라 안색이 돌변하고 가슴이 쫄고 맥박이 팔딱거릴 나이인데도 그는 중압감 넘치는 상황을 즐기며 인내심을 갖고,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기다릴 줄 알고, 기회가 오면 몰입할 줄 안다. 그가 나이에 걸맞지 않는 원숙한 경기를 펼치는 데는 그의 굴곡진 인생역정이 바탕이 되었다.

지난해 5월 EPGA투어 정식 출전자격도 없고 대기 순번도 3번째였지만 그는 국내대회인 매경오픈 출전을 마다하고 아버지의 만류도 뿌리친 채 모로코 행을 결심, 무작정 항공 티켓을 끊었다. 운이 닿았는지 출발 직전 그에게 출전 자격이 주어졌다는 연락이 왔고 그는 멀고 먼 모로코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의 결기(決起)는 잇달아 귀중한 결실을 맺었다.

EPGA투어 2승을 거두기 전까지 그는 골프 유랑자(流浪者)와 다를 바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필리핀으로 이주해 골프기량을 쌓은 그는 중학 3학년 때 귀국했으나 해외 거주로 유급이 되어 3학년 선수로 뛸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1학년으로 출전했는데 이번엔 기량이 너무 뛰어나 나이 많은 선수가 1학년으로 출전하느냐는 항의가 들어왔다. 중학교 3학년으로도, 1학년으로도 뛸 수 없게 된 그는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필리핀의 4대 성인 아마추어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자 역시 항의가 빗발쳤다. 필리핀에서는 국가대표 선수에게 월급을 주는데 어린 그가 우승을 독차지하다 보니 우승을 못한 대표선수들이 월급을 받을 수 없게 된 데 따른 원성이었다. 그래서 필리핀 대회 출전의 길도 막혔다. 한국도 필리핀도 그의 둥지가 되지 못했다. 둥지를 버리고 뛰쳐나오는 길밖에 없었다.

떠돌이신세가 된 그는 중국 PGA투어 3부 투어에 뛰어들었다. 나이 제한도 없고 국적도 따지지 않아 만 16세 때인 2012년 프로로 전향하고 3부 투어 상금왕에 올랐다. 이후 아시안 투어를 거쳐 한국투어를 뛸 수 있게 됐고 우연히 잡은 모로코 핫산Ⅱ 트로피 대회 우승으로 EPGA투어 출전카드도 확보했다.

비상을 위해 둥지를 박차고 나간 한 마리 새 왕정훈이 이번 카타르 마스터스 우승으로 비상을 위해 날갯짓 하는 대붕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는 EPGA투어 3승으로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42) 이후 최소 경기 출전 3승을 거둔 선수가 됐다. EPGA투어측은 홈페이지를 통해 "29개 대회에서 3승을 따낸 왕정훈이 1999년 12번째 대회에서 3승을 기록한 우즈 이후 최소 경기 3승을 기록했다"고 분명히 했다.

이번 커머셜뱅크 카타르 마스터스에서 3타 차 선두로 4라운드를 맞은 왕정훈은 연륜이 짧은 탓인지 선두주자의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추격자 야코 반 질(남아공), 조아킴 라거그렌(스웨덴)에 동타를 허용했으나 연장전 끝에 승리를 거뒀다.

객관적으로 그는 제이슨 데이나 조던 스피스, 로리 매킬로이 같은 대선수에 미치지 못한다. 아직 투어 경험이 부족한 탓인지 실수도 나오고 자신감이나 집중도에서도 허점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담담(淡淡)한 플레이를 펼칠 줄 아는 최대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EPGA가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는 것도 담담한 플레이 때문이다.

왕정훈은 이 대회 우승으로 두바이 레이스 랭킹에서 2위에 올라 세계 랭킹도 60위에서 40위 안팎으로 도약, 대망의 마스터스 출전자격 획득도 유력해졌다. 3월말까지 50위 이내 순위가 유지한다면 마스터스에 출전할 수 있다. 대붕의 DNA를 타고난 왕정훈이 꿈의 제전이라는 마스터스에서 어떻게 대붕의 날갯짓을 할지 기대된다.

방민준(골프한국 칼럼니스트)

(골프한국 프로골프단 소속 칼럼니스트에게는 주간한국 지면과 골프한국, 한국아이닷컴, 데일리한국, 스포츠한국 등의 매체를 통해 자신의 글을 연재하고 알릴 기회를 제공합니다. 레슨프로, 골프업계 종사자 등 골프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싶으신 분은 이메일()을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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