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1주년, 메아리 없는 '레드 코리아' 함성

[월드컵 1년… 명과 암] 일장춘몽 ★ 이런가
월드컵 1주년, 메아리 없는 '레드 코리아' 함성

태극 전사들이 승리를 기원하는 마음에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영남과 호남을 가르는 지역감정도 무으미햇고, 진보든 보수든 상관없었다. 거리에서 또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여졌고, 거리에서 또 안방에서 선수들과 함께 달리며 외친 "대~한민국" 연호는 온 국토를 집어삼킬 듯 했다.

전 세계는 물론 우리 스스로도 놀랐다. 월드컵 4강 신화는 그라운드에서 직접 뛴 태극 전사 뿐 아니라 온 국민이 함께 이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월드컵 4강을 경제 4강 도약의 기회로 삼자는 구호가, 국민 통합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구호가 그리 허황돼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신용불량자 300만명 돌파, 디플레이션 우려 심화, 부동산 가격 폭등, 북핵 문제와 사스(SARS) 파장 지속·. 연일 신문 1면 토을 장식하는 경제 기사는 온통 잿빛 투성이다. 경제 4강은 커녕 경기가 언제 바닥을 찍고 상승 국면으로 돌아설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국민 통합의 기대도 처참히 짓밟혔다. 화물연대 파업으로 사상 초유의 물류대란 일보직전까지 갔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교육부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시행에 반발해 연가 투쟁 돌입을 선언했다. 방미 직후 광주 5·18 모역을 찾았던 노무현 대통령은 한총련 소속대학생들에 저지당해 뒷문으로 들어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정치권은 신당을 둘러싼 민주당 내 구주류와 신주류의 갈등, 대통령은 급기야 "대통령직을 못해 먹해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든다"고까지 말했다.

월드컵은 또 거물급 정치인들이 줄줄이 연루된 대형 비리 사건으로 되돌아 왔다. 월드컵 회장 사업권을 둘러싸고 정·관계 유력 인사들이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속속 드러나 쇠고랑을 차고 있다. 호나우두 베컴 지단 피구 등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들이 누볐던 10개의 월드컵 경기장은 수백억원대의 적자에 시달리며 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렸다. 과연 꿈★은 이루어지는 것일까. 혹시 그해 6월의 일장춘몽은 아니었을까.


월드컵 경제 효과의 허와 실

2002 한·일 월드컵 개최 직전, 한국개발연구원은(KDI)은 월드컵의 직접적인 경제 효과를 17조원으로 분석했다. 생산 유발 효과가 11조5,000억원, 부가가치 창출효과가 5조3,000억원에 달한다는 평가였다. 고용 창출 효과(35만명)와 관광객 유입 효과(40만명)도 만만치 않을 것이란 분석을 내놓았다.

"월드컵 대회는 개최 기간과 TV 시청 인구 면에서 올림픽을 상회한다. 관련 기업들이 이번 기회를통해 판촉 광고 활동을 활발히 전개한다면 단기적인 생산 유발 효과만이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수출이 늘어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설명했다.

태극 전사들이 꿈에 그리던 첫 승을 넘어 16강, 8강, 그리고 마침내 4강에 까지 진출하느 동안 경제 효과에 대한 기대도 갈수록 부풀었다. 폴란드를 2대 0으로 꺾어 월드컵 사상 첫 승릴르 거둔 직후 현대경제연구원은 '월드컵 1승의 경제적 효과'라는 보고서에서 1승의 경제 효과를 무려 14조원으로 추산했고, 월드컵 4강 달성 이후에는 총 경제효과를 26조원으로 추산했다.

소비 진작 효과 3조7,600억원, 국가 브랜드 홍보 효과 7조7,000억원, 기업 이미지 제고 효과 14조 7,600억원으로 추정됐다.

단순히 돈으로 환산된 것은 아니었다. '정보기술(IT) 월드컵'이라는 구호에 걸맞게 국내 IT 기술을 선진국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받아 들여졌고, 자신감과 역동성을 근간으로 하는 '레드이코노미'라는 신조어도 탄생햇다.

하지만 경제란 공은 둥글지 않았다. 승부차기의 짜릿한 이변도 없고, 연장전 골드 골의 희열도 없었다. 월드컵 이후 한국 경제는 침울했다. 국가 신인도가 올라가기는 커녕 국가 신용등급 하락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한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었고, 고착 4% 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부동산 가격 급등의 위험을 무릅쓰고 콜금리를 인하해야 했다.

관광 특수도 없었고, 소비 진작도 없었다. 현대경제연구원 자체 분석 결과 지난해 국내 관광 수입은 52억8,000만달러로 2001년 (62억8,000만달러)에 비해 오히려 15%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월드컵의 경제 효과는 실종된 것일까. 혹시 연구소들이 과?포장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전문가들도 이런 의문에 어느 정도는 수긍하는 분위기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이진면 전문연구원은 "소비 진작, 생산 유발, 광고 효과 등은 이미 충분히 반영됐다"며 "하지만 북핵 위기 등 대형 악재들이 몰려 오면서 국가 이미지 제고 효과 등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경제본부장은 "잔치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바라보는 것하고 이후에 반추하는 것하고는 다를 수 밖에 없다"며 "월드컵 경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포스트 월드컵 대책 등이 제대로 이뤄졌어야 하는데 탁상공론으로 끝나면서 효과를 반감시켰다"고 지적했다.


금세 사그러든 국민 에너지

"21세기 국운 상승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시민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국민적 열정을 민족 통일과 지역 감정극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동기만 주어지면 뜨겁게 뭉쳐 무한한 국민적 에너지를 용암처럼 분출하는 것을 스스로 확인했다."…

당시 폭발했던 국민적 에너지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평가들은 주로 이랬다.

분명 2002년 6월은 온 국민에게 잊혀지지 않을 소중한 경험이었다. 군사독재를 끝내는 6·29 선언을 이끌어낸 1987년의 6월이 386세대들에게 잊혀질 수 없는 기억이라면, 2002년 6월은 온 국민의 가슴에 깊숙이 각인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아래로부터 끓어오른 폭발적인 힘으로 시청앞 광장에서 광화문을 잇는 자율적 '공공 공간'을 창출해 냈고, 잠재된 우리의 에너지를 확인했다.

그 속에서 젊은 세대들은 자신감을 발견했다. 지난해 하반기 내내 이어졌던 반미 촛불 시위도 어쩌면 그 연장선 상에 있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홍준형 교수는 "대중의 기억속에 당시의 에너지가 살아 숨쉬는 만큼 다시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면 언제든 타오를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사회적 혹은 정치적 갈등이 국단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견해가 더 지배적이다. 월드컵의 단합된 에너지가 이면에 내재해 있던 갈등을 해소하길 바라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는 것이다. 한 학자는 잘라 말했다.

"그 때 입에 거품을 물었던 지식인들에게 다시 한번 물어보시죠." 우연한 계기로 표출된 에너지를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과장해서 해석했다는 얘기였다.

한신대 사회학과 김종엽 교수는 당시의 에너지를 '아주 느슨한 조?I거인 수준의 민족주의'로 정의하고 있었다. 다시 흡수하기 어려운 흩어지기 쉬운 에너지라는 것이었다. 김 교수는 "태극기나 대한민국에 대한 문화적 충성심에는 개인적 성향이나 색깔에 관계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합의할 수있다"며 "따라서 그런 힘들이 일정한 방향성을 갖길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고 지적했다.

"술을 마실때는 느슨한 동지애가 발동이 돼 모든 갈등이 해소된 것 같지만 다음 날 술이 깨면 원 상태로 돌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비유도 덧붙였다.


게이트로 얼룩진 월드컵 1년

월드컵 1주년을 앞두고 서울시가 5월 24~25일 시청 앞 광장 등에서 대규모 거리 축제를 펼치고, 개막날이었던 31일에는 일본에서 축구 한·일전이 열리는 등 2002년 6월의 열기가 조금씩 되살아 나고 있다.

하지만 월드컵 휘장사업 관련 정관계 로비 사건이 연일 터져나오면서 열기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국내 월드컵 휘장 사업권이 1999년 월드케이에서 2000년 홍콩계 완구업체인 PPW의 국내자회사 CPP코리아로, 다시 2001년 말에는 코오롱 TNS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사업자들이 월드컵조직위와 정·관계에 거액의 로비 자금을 뿌렸다는 것이 사건의 핵심이다.

검찰이 정·관계 인사 수십명의 명단이 적힌 '로비 리스트'와 '선물 리스트'등을 입수하고 이??자민련 총재 권한 대행 등 거물급도 수사망에 오르면서 사건은 '월드컵 게이티'로까지 비화할 조짐이다.

함성의 진원지였던 월드컵 경기장도 자치단체의 골칫거리로 잔략하면서 월드컵 1년의 기억을 어둡게 하고 있다. 지난해 전국 10개 월드컵 경기장은 단 한곳도 이익을 내지 못하고 총 151억여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인천 문학경기장이 32억2,900만원이라는 최대 적자를 냈고, 서울 상암경기장도 29억 2,000만원의 손실을 입었다. 총 1조6,000억원의 금액이 투입됐고, 각 자치단체들이 떠안은 부채가 5,000억원에 육박하는 것을 감안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성적표였다.

올해도 사정이 별로 나아질 것은 없다. 각종 국제 경기와 다목적 스포츠·레저 공간 활용 등으로 상암구장 정도가 흑자를 예상하고 있을 뿐 대부분 경기장은 올해도 적자를 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제주 서귀포 경기장은 지난해 여름태풍으로 찢겨져 나간 경기장 지붕막 공사가 아직도 끝나지도 않아 활용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고, 인천 문학경기장 역시 프로축구팀 창설 논의가 무산되면서 연간 56억원에 달하는 관리비만 고스란히 축낼 처지다.

월드컵의 효과를 1년만에 단정해 판단하는 것은 너무 섣부를 수도 있다. 국민적 힘이 언제 어느 순간에 다시 결집될지, 경제적 효과가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나타날지 누군들 알겠는가. 월드컵 5년, 혹은 10년 뒤에 "꿈★은 이루어졌다"는 평가각 나올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입력시간 : 2003-10-02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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