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보다는 '내 삶'이 더 중요, '섹스=결혼' 등식 무의미

[싱글族] 싱글 전성시대, 당당한 솔로들
'우리'보다는 '내 삶'이 더 중요, '섹스=결혼' 등식 무의미

남자가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한다. “한 달에 천 만원씩 벌어다 주면 어떻게 할래?” 갑자기 굴러들어온 복(福)에 한동안 어리둥절해 하던 여자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만 끝내 거절한다. “원했던 게 한꺼번에 이뤄지는데, 남의 손 빌려 밑 닦은 것처럼 찜찜하다”며. 그리곤 “‘나’라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먼저 찾고 싶다”며 홀로이기를 고집한다.

싱글 남녀 4명의 연애 스토리를 다룬 영화 ‘싱글즈(감독 권철인ㆍ제작 싸이더스)’에 나오는 이야기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이상’과 ‘자유’를 위해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 주는 결혼을 포기하고 ‘싱글’로 남는다. 이런 선택은 영화에서나 멋져 보이는 걸까. 영화가 세태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30대 미혼자 수가 110만 명을 넘어선 요즈음에는 영화속 주인공과 같은 당찬 ‘싱글’을 주변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가정보다 개인의 삶을 중요시하는 이른바 ‘싱글즈’(싱글族) 전성시대다. 사회 전체로는 여전히 ‘커플’이 주류를 이루지만 젊은 층의 의식은 급격히 ‘싱글즈’를 지향하며 가족 지향적인 전통 가치관을 흔들어 놓고 있다.

통계청이 5년마다 조사하는 전국인구센서스에 따르면 2000년 전국 1,439만 여 가구 가운데 1인 가구는 222만 여 가구다. 전체 가구의 15.4%를 차지했다. 5년전 (95년 164만 2,000 가구)에 비해 무려 35.4%나 불어난 수치다. 물론 여기에는 이혼률 증가에 따른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보다 중요한 점은 독신 가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이 크게 달라진 세태다.


결혼은 선택에 불과

넓은 의미로 보면 ‘미혼=싱글’로 통용된다. 하지만 요즘 떠오르고 있는 ‘싱글즈’는 ‘경제적 신체적 독립’을 이룬 자를 가리키는 게 보다 일반적이다. 무조건 결혼을 거부하는 독신주의자와는 다르다. “결혼은 선택 사항에 불과하니 혼자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아보자”는 게 이들의 생활 철학이다.

일간스포츠와 여성포털 마이클럽(www.miclub.com)이 최근 20~30대 여성 3,486명을 대상으로 공동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인생의 완성을 위해 결혼은 제 때 꼭 해야 한다’는 응답은 17.2%에 불과했다. 반면 ‘인연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굳이 결혼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3배가 넘는 68.8%로 조사됐다.

싱글의 최대 고민이라는 섹스에 대해서도 ‘싱글즈’는 당당하게 표출한다. 성욕은 식욕에 다음 가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배우자 없이 혼자 밤을 보내는 게 외롭지 않냐”라고 훈계조로 말했다가는 “저 애인 있는데요”라는 천연덕스러운 대답을 들을지 모른다.

영화 ‘싱글즈’제작사인 싸이더스가 홈페이지(www.4single.co.kr)에서 네티즌을 대상으로 성의식을 조사한 결과 ‘나는 주변의 남자(여자)와 침대에서 뒹구는 상상을 한다’라는 질문에 9,600여 명의 투표자 가운데 86%(5,908명)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그저 친구로 여겼던 그(그녀)와 하룻밤을 보내 버렸다면’이란 질문에 대해서도 네티즌들의 63%(4,748명)가 ‘모른 척하고 평소대로 행동한다’고 응답했다. 지금까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해 왔던 관념 ‘섹스=책임=결혼’과는 확연히 다른 관점이다.

싱글을 ‘미운 오리새끼’ 취급하던 사회의 따가운 시선도 사뭇 달라졌다.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즐기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어떤 경우에는 ‘당당하게’ 비춰지기도 한다. A반도체 회사에 다니는 이모(30ㆍ여)씨는 2년 전 현재의 회사로 옮기면서 독립을 선언했다.

출퇴근 시간을 줄여 일에 집중하겠다는 것을 이유로 부모를 설득했지만, 보다 자유로운 생활을 원했던 마음이 더 컸다. 이씨는 “주말이나 퇴근 후에 친구들과 만나거나 여가 활동을 하면서 자유를 만끽한다”며 “주변에서도 걱정보다는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 젊은 계층 일부에서는 관습과 틀에 얽매이지 않은 ‘싱글즈’의 삶이 동경이 대상이 된 것이다.


싱글산업 연간 6조원 규모

‘싱글즈’의 증가로 문화ㆍ사회적 트렌드도 바뀌고 있다. ‘싱글즈’는 ‘더블’이 주류인 사회에서 백안시되던 이단적 존재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ㆍ경제 코드를 열어가면서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높은 소비 성향 때문에 싱글 산업이라는 새로운 산업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싱글즈’를 위한 전용 주거공간이나 혼자 사는 데 필요한 각종 생활 서비스 상품이 그것이다. 업계 전문가들이 바라보는 싱글 산업의 시장 규모는 연 6조(兆)에 이른다.

‘싱글즈’가 살기에 적합하다는 서울 강남 지역 일부 원룸형 아파트의 경우 청약 경쟁률이 250대 1을 넘어섰고, 소형 TV와 냉장고 등 싱글즈 전용 가전 시장도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LG전자가 선보인 소형 냉장고 뉴젠은 ‘싱글즈’의 수요에 힘입어 최근 매출이 2배 이상 늘었다.

인터넷도 싱글즈를 위한 커뮤니티가 광대하게 형성되고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www.daum.net)에 개설된 싱글 관련 카페는 무려 60여 개에 달한다. 싱글 온라인 동호회인 솔로베이(www.solobay.com)와 싱글공화국(cafe.daum.net/singleland) 등은 건강ㆍ재테크 정보, 법률 상담과 인테리어 컨설팅 등 풍요로운 싱글 생활에 나침반이 돼 줄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혼자 살아도 전혀 아쉬울 게 없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홀로 지내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생활 환경이 싱글즈의 증가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문화평론가 김동식씨는 “과거에는 의식주 등 생활 여건이 가족 단위로 형성됐으나 최근에는 1인 단위로 바뀌고 있다”며 “사회 경제적으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기 위한 방안으로 싱글을 선택하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개인주의 확산이 '싱글족'양산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대한 반발과 ‘나’라는 가치관의 중요성이 커진 것도 싱글즈 확산의 주요 원인.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90년대 이후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개인주의의 영향으로 독신이 새로운 생활 양식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며 “이혼율이 급증하는 등 전통적인 공동체 생활에 대한 가치와 사고 방식이 빠른 속도로 퇴조해감에 따라 ‘싱글족’은 머지 않아 서구처럼 단단히 뿌리를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 2003-10-02 17:34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