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자금 제도 등 구조개선 시급, 유권자 의식도 변해야

[정치인의 돈] 정치는 곧 돈이다?
정치자금 제도 등 구조개선 시급, 유권자 의식도 변해야

8월14일 서울지법 형사 519호 법정. 재판부는 2000년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 과정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양심선언’을 한 김근태 의원에게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5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김 의원에게 2,000만원을 전달한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에게는 700만원 벌금형이 선고됐다.

김 의원은 명백히 현행법을 위반했지만, 현실과 괴리된 정치자금법을 ‘내 문제’로 고발한 용기를 참작해 벌금형을 선고했다는 게 재판부의 설명이다. 내심 선고유예를 기대한 김 의원은 기자들에게 “간밤엔 잠도 안 오고, ‘내가 이 쓴 잔을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만 나오더라”며 “이제는 법과 싸우지 않고 모순된 현실과 싸우겠다”고 했다.

또 “지금대로라면 정치가 주기적으로 돈 때문에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의 말은 국민의 동의를 통해 정치자금의 출납 한도를 현실에 맞게 높이되 투명성을 더욱 강화해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정치 현실을 바꾸자는 호소였다.

사실 정치인들은 ‘여의도 의사당이냐 영등포 구치소냐’는 종이 한장 차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한국적 현실에서 정치를 제대로 하려면 ‘실탄’, 즉 돈이 필요하고, 또 ‘정치 있는 곳에 돈이 따르기’ 마련이어서 정치자금에 관한 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돈에 자유로운 정치인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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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정치에서 ‘정치=돈’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지는 오래 됐다. 한나라당의 한 수도권 초선 의원은 “국회의원이 되고 1년간 의정활동을 하면서 ‘돈’의 위력과 두려움을 실감했다”고 털어놨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놔도 지지층을 만드는 데는 돈에 의한 대면(對面)접촉이 최고였다는 것. 전쟁에서 이기려면 최신 무기가 필요하듯 정치에서도 실탄이 없으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정치인(국회의원)의 수입은 크게 후원금(개인, 법인), 중앙당지원금, 당비 등으로 구성된다. 후원금의 경우 상한액은 연간 3억원으로, 선거가 있는 해는 두배인 6억원이다. 중앙당 후원금과 당비는 선거철이 아니면 미미한 편이다. 지출은 대부분 지구당 운영비와 국회 의원회관 운영비, 정책개발비 등으로 나눠진다.

    지난 4월부터 정치자금을 공개한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의 7월 수입·지출 내역을 보자.

    수입은 세비(월급, 792만9,200원), 후원금(1,200만원), 중앙당 지원금(400만원), 국회 지원경비(251만8,000원), 당비(35만,400원) 등 모두 2,679만7,600원이었다. 지출은 지구당 운영비(1,459만5,876원ㆍ63%), 의원회관 경비(871만170원) 등 총 2,330만6,000여원으로 843만7,000여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월 적자가 이 정도라면 1년이면 1억여원이 모자란다는 계산이다.

    선거가 있으면 적자는 더욱 늘어난다. 지난해 국회의원 후원금 모금에서 7억3,000여만원으로 1위를 차지한 민주당 박주선 의원은 2001년 이월분 1억여원을 뺀 나머지 6억여원을 지난해 지방선거와 대선을 치르는데 대부분 사용했다고 전했다.

    박 의원은 “선거가 있으면 지구당도 선거 체제로 바꿔 지구당 운영비도 배 이상 늘어난다”고 고백했다. 민주당 정치개혁특위 정치자금법소위 간사이기도 한 그는 “의회정치는 어차피 ‘선거제도’와 ‘정당제도’라는 양대 원칙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데 국내정치에서 두 제도를 유지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든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지난 16대 총선의 경우 후보자들이 선거비용으로 평균 5억원을 지출(7월23일 민주당 정책토론회 자료)한 것으로 조사돼 선거제한비용인 1억2,000여만원의 4배를 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난해 각 정당에 전달된 국고보조금 1,138원 중 대부분이 선거용 ‘실탄’으로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지구당은 '돈 먹는 하마'

    정치인들이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돈먹는 하마’로 비유되는 지구당 운영비. 지방출신의 한나라당 K의원은 “돈이 없으면 지방의 조직관리가 안 된다”며 “수입의 대부분은 지구당 운영에 사용된다”고 말했다.

    그는 7월한달에만 지구당 운영에 3,200여만원을 썼다며 연간 4억원 가까이 소요된다고 설명했다.

    K의원이 공개한 지구당 운영비 지출 내역을 보면 경조사비용 700만원, 밥값(지구당 주최 각종 행사) 600만원, 개인 홍보비(연말에 수첩 1만개 제작) 200만원, 사무실 운영비 250만원, 사무실 인건비 500만원, 의정보고회(연간 1차례 2,000만원 안팎) 160만원, 의정보고서 제작·발송비(연간 2차례 4,000만원 안팎) 340만원, 후원회(연간 1차례 3,000만원 안팎) 250만원, 면 협의회 지원 100만원, 선거빚 이자 100만원 등 모두 3,200만원이다. 한나라당 원 의원 보다 2배이상 많다.

    이러한 사정은 ‘짠돌이’로 알려진 한나라당 H의원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사무실 운영(인건비, 임대료 등)에만 기본적으로 800여만원이 들고, 지역구 행사에 얼굴을 내밀면 1,000만원을 훌쩍 넘는다”며 “지구당은 ‘필요악’이지만 개선 내지 폐지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돈씀씀이가 크다 보니 정치인들 사이에선 ‘뒷돈(비자금, 사이드머니) 주머니’가 따로 있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매월 4,000여만원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세비 등 법정 지원금만으론 불가능하다”며 “기업이나 친구 등의 지원(화이트머니)을 받고 선관위 신고액에서 30% 정도는 비자금으로 빼두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이러한 채널이 없는 의원들로서는 현실적으로 소위 ‘검은 돈’의 유혹에 쉽게 빠질 수밖에 없다.

    임성학 연세대 리더십센터 연구교수는 7월23일 민주당이 주최한 정치자금법 토론회에서 “정치자금 문제는 일부 정치인, 정당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정치시스템적 문제”라며 “한국형 ‘돈정치’ 구조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의 정치제도를 개선(중앙당, 지구당 슬림화 등)하고, 비현실적인 정치자금의 양성화, 정치자금 제도의 투명성 확보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금권ㆍ계보정치서 탈피해야

    현대 민주주의는 흔히 ‘돈의 정치’(money is the mother's milk of politics)라고 한다. 국민의 다양한 이해를 집약한 정책을 개발하고 이를 토대로 국민에 심판 받는 선거에 많은 자금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정치자금과 관련한 국내 정치의 패러다임은 일부 발전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아직 권력중심, 지역주의, 금권·계보정치 등의 잔영이 남아 있다. 이는 우리 정치가 김근태 의원이 지적한 ‘원칙 없는 야만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증이기도 하다. 우리가 ‘돈 정치’에서 탈피, 문명사회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의 노력 못지않게 유권자인 국민의 각성이 엄밀히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종진 기사


    입력시간 : 2003-10-05 20:45


    박종진 기사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