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가상 시나리오꼭지점에 다다른 부동산, 경기침체기의 가격급등은 '악성거품'

[부동산 버블 '연착륙이냐 붕괴냐"] 버블붕괴, 그 후
2005년 10월, 가상 시나리오
꼭지점에 다다른 부동산, 경기침체기의 가격급등은 '악성거품'


2005년 10월 서울 도심의 풍경은 음산하다. 예년보다 쌀쌀한 날씨에 코트 깃을 여민 채 총총 걸음을 재는 이들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찾기 힘들다. 무언가에 잔뜩 화가 난 듯 울그락 불그락한 표정을 짓는 이, 수심 그득한 얼굴로 연신 담배를 뻐끔거리는 이, 삶에 지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벅터벅 힘겹게 발걸음을 떼는 이….

차등을 켠 채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이 길 가에 줄줄이 정차한 채 나른한 하품만 하고 있고, 썰렁한 도심 백화점에서는 막바지 세일을 알리는 플래카드만 행사 중임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대기업 계열사에 과장으로 근무하는 A(39)씨의 심정 역시 이들 군상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아니 더하면 더했을까. 퇴근 후 회사 앞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 잔을 기울이다 문득 2년 전의 기억에 잠긴다.


부동산 불패 집단최면, 상투를 쥐다

“사람들이 괜히 강남, 강남하는 게 아니더라. 가만히 앉아 있어도 집 값이 껑충 뛰지, 생활 여건 좋지. 게다가 아이들 교육을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서두르는 게 좋다. 꼬박꼬박 적금 붓고 은행 정기예금에 돈을 넣어둬 봐야 평생 서민 신세 못 면하는 거지.” 그 때도 아마 근처 어느 술집에선가 친구들과 술잔을 부딪히고 있었다. 이재에 밝다는 친구 녀석들의 다그침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긴, 나도 평생 서민으로 살 수는 없잖아.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닌데.”

서울 강남에 6억7,000만원 짜리 32평 아파트에 매매 계약 도장을 찍은 것은 그 해 9월. ‘부동산 불패’라는 집단 최면 상태가 벌써 3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경기 일산의 집은 그대로 둔 채 전세를 끼고서라도 강남에 집 한 채를 더 마련하기로 했다. 주식은 물론 적금까지 해약하면서 싹싹 끌어 모은 현금 2억2,000만원이 가진 돈의 전부였다. 전세(2억5,000만원)를 끼고도 2억원 가량을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야 했다.

평생토록 남의 빚 한 번 지지 않고 살았던 그에게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스스로도 의아해할 정도였다. 한 달에 물어야 하는 이자만도 100만원이 넘었다. 그래도 주변 사람들은 “매월 100만원씩 적금을 붓는 것보다는 100만원씩 이자를 갚는 것이 더 낫다”고 부추겼다.

이듬해 봄,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토지공개념 도입 등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 정책에 따라 부동산 가격이 잠시 주춤하는 거려니 생각했다. 허나 심상치 않았다. 6억원 이상까지 치솟았던 아파트 가격이 자고 나면 1,000만~2,000만원씩 하락했다.

비단 강남 뿐만이 아니었고, 또 아파트 만이 아니었다. 서울 전 지역의 아파트와 토지 가격은 물론 행정 수도 이전 기대감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충청권 부동산 가격도 연쇄적으로 폭락했다. 언론은 매일 1면 머릿기사를 부동산 관련 기사로 도배했다. 드디어 버블이 붕괴하고 있다고, 일본의 전철을 되밟게 됐다고.


부동산 가격폭락, 제2의 IMF 위기

2년 새 한국 경제는 초토화했다. 부동산 가격은 정점에 비해 30~40% 가량 폭락했다. 은행들은 대출 창구를 아예 닫아버린 채 대출금 회수에 나섰다. 아무리 담보를 확보하고 있다지만 담보 가치가 대출금에도 못 미치는 상황에서 그저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터였다.

전국 곳곳에서 급매물이 쏟아졌다. 벼랑 끝에 몰린 집주인들이 대출금을 갚기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었다. 시세보다 2,000만~3,000만원씩 싸게 물건을 내놓아도 팔리지 않았다. 당연히 가격은 더 떨어졌다. 악순환이었다. 그래도 집을 팔아 빚을 처분한 이들은 그나마 다행인 경우였다.

파산한 가계가 속출했다. 속락하는 가격에 손도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한 채 속속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동반 자살求?가족들의 뉴스도 쉴 새 없이 전해졌다. 2년 전 340만명이던 신용불량자는 500만명을 넘어선 지 오래. 경제활동인구 4명 중 1명 꼴로 신용 불량의 낙인이 찍힌 셈이었다.

은행에도 부실 채권이 쌓이기 시작했다. 은행권 가계 대출 연체율은 1~2%대에서 순식간에 7~8%로 치솟았다. 카드사의 부실률은 20%를 훌쩍 넘어섰다. 금융기관들이 또 다시 줄줄이 도산할 것이라는 경고도 잇따랐다. 기업 대출이 부실화하면서 1997년의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를 맞았다면, 이제는 부동산 버블 붕괴와 함께 가계 대출이 부실로 전락하면서 제2의 IMF를 맞을 판이었다.

거품 붕괴에 따른 자산 가격 하락은 극심한 소비 감소로도 이어졌다. 대표적인 소비 지표인 도산매판매액은 매월 2~3%씩 하락했고, 백화점 매출은 2~3년전에 비해 30~40% 가량 줄어들었다. 은행들이 보수적인 자금 운용에 나서면서 기업들의 자금줄도 죄여 들었다.

가뜩이나 위축된 기업 투자는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내수, 투자가 모두 부진한 상황에서 오직 기댈 것은 수출 뿐이었지만 2년 전부터 지속된 달러 약세 기조 속에서 수출 경쟁력을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소비와 투자 침체는 연쇄적으로 물가 하락, 임금 감소, 실업 증가를 불러왔다. 전형적인 디플레이션 상황이었다. 언제 탈출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2년새 6억 7,000에서 3억 5,000으로

그간 A씨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6억7,000만원에 사들였던 강남 아파트는 2년 새 절반을 겨우 넘는 수준인 3억5,000만원까지 추락했다. 눈 앞에 닥친 가장 큰 문제는 재계약이 임박한 전세였다.

2억5,000만원이던 전세가는 1억5,000만원으로 그새 1억원이나 떨어져 있었다. 세입자에게 돌려 줄 1억원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은행에서도 대출 회수 압력이 들어왔다. 담보 가치가 하락했으니 대출금 2억원 중 일부는 갚으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해결책은 강남 아파트를 처분하는 것이 유일했다. 3억원이 넘는 돈을 고스란히 허공에 날려야 할 판이었지만 방도가 없었다. 아파트 매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금액은 3억6,000만원.

우선 전세금 2억5,000만원을 내주고 나머지 돈은 은행 대출금을 상환했다. 그렇게 해서 남은 대출금은 9,000만원. 거주하던 일산 아파트도 1억2,000만원에 팔고 방 2칸, 보증금 5,000만원 짜리 전세집으로 옮겼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2,000만원의 은행 빚을 안아야 했다.

가정 일밖에 모르던 A씨의 아내는 요즘 근처 아파트 단지에서 파출부 일을 나간다. 초등학교 1, 2학년인 아이들 교육을 시키고 몇 년 내 다시 조그만 집 한 채라도 마련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A씨가 회사에서 받는 월급도 벌써 3년 째 동결된 터였다.

두 병째. 이날도 A씨는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 2병을 다 비웠다. 그리고 비틀비틀 집으로 가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술 기운에 막 잠이 들려는 순간, 지하철 TV를 통해 희망인지 절망인지 모를 캠페인 방송이 어렴풋이 귓가에 맴돈다. “우리는 제2의 위기도 힘차게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과연 비현실적인 상상속 이야기일까?

최악의 시나리오다. 허나 비현실적인 상상은 아니다. 1980년대 주식과 토지 등 자산 가격의 가파른 상승이 계속되던 일본은 90년대 초 이미 최악의 거품 붕괴를 경험했다. 4만엔을 넘어섰던 닛케이 지수는 1만5,000엔까지 폭락했고, 105까지 치솟았던 지가(6대 도시 상업지역 지가지수)는 40 이하로 떨어졌다.

‘제로 금리’라는 극약 처방에도 불구하고 침체에서 허우적대는 장기 불황은 끝을 모른 채 계속됐다. 북유럽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목격했다. 80년대 후반 금융 및 외환 자유화로 시중 유동성이 넘쳐나면서 부동산과 주식 시장에 거품이 형성됐던 스웨덴은 89년 금리 인상, 세제 개혁 등과 함께 거품이 붕괴되면서 대형 은행들이 무더기 도산 위기에 빠지는 상황을 겪었다.

자산 가격에 거품이 있는지, 또 있다면 어느 정도인지를 미리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최근 3년 가까이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집값이 급등했다지만 이를 무조건 폭발 일보직전의 거품이라고 단정하기란 어렵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저금리로 인한 풍부한 시중 유동성, 단순한 투기가 아닌 교육 목적이나 행정 수도 이전 기대 등에 따른 실수요 등을 감안할 때 지금보다 가격이 더 오를 수 있거나 혹은 하락하더라도 연착륙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건국대 부동산학과 고성수 교수는 “일본의 경우 역시 거품이 붕괴하기 직전까지 경제학자들 사이에 심각한 버블 상태는 아니라는 연구 결과가 더 많았다”며 “따라서 어느 정도 위기가 감지됐을 때 사전 예방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최근 아파트 가격 상승 속도를 소득 증가 속도, 주택의 내재 가치 변화 등과 비교한 결과를 근거?거품이 무시할 수 없는 심각한 수준이라는 진단을 내놓는다. 2001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거시 경제의 명목 성장률은 연평균 6.5%에 그친 반면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률은 연평균 25.2%에 달했고, 아파트 매매 가격 대비 전세 가격 비율이 2001년 10월을 정점(64.4%)으로 올 8월에는 52.4%까지 떨어진 것 등이 대표적인 통계들이다.

게다가 경기 침체기에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는 점에서 거품 중에서도 ‘악성 거품’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붕괴가 시작되면 그 파괴력은 과거 일본, 북유럽을 능가할 것이란 얘기다.

최근 한국은행과 시중은행장들이 모여 “부동산 가격이 현재 거품의 ‘끝물’에 접근한 상태”라고 공통된 진단을 내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은행장들은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총액한도규제와 같은 조치는 부동산 거품의 급격한 붕괴를 불러 은행 부실화와 경기 침체를 가중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 만큼 담보 비율 축소 등 점진적인 조치가 바람직하다”고 입을 모았다.

김성식 LG경제연구원 연구원은 “주택 가격이 적정 수준을 초과한 상태에서 실물 경기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결국 거품 해소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라며 “지금이 부동산 시장의 연착륙이냐 아니면 거품 붕괴의 시작이냐를 가름할 중대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장기간의 ‘공짜 점심’은 없다는 교훈을 시장이 지금 실천적으로 일깨워주고 있다는 말이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 2003-10-23 10:06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