昌 선공에 盧 공세적 정공법 반격정치권 강타할 핵폭찬 여부에 관심, 정치개혁 물꼬 트는 계기될 수도

[대선자금 해법] "대선자금 판도라 상자 열자"
昌 선공에 盧 공세적 정공법 반격
정치권 강타할 핵폭탄 여부에 관심, 정치개혁 물꼬 트는 계기될 수도


제2 라운드 공이 울린 것인가? 16대 대선이 끝난지 10개월이 조금 지난 시점에서 노무현-이회창 두 호적수는 또 다시 외나무 다리에서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고 있다. 지난해 대선 때의 경쟁이 서로가 가장 날카로운 창과 칼을 들고 벌인 공격 위주의 싸움이었다면, 이번에는 가장 탄탄한 방패를 들고 벌이는 수비 위주의 버티기 다툼이다. 국민 지지를 얻기 위한 경쟁에서 국민에게 보다 많은 용서를 구해야 하는 ‘저자세’로 상황만 바뀌었을 뿐이다.

SK비자금 사건이 결국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에게 넘어간 100억원으로 귀결되고 김영일 당시 사무총장은 소환 조사를 앞두고 있다. 이상수 열린우리당 의원도 당시 민주당 노무현 선대위에서 총무본부장을 맡으며 관리했던 자금 내역이 오락가락하며 연신 세간의 의혹을 받고 있다.

이 와중에 한나라당은 특검제 도입을 통한 양당의 동시 수사를 주장하고 열린우리당은 일단 검찰수사를 지켜보자는 쪽이다. 대선자금에서 한발 떨어져 있는 민주당과 자민련은 엄중 수사 및 공개 등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으며, 민주노동당도 나서서 정치자금의 어두운 그림자를 계속 강조하고 있다.

검찰 수사의 칼날이 노무현 대통령과 이회창 전 총재라는 양당의 핵심을 향해 다가 오고 있을 즈음, 한나라당 이 전 총재가 먼저 나섰다. 방패는 검찰을 향해, 칼은 노 대통령을 향해 빼어 들고 국민 사죄의 길을 택했다. “모든 죄를 자인하고 있으니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게 이 전 총재의 요지. 이는 곧 노 대통령을 우회적으로 압박하는 계기가 됐다. “나는 사죄했는데 너는 왜 그냥 가만 있는가”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3일이 채 지나지 않은 11월2일 노 대통령의 응수가 이뤄졌다. 노 대통령은 “공정하고 엄중한 검찰 수사가 이뤄지면 정치자금의 구조적 윤곽이 드러난다”고 밝혔다.

대선 자금이라는 화살촉이 이 전 총재로부터 넘어 오자, 그 예봉을 사실상 검찰 수사로 떠넘기며 “다 함께 지켜보자”는 식으로 화답한 것. 이는 대선자금에 관한한 한나라당에 비해 비교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년만에 재격돌한 ‘노ㆍ창(盧ㆍ昌)’ 라이벌전은 검찰 수사가 끝난 이후에야 승패가 갈릴 전망이다.


昌의 先攻, "감옥도 내가 가겠다"

한마디 사전 예고도 없었다. 대선 자금 관련 국민사과 기자회견을 하겠다는 통고가 느닷없이 당에 들어 온 것은 10월30일 당일 아침이었다.

이 전 총재는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그는 “지난 대선 때 한나라당이 불법 자금을 받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잘못된 일”이라며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것으로 법적 책임도 당연히 포함되며 검찰이 요구해 오면 피하지 않고 응하겠다”고 밝혔다. 사과가 아닌 사죄의 변을 내세운 뒤, 자신이 후보로 있었기에 벌어진 일인 만큼 모두 떠안고 가겠다며 강도 높은 발언이 이어졌다.

그는 이어 “입이 열개라 해도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고 위선적인 행동이었다고 비난 받아도 할 말이 없다”고 말한 뒤 잠시 목이 메인 듯 머뭇거리기도 했다. 평소 ‘대쪽’이라는 별명처럼 꼿꼿했던 그의 성품을 감안하면 이런 참회의 자리가 견디기 쉽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핵심 내용에서는 비껴갔다. SK로부터의 100억원 유입 과정에 사전이나 사후에 보고를 받았다는 질문에는 “모든 책임을 진다고 했으니 어떤 사안에 언제 알았느냐 몰랐느냐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답이었다.

어쨌든 이 전 총재의 기자 회견으로 각 당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숨죽이고 있던 대선 자금 문제에 이 전 총재가 먼저 선수를 치고 나오자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을 향한 공세에, 열린우리당은 수세적 자세에, 민주당은 양측을 싸잡아 공박하는 상황으예갛염?트였다.

한나라당 김영선 대변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31일 논평에서 “이제 노 대통령이 고백하고 사죄하고 책임질 차례”라며 “노 대통령은 비겁한 침묵을 깨고 고백ㆍ사죄한 뒤 책임을 져야 한다”고 노 대통령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이강두 정책위의장도 “대통령이 먼저 자신이 훌훌 털고 특검이瑩?뭔지 달게 받겠다고 나서야 되는 상황”이라고 강조했고, 다른 당직자들도 “이 전 총재는 사과했는데 노 대통령은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느냐”고 은근히 동일선상에 둘을 비교하며 올려 놓았다.

이에 열린우리당은 지극히 형식적인 사과이며 국민 바람과는 거리가 먼 회견이라고 혹평했으며, 민주당도 이 전 총재의 개입 여부가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민주당 김성순 대변인은 이 전 총재의 회견내용을 질타한 뒤에는 곧바로 “후보단일화 이전에는 한나라당, 이후에는 노 후보쪽으로 돈이 몰렸다는 것은 국민 상식”이라며 “대선자금 규모와 사용처를 노 대통령이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당 조순형, 김경재 의원 등도 “이 전 총재와 비슷한 발언을 노 대통령도 나서서 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이 전 총재의 사과ㆍ사죄성 기자 회견이 ‘사즉생’(死卽生)의 자세를 보임으로써 상대적으로 노 대통령을 궁지에 몰아 넣는 형국이 된 셈. 국민 상당수도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게 대선자금 문제인데 그렇다면 노 대통령은 떳떳한가”라는 의문을 슬며시 갖게 됐다는 것이다. 이 전 총재의 올인(All In)식 공세가 여기까지는 분명 상당한 효과를 거둔 편이었다.


비교우위 자신한 盧, "누가 절제했고 누가 썼는지"

가만히 앉아 당하고 있을 노 대통령이 아니다. 승부사 기질로 보면 오히려 한 수 위일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은 11월2일 느닷없이 청와대 춘추관으로 나와 기자들과 즉석 간담회를 시작했다. 내용은 대선자금의 전모를 규명하자는 입장 천명. 검찰 수사를 통해 정치자금의 구조적인 윤곽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창(昌) 선공에 대한 노(盧) 반격’인 셈이다.

노 대통령은 간담회에서 “이번에 정치자금의 전모를 드러내고 수사를 깔끔하게 하면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라며 “차제에 정치자금 제도의 근본적 개혁이 이뤄질 수 있는 방향으로 수사가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또 “검찰이 흔들리지 않고 수사하되 한 두건의 자금수수 뇌물에 그치지 말고 국민이 이해하고 그것이 정치개혁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도록 수사되길 바란다”고 거듭 검찰의 수사를 독려했다.

핵심은 철저하고도 공정한 검찰 수사를 담보로 각당의 정치자금 전모를 모두 밝혀내자는 것. 여기에 지난 대선 때 각 당 후보가 결정된 후 투입된 정당자금과 선거자금을 전부 공개할 것도 제안했다. 중앙당과 지구당, 직능조직과 사조직 자금까지 모조리 공개해야 정치자금의 전모가 밝혀질 것이라며 검찰 수사의 각론까지 이례적으로 밝혔다.

다만 한나라당이 추진하고 있는 특검법에 관해서는 “검찰이 수사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특검법을 내놓는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고 검찰 수사 흔들기라는 결과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일축한 뒤 은근히 검찰에 대한 후원 의사를 내비쳤다.

노 대통령은 또 이어 “내 흉은 숨기고 남의 흉만 들추고, 남의 흉을 크게 들춰내 흉을 감추려는 공방으로는 국민 신뢰를 받을 수 없다”며 “회피하거나 덮어씌우지 말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수사에 협력하자”고 덧붙였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공격에 대해서는 정치적 공방으로 슬쩍 돌려놓으면서, 검찰 수사를 이번 대선자금 파문의 결정체로 각인시킨 셈이다.

이런 발표의 이면에는 한나라당에 비해 비교우위에 있다는 자신감이 분명 내재돼 있다. “누가 절제했는지 누가 마구 썼는지 국민이 구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부분과 검찰의 수사방향을 중앙당에서 사조직 장부공개 및 조사까지로 한정해 밝힌 것도 이미 결과를 예단하고 나선 행동으로도 보여진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약속이나 한 듯 혹평과 평가절하로 반응했다. 특히 검찰 수사 지시부분은 대통령이 아니라 검찰총장이 언급했어야 할 일이라고 강도높게 지적했다. 한나라당 박 진 대변인은 “검찰수사가 살아있는 권력에는 제대로 칼을 들이대지 못하고 패자인 야당에만 가혹하기 때문에 전면특검을 제안한 것”이라고 강조했고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도 “노 대통령이 입으로는 검찰 수사 협조를 말하면서 행동이 없는 것은 진실성이 없는 것”이라고 쏘아 붙였다.

검찰 수사를 독려하고 후원하는 입장으로 돌아선 노 대통령은 이로써 이회창 전 총재의 기자회견으로 촉발된 여권 압박을 간단히 피해나간 셈이 됐다.


상황에 따라 이탈리아판 대 격변예고

1992년부터 3년간 이탈리아에서는 검찰이 ‘마니 폴리테(깨끗한 손)’식 부패 척결에 나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적이 있다. 당시 이탈리아 검찰은 정치인들과 관련한 부패 정치자금을 수사하면서 1,000여명에 달하는 관련 인사를 처벌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 정치는 검은 돈 및 검은 세력과 상당 부분 단절이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물론 이 같은 무차별적 단죄는 경제 활동을 마비시켜 경제 성장률을 마이너스로 돌리는 이례적 부작용으로 이어 지기도 했다.

어쨌든 검찰은 노 대통령의 대선자금 전모 공개 촉구로 인해 이젠 SK에 국한된 수사를 전면 확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물론 검찰 내부에서는 노 대통령 발언이 수사 간섭이란 비판을 하면서도 차제에 전면 수사로 전환하는 것이 검찰의 살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다. 송광수 검찰총장도 11월3일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대선 자금의 수사 확대를 암시하기도 했다.

이 경우 대기업 및 정당 관계자들의 줄 소환과 기업 계좌에 대한 전면 추적이 불가피하다. 이 경우 대선을 치른 양대 정당의 의원 및 실무자와 기업 관계자들의 처벌도 불을 보듯 뻔하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과 이회창 전 총재의 법적 처리 문제는 별개다. 대선 자금을 본인이 직접 사용한 것이 아니고 당에서 모금하고 집행했다는 쪽으로 진술한 다면 딱히 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법률적 책임은 없지만 도덕적 책임만 남는 순으로 결론지어질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실제 처벌되는 범위가 어느 선에 까지 이르게 되느냐는 것이다. 양당의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100% 적법 처리된 자금만 갖고 대선을 치렀을 것이라고 보는 국민은 없다. 양당의 당시 사무총장급 실무자에서 시ㆍ도지부별 책임자, 직능 및 사조직 관련 핵심 실무자들을 방대하게 조사할 경우, 상당수가 법망에 걸려들 수 있다.

검찰은 또 형평성을 중시하고 있다. 가뜩이나 야당만 표적 수사한다는 의심을 받는 터에 여당 인사들을 보호하거나 감싸 줄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노 대통령 핵심 측근들도 안심할 수 없는 처지다. 물론 이 경우 야당인 한나라당은 거의 초상집 같은 분위기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회창 전 총재의 기자회견으로 시작된 대선자금 사죄성 럭비공은 한나라당에서 청와대 노무현 대통령에게로 튀어 갔고, 여기서 노 대통령의 춘추관 기자회견으로 인해 이 공은 서초동 검찰청사로 들어갔다.

이제 검찰에서 나올 때, 이 공은 매머드급 핵폭탄이 돼 정가로 되돌아 올 지도 모를 일이다.

염영남기자


입력시간 : 2003-11-05 10:37


염영남기자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