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를 죽어가는 인생들, 절망으로 지새는 벼랑 끝 삶

[쪽방동네 사람들] 인생 막장 언저리를 맴도는
하루하루를 죽어가는 인생들, 절망으로 지새는 벼랑 끝 삶

화려한 네온 사인을 내뿜는 롯데백화점 영등포점에서 오른쪽으로 난 작은 샛길로 몇 발 자국만 내딛으면 음산한 분위기의 골목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 영등포 1가 역전 치안센터 옆, 속칭 ‘쪽방촌’. 통로부터 예사롭지 않다. 입구 보도와 전봇대에 붉은 글씨로 나붙은 ‘청소년 출입 제한구역(00:00~24:00)’이란 표지판이 괜히 사람을 주눅 들게 한다.

두 사람이 칼잠을 자듯 어깨를 비껴야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골목은 그렇게 다가 왔다. 안으로 한발짝 들어 가자, 양쪽으로 낡은 판잣집들이 벌집처럼 다닥다닥 늘어 서 발목을 붙잡는다. 대낮인데도 화려한 장식등을 켜놓은 백화점에서 불과 20여m 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 곳이 낮의 동네라면 이곳은 밤의 동네다. 백화점에 가려 햇볕조차 들지 않는 곳에 쪽방촌은 자리하고 있다.

보기에도 금방 쓰러질 듯한 낡은 판잣집들은 눈이나 비가 오면 그대로 스며들 정도로 쩍쩍 갈라진 외벽과 지붕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외부로 나가는 출입구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 건물 안에는 좁고 어두컴컴한 통로 양쪽으로 0.5~0.7평의 쪽방 600여개가 8~20개씩 하나의 덩어리를 이뤄 미로처럼 숨어 있었다.

골목에는 이젠 도심에서 구경하기 힘든 연탄재와 짝을 맞추듯 소주병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 거리 곳곳에는 가구와 이불이 어수선하게 쌓여 있었다.


"끔찍한 현실, 말해 뭐해"

골목 어귀에 들어서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동시에 “뭐 하러 왔소?” 하는 마른 외침 소리가 날아든다. 처음 경계의 눈빛을 감추지 않았던 그들은 사정을 설명하자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벌겋게 술에 취해 거리를 배회하던 너댓 명의 쪽방촌 사람들이 일시에 카메라를 든 취재 일행을 에워 싸고 하소연한다.

겨울 찬바람 탓만이 아니다. 10월말 영등포 구청이 녹지 조성 사업을 벌인다며 쪽방촌 180여세대가 철거된 탓에 민심은 흉흉하기만 하다.

“보름이나 한뎃잠을 잤어요. 주소를 이리로 안 해 놓아서 보상도 못 받고 갈 데가 없어요. 춥고 속상해서 새벽에 막걸리 두 잔 마셨어요.” 얼마 전 철거된 영등포 1가 쪽방의 주민이었다는 30대 후반의 김모씨가 답답한 사정을 내뱉었다. 황모(36)씨는 한술 더 떴다. “아침에 인나(일어나서) 술(소주) 네 병 깠어요. 여긴 밥 사주는 사람은 없어도 술 사주는 사람은 많당께.”

조모(36)씨는 울기라도 할 듯 애처로운 목소리다. “목이 아파. 편도선염인데, 물을 먹어야만 겨우 음식이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의 신세 타령이라고 치부하고 지나칠 수 없는, 핍진해 버릴대로 핍진한 사람들의 하소연이 냉기를 뚫고 올라 왔다. 열악하기로 서울에서 첫째 간다는 영등포 일대 쪽방 사람들의 기구한 한탄은 끝이 없다.

사람들 아무나 붙잡고 “날씨가 추워지는데 겨울은 어떻게…”라며 운을 떼면 기다렸다는 듯이 “말해 무엇 하겠어요. 정말 끔찍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때마침 주민 성모(51)씨가 밖의 소란을 보고 고함을 내지른다. “절마들(저놈들) 얘기 들어 소용 없어요. 하루 일 가면 몇 만원은 벌 텐데, 일 안 하고 술 마시니까 저 모양이지. 그리고 가만 놀아도 공짜로 밥 주는데 왜 일 가겠어요.” 무료급식소 말이다. 그래도 분이 덜 풀렸는지 그는 단말마 같은 저주를 내리 꽂았다. “올 겨울에 많이들 죽어 나갈 것이오. 보시오. 어디 성한 사람이 있나….”

건물 끝자락 한움큼 방이 그의 마지막 의탁처다. 따라 들어간 0.7평짜리 보금자리는 머리를 숙여서야 겨우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전기 밥솥, 밥그릇 몇 개, 몇 벌 안 되는 옷가지로도 방 안은 꽉 찼다. 세탁한 지 오래돼 땟국물이 흐르는 1인용 이불 위에는 결핵ㆍ당뇨ㆍ고혈압 약봉지와 디스 담배갑만 뒹굴고 있었다.

“외로워서 담배(하루 한 갑)만 핀다”고 넋두리다. 스물 두 살 때 집에서의 우연한 추락 사고로 척추를 다녀 지체 2급 장애인이 된 뒤 결혼도 못 하고 이 곳으로 찾아 들었다는 그는 정부 지원금으로 생계를 이어 간다. 기초 생활 보장비로 받는 31만 4,000원에 장애수당 80,000원이 한 달 생계비의 전부. 방값 20만원을 내고 나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정작 그를 몸서리치게 하는 것은 딴 데 있었다. “가난보다 고독이 더 견디기 힘들다”고 그는 말했다.

원래가 안온했던 시절이 없던 영등포 쪽방촌 동네라지만, 요즘은 아예 벼랑끝이다. 무작정 상경하는 사람들로 붐볐던 1950년대엔 윤락녀들이 거주하는 여관 밀집촌이었으며, 70년대 중반 윤락행위가 금지된 이후에는 인근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집 없는 독신자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그러다 2003년 현재는 노숙자, 전직 매춘여성, 장애인, 가난한 주민들이 뒤섞여 살아 가는 ‘슬럼가’를 이루고 있다. 이런 쪽방 지대가 서울에만 해도 종로, 중구, 용산, 영등포구 등 4개구 8개 지역에 대략 3,000여 명이 살아 가는 것으로 서울시는 추산한다.

보통 0.5평에서 0.7평 크기인 쪽방의 한달 방세는 보증금 없이 월 15만~20만원 선. 월 10만~11만원에 거래되던 이 일대 쪽방들은 지난달 철거 이후 방세가 껑충 뛰어 올랐다. 그래도 일세 6.000원~7,000원만 내면 하룻밤을 보낼 수 있지만, 장애가 있거나 노령이거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노무자들이 대부분인 이 동네에서는 이마저도 만만치 못 하다.


잠재적 노숙자들

영등포 쪽방 상담소에 의하면 80% 이상은 단독 가구이며, 60대 이상 노년층이 많다. 대부분 막노동을 하면서 1인 가구의 최저 생계비인 월 35만원 수준에서 근근이 살아간다. 병이 나거나 일거리가 없을 때엔 방세를 못내 쫓겨나 노숙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쪽방 어귀에서 만난 40대 후반의 주민은 “아침에 일 찾으러 나갔다, 허탕치고 돌아왔다”고 탄식했다. 그는 “몇 번 바람을 맞고 나면 속이 허해져 술만 들어간다. 방세도 일 주일치나 밀렸다”고 말했다. 영등포 노숙인 쉼터와 쪽방상담소를 운영하는 광야교회 김양옥 부목사는 이런 쪽방 주민들을 ‘잠재적 노숙자’라 표현했다. 그는 “지난해 겨울만 해도 전국에서 300여 명이 동사했다“며 “쪽방 생활자들에게 적극적인 지원 대책을 마련해주는 것만이 노숙자 양산을 막는 길”이라고 말했다.

오후 1시, 다리 밑 공터에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인근 광야교회와 토마스의 집(천주교 계열의)에서 무료 급식을 나눠주는 시간이었다. 30분 전부터 모여든 사람들은 한 눈에도 100여 명은 훨씬 넘어 보였다.

교회의 급식 봉사자는 “근래 들어 급식소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며 “평소 점심 때는 150명 정도의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데, 어제는 250명이 넘게 찾아 오는 바람에 준비한 밥이 모두 동이 났다”고 말했다. 춥고 배고픈 사람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냐는 그의 말에 토를 달 수 없다.

식사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엔 젊고 건강해 보이는 이들도 눈에 띈다. 유난히 말쑥한 차림의 구모(30)씨는 “9월 초에 경기가 안 좋아서 다니던 식당이 문을 닫았다. 추석 쉬고 나면 일자리가 생기겠거니 했는데 영 가망이 없어 보인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중국집 주방장으로 일했다는 30대 초반의 한 청년은 “싼 임금으로 일하는 중국 사람들에 밀려 일자리를 잃었다”며 “가뜩이나 청년 실업 문제도 심각한데 왜 불법 체류자를 두고 보느냐”고 분통을 터트렸다.

이 사회에도 아직 운수가 거덜 나지 않은 사람은 있다. 몇몇으로 팀을 이뤄, 가끔 막노동 자리를 찾아 나가는 자들이다. 건장한 신체가 마지막 밑천이다.

그러나 거개의 쪽방 사람들은 거처가 일정치 않은데다 질환을 앓고 있어 취업 알선 대상에서조차 제외되기 일쑤다. 운 좋게 고정적인 일자리를 따냈다고 해도 당장 내일 방값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라, 월급으로 임금을 주는 업체는 지레 포기하게 된다는 게 이들의 팍팍한 사연이다.

추위에 떨며 술로 하루를 보내는 게 대부분의 쪽방 주민들 삶이다 보니, 몸이 성치 않은 것은 당연지사. 동네 어귀에 자리잡은 무료 진료소인 요셉의원에는 아픈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거기서 만난 한 30대 남자는 가방에서 약꾸러미 대여섯 개를 꺼내놓더니 “어떤 약을 언제 먹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교통 사고를 당한 이후 툭 하면 노숙하고 끼니를 거르다 보니 약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 쌓여만 간다는 것이었다.

이 병원엔 하루에도 평균 120~150명의 환자가 진료를 받는다고 한다. 이들은 간경화, 당뇨, 고혈압, 폐결핵 등 보통 서너개씩의 만성 질환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터라 자활을 포기한 지 오래다. 상담소의 김형옥(32) 사회복지사는 “쪽방 거주자 대부분이 알코올 중독자이거나 심신 미약자“라며 “열악한 주거 환경이 질병을 낳고, 질병이 다시 노동력을 앗아가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희망없는 生, 인생포기

또 다른 쪽방촌인 서울 중구 남대문로. 한국인 교포 2세로 일본에서 태어나 17살에 한국으로 건너 왔다는 박모(75) 할머니에게 이곳은 20년 넘게 살아온 마지막 고향이다. 사기 결혼을 당해 이혼하고 쪽방촌에 들어 왔다는 노파는 이렇다 할 돈벌이가 없어, 지하철에서 껌을 팔며 연명하고 있다.

“이제 얼음이 얼면 일 하고 싶어도 미끄러질까 무서워 나가지도 못할”만큼 그는 탈진해 있었다. 그러나 “반찬 값이라도 벌려면 한 달에 보름은 일을 나가야 한다”며 노쇠한 몸을 일으키는 노파를 어찌할 것인가.

월세 18만원에 얻은 기름 보일러 난방이라지만 차라리 싸늘한 얼음장이다. 주인집에서 밤에만 잠깐 난방을 켜 두는 탓이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에 무슨 월동 대책이 있겠어. 이렇게 사는 데까지 살아야지….” 박노인은 말끝을 못 다 맺는다. “사는 게 아니라 버텨 간다”는 말 한마디가 음습한 방 구석에 맴돈다.

소비의 천국 바로 옆, 24시간 통제 표지 너머의 삶은 이 시대 한국을 증거하고 있었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 2003-11-20 14:06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