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검 정국은 리더십 확고히 구축할 분수령단식으로 '올인', 당내 입지·정치적 위상 건 카드

[최병렬의 리더십] '야망의 계절'
특검 정국은 리더십 확고히 구축할 분수령
단식으로 '올인', 당내 입지·정치적 위상 건 카드


지난해 12ㆍ19 대선을 앞두고 득표전이 한창 가열되던 시절, 당시 노무현 후보에 대한 찬조연설에 나선 한 민주당 관계자가 군중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 후보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이런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이 나라도 국운이 크게 성장할 것이다.” 노 후보 지지자들은 박수를 보냈지만 정작 당사자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른 이야기로도 얼마든지 칭찬할 수 있을 텐데, 꺼내든 얘기가 고작 운 좋은 사나이라는 것 뿐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이 연설자와 노 대통령과의 관계는 소원해 졌다고 한다. 비단 이 일에서 연유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듣는 사람입장에서는, 그것도 대권에 도전한 후보 입장에서라면 썩 탐탁지 않은 이야기였음에는 틀림없다.

억세게 운이 좋은 노 대통령에게도 운으로만 따진다면 별반 뒤지지 않는 정치인이 있다. 바로 국회 과반의석을 보유한 거대 야당 한나라당을 이끌고 있는 최병렬 대표다. 최 대표는 85년 정계에 발을 디딘 뒤 지금껏 정치적으로는 늘 중심부를 떠나지 않았다. 의원 4선에 장관 3차례, 청와대 수석과 서울시장 1회씩, 야당 부총재에 이어 대표까지….

물론 최 대표 이외에도 5공 출범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줄곧 정계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해온 정치인이 한나라당이나 자민련에 더러 있지만 아무래도 경력이나 현재의 정치적 영향력 면에서는 최 대표를 따라올 자가 없다. 그만큼 최 대표는 노 대통령에 견줄 정도로 운 좋은 정치인에 속한다.

노 대통령과 최 대표가 모두 ‘럭키 가이(Lucky Guy)’이긴 하지만 양자 사이에는 그런 정치적 명운이 발휘되는 특성이나 형태는 서로 다르다. 노 대통령이 평생의 운을 한번에 쏟아붓는 일발필도식 모험가 형이라면 최 대표는 차근차근 적절히 쌓아올리는 정기적금식 노력형이다.

모험가 형은 KO 확률은 높지만 승률은 떨어진다. 그래도 인상적인 경기를 펼치기에 고정 팬은 늘 확보된다. 반면 노력형은 승률은 높지만 관중들에게 화끈한 인상을 심는 KO 승은 적다. 그래서 인기를 별로 못 얻는 단점이 있다.

확연히 스타일이 다른 두 여야 총수가 최근 노 대통령의 측근 비리 의혹에 대한 특검법 재의(再議) 여부를 놓고 한판 대격돌을 준비하고 있다. 특검법 발의에 대한 국회통과나 이에 대한 청와대의 거부권행사 등은 탐색용 ‘잽 교환’에 불과하다.

11월26일부터 시작된 최 대표의 단식투쟁은 그 다툼에 대한 선제공격이다. 좀체 모험을 시도하지 않는 안전가 스타일이 이 정도의 승부수를 띄웠다면 거기에는 상응할 만한 이유가 엄존한다. 히든 카드를 내지 않으면 안될 절박한 상황이라든가, 아니면 전후사정을 분석해 본 결과 이젠 힘의 우위를 자신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운도 따라준 안전형의 고육책

최 대표가 노 대통령의 특검법 거부 철회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할 때 “노 대통령이 무엇을 잘못하는지 내 몸으로 호소하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표시했다. 최 대표에게서는 좀체 볼 수 없었던 강수(强手)다.

정치인과 단식의 상관관계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98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5ㆍ18 광주민주화 운동 3주년을 맞아 민주회복 정치복원 등 민주화를 위한 전제조건 5개항을 내걸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단식농성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탄생으로 이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78년 두번, 80년 한번 단식농성을 벌인데 이어 90년 10월에도 단식농성을 벌였고, 이기택씨도 직선제 개헌 쟁취와 4ㆍ13 호헌 조치 철회를 요구하면서 86년 17일간 단식농성을 한 기록이 있다.

이처럼 우리 정치사에서 정치인의 단식은 사방이 꽉 막혀 탈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택하는 최후의 투쟁방안으로 여겨져 왔다. 야당 웅로샬옜㈀퓻?밀려 더 이상의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경우 국민적 관심을 모으면서 여론의 물꼬를 틀어보자는 바람에서다.

최 대표의 단식 농성도 현 정국에 대한 위기 의식에서 출발한 점은 비슷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조금 성격이 다르다. 먼저 단식 시점은 특검에 대한 노 대통령의 거부권행사가 이뤄진 다음이다. 법적으로야 재의에 필요한 3분의 2의 국회의석만 확보하면 되지만 실제 의석 수 확보가 만만치 않다.

만약 부결될 경우 그때부터는 당연히 최 대표의 용퇴가 거론되는 일만 남게 된다. 따라서 거부권 철회를 위한 단식은 재의를 결정해야 하는 열쇠를 여론의 압박이 아닌, 최 대표와 한나라당쪽으로 가져올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한 셈이 됐다. 재의에 대한 분위기가 조성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벌어보고, 도저히 재의를 위한 의석확보가 안 된다고 판단될 경우 단식에 이은 대통령 탄핵에 가까운 정권 공격으로 방향을 잡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또 이번 단식카드는 내부 견제 효과가 가미됐다. 최 대표는 대표 선출이후 끊임없이 내부 견제에 시달려 왔다. 사실상 비주류를 선언한 서청원 전 대표의 후위 공격과 함께 소장파를 제외한 중진그룹의 비협조적인 태도, 여기에 홍사덕 원내총무의 등거리 관계까지 모두 최 대표의 입지를 좁혔다.

이런 상황에서 시도한 단식투쟁으로 정국의 관심은 일단 최 대표 쪽으로 모아졌다. 정치적 부담감이 큰 카드였지만 여론의 관심은 노 대통령과 최 대표의 양축으로 압축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즉 노 대통령에 대한 호적수라는 상대성 굳히기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평이다.

노 대통령과의 기세싸움에서 큰 변수로 작용될 민주당 대표선출 문제도 최 대표쪽에 유리한 구도로 끝났다. 만약 추미애 의원이 민주당 새 대표로 선출됐으면 최 대표는 더욱 어려운 승부의 길로 접어들었겠지만 조순형 대표 체제의 출범으로 야야(野野) 대화의 물꼬가 트일 전망이다.

민주당 내부도 특검 재의를 당론으로 정하자는 분위기가 조금 더 우세한 편이다. 결국 전당대회까지 시간을 벌면서 그때까지의 정국을 청와대 대 한나라, 노무현 대 최병렬 구도로 이끌어간 최 대표의 시도가 현재까지는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졌다.

최 대표로서는 단 한번의 단식투쟁을 통해 대외적으로는 재의 분위기를 잡는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고, 당 내부에서 잇따라 터져 나오는 대표 흔들기를 어느 정도 잠재우면서 재의 부결의 상황을 대비한 보험적 성격의 지지대도 마련한 셈이다. 안전가 스타일의 모험수라고 하기보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나온 고육책에 여러 변수를 고려한 승부라는 분석이 더 어울린다. 거기에다 민주당 조 대표 선출이란 운도 따라줬다.


정가보다는 관가와 가까운 리더십

최 대표의 경력을 보면 모험을 피하는 절대적인 안전가 노력형에 가깝다. 왜 이런 리더십이 창출됐을까.

경남 산청 태생으로 부산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온 최 대표는 한국일보를 거쳐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20여년을 ‘조선일보 맨’으로 지냈다. 5공이 출범된 80년부터 12대 총선 직전인 85년까지 편집국장을 지내며 정권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2대 총선에서 전국구로 첫 배지를 달고 민정당에 합류했다.

등원 이전부터 이미 ‘노태우 사람’으로 소문날 정도로 최 대표는 차기를 기약하며 정계에 진출했다. 13대 대선 때 민정당 인기가 시들한 점을 들어 당명 크기를 현수막에서 최소화시키고 이름과 기호만 크게 부각시킨 것도 최 대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노태우 정권에서는 당연히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청와대 정무수석 1년, 문공부장관 1년, 공보처장관 1년, 노동부장관 1년6개월에 이어 14대 총선에서 다시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재선에 오른다. 6공 5년동안 단 한차례의 쉼표 없이 장관급에 이름을 올리며 실세 지위를 유지했다. 이후에도 최 대표의 관운은 계속 이어진다.

같은 부산 출신의 YS가 정권을 잡게 돼 문민정부에서도 정권 인수위원으로 출발, 당내 요직을 맡다 94년 임명직 마지막 서울시장에 올랐다. 이듬해 민선인 조 순 시장에게 바통을 넘긴 뒤에는 배지가 떨어진 중진으로 첫 무관의 세월을 맞지만 96년 첫 지역구 의원이 됐다. 그것도 신한국당으로는 가장 철옹성 같은 서초 갑에서 금상을 땄다.

98년 최 대표로서는 사실상 첫 유권자 심판을 자청해 시험대에 오른다. 고 건 후보에 맞선 서울시장 선거. 물론 선전했지만 패퇴했고 두번째 노배지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그러나 불과 2년 후에 한나遮瑛?심장부 격인 서울 강남 갑 지역구를 받아 거뜬히 4선의원이 됐다.

최 대표의 행적을 살펴보면 4선의 경력중에 제대로 4년 임기를 채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초선 재선은 비례대표를 하다 장관직 임용으로 도중에 하차했고 3선 때는 서울시장 도전에 따라 지역을 내놓았다. 3선이었지만 불과 7년 반가량의 의정생활이였고 나머지는 관(官)에 머물렀던 시기다.

전형적인 여당 스타일인 최 대표의 성향에서 그의 리더십은 모험을 피해가는 안전가 노력형으로 더욱 굳게 자리잡게 됐다.


'최틀러'의 마지막 승부수는?

정가보다 관가에 가까웠다는 점에서 그의 리더십이 그간의 야당 지도자들과는 차별성을 띤다. 최 대표는 도제식 교육이 일반화된 언론인으로 출발해 독재적 리더십을 구가한 전두환 정권에서의 전국구의원, 이어 마지막 군사정권을 구가한 노태우 정권의 최고 핵심실세를 거치면서 1인지하 만인지상형 자세가 갖춰져 갔다.

다음 정권을 잡은 YS에게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위에는 복종하고 아래는 충성을 강요하는 전형적인 행정부 스타일에서 최 대표는 ‘최틀러’라는 별칭을 더욱 굳혔다.

하지만 피라미드식 상명하복에 젖어있는 곳이 행정부라면 입법부와 정당은 수평적 리더십 속에 대화와 타협으로 총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곳이다. 변형된 최틀러의 리더십이 필요한 곳이다. 그간에는 정당 경력이 많지 않은 탓에, 또는 사무총장 원내총무 대변인 등 성향이 직접 노출되는 요직은 피해갔었기에 별다른 충돌없이 무난히 여기까지 오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고 총수에 오른 점(이 점도 노 대통령과 흡사한 측면이다)에서 당 내부에서부터 ‘스파크’가 일고 있는 원인이 된다.

당의 중진들은 최 대표의 리더십에 상당한 의문을 갖고 있다. 대화와 타협이 아닌 대표 단독 결정 스타일에 대한 거부감에서다. 한 중진의원은 “계파를 이끌어본 적도 없고 한 그룹의 장(長)이 돼 험난한 역경을 이겨본 적도 없지 않느냐”며 “1인 독재 치하에서 강력한 카리스마가 뒤에 받쳐주는 배경을 업고 행세한 권력일 뿐”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최 대표는 기존 ‘최틀러’ 리더십을 벗어나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고 있다. 이를 위해 공천문제와 임명직 당 간부에는 자기 사람 심기에 주력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내년 총선까지 최병렬 호에 대한 강력한 드라이브를 거듭할 태세다.

특검법 재의에 대한 분위기가 잡혀질 경우 최-조 공조를 통해 이를 통과시킨 뒤 노 대통령에 대한 결정적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국민적 카타르시스를 성공시킨다면 그때의 최 대표 위상은 지금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높아진다. 이 대목에서 ‘최통(崔統)’을 위한 야망이라는 지적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기자가 서두에 운좋은 사람이라고 칭했던 점에서 잠시라도 기분이 편치 않았다면 혹시 이 대목에서는 다시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 2003-12-03 15:13


염영남 기자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