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승강장서 어린이 구하고 끝내 왼쪽다리 절단"다리가 마음에 들어요" 험난한 투병생활 불구 강한 재활의지

[2003 아름다운 사람들]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열차 승강장서 어린이 구하고 끝내 왼쪽다리 절단
"다리가 마음에 들어요" 험난한 투병생활 불구 강한 재활의지


“죽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는데 아저씨 사진을 보고 나니 마음이 달라지더군요. 미련한 생각 안 하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42)씨의 인터넷 까페(cafe.daum.net.beautifulrail.man)를 장식하고 있는 글이다. 그랬다. 한 아이의 생명을 구하고 대신 다리를 잃은 의로운 역무원의 희생 정신이 알려진 후 많은 사람들은 새삼 세상의 온기를 느꼈다. 처절한 생존경쟁으로 얼룩진 진창의 삶에서도 진정 희망이 되는 것은 그처럼 살신성인의 정신을 간직한 아름다운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여섯번의 수술로 피폐해진 몸

12월 3일 오후 부천 순천향대학병원. 지난 7월 서울 영등포역에서 열차에 치일 위험에 놓인 아이를 구하고 대신 발목이 잘리는 사고를 당한 김씨는 “그 동안 정신없이 지나온 자신의 삶을 차분히 정리하는 시간이었다”고 평온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성한’ 정신과 달리 몸은 피폐했다. 무릎 아래로 휑하니 잘려 나간 한쪽 다리에다, 보통 어른의 세 배는 족히 넘어보일 정도로 퉁퉁 부은 채 붕대에 남겨 있는 다른 쪽 다리, 뱀이 허물을 벗듯 피부가 허옇게 일어나 꺼칠해진 손등…. 험난한 투병 생활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간 수술만 여섯 번을 거듭했다. 지난 7월 기관차에 치였을 때 그 자리에서 왼쪽 발목이 절단됐다. 다행히 접합 수술이 성공해 모든 것이 잘 될 듯했지만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10cm나 짧아 무용지물이 됐다. 연장 수술도 고려해봤으나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데다 최소 2~3년은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의족을 착용할 수 있도록 다리를 절단했다. 현재 이 왼쪽 다리는 무릎 아래 10cm까지만 남아 있는 상태.

하지만 이게 시련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사실 잘려나간 왼쪽 다리보다 오른쪽 다리가 더 심각한 고통이다. 당시 다섯 발가락이 모두 잘려나가고 발등이 뭉개졌는데 11월 24일 이 발등에 조직을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다. 처음에는 그리 대수로이 여기지 않았다. 병원에서 5시간이면 조직 이식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3시간의 대수술 끝에 회복실을 거쳐 사흘 뒤인 26일에야 원래의 병실로 돌아왔다. 이때가 그에게는 사고 이후 가장 혹독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중환자실에 누워 수도 없이 벽시계만 쳐다봤지요.”

진통제도 2시간 이상 효과가 지속되지 않는다. 발등에 이식할 피부를 종아리에서 어른 손바닥 크기로 네댓 장을 뜯어냈다고 하니 그 고통이야 말해 무엇하랴. 수술 후 일주일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날이 갈수록 투병 생활의 힘겨움은 무게를 더해간다. 사고 직후 몇 개월만 고생하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되리라 기대했던 바람은 자꾸 어긋났다. ‘산 넘어 산’이라고 고비가 계속되면서 체력도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아내 배해순(40)씨는 “왼쪽 다리를 절단할 때도 담담하던 남편이 지난 24일 수술 후에 처음으로 남편이 낙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그러나 김씨의 인품은 과연 범인(凡人)과는 확실히 달랐다. 불행 속에서도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자못 의연했다. 아내가 남편의 몸 상태를 설명하며 “오른쪽 발가락이 왕창 잘려져 나갔다”고 하자 “왕창은 무슨. 5개뿐 인걸”하며 태연하게 받아들이는가 하면, 왼쪽 다리 절단 수술을 받은 뒤 많은 사람들이 “평생 잘린 다리를 보고 얼마나 고통스럽겠냐”고 걱정하는데 반해 김씨는 정작 이 다리가 아주 마음에 든다고 했다.

“(절단된) 왼쪽 다리는 참 마음에 들어요. 수술이 잘 돼 큰 고통이 없으니 행복하죠. 오른쪽 다리만 빨리 나으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오직 병상에서 하루빨리 일어나 가정과 사회에 복귀하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평탄한 삶을 뒤바꾼 불의의 怜恣?난 것은 7월 25일 오전 9시경. 김씨는 지금도 사고 당시를 생생하게 떠올린다. 서울 영등포역 승강장에 부산행 새마을호 열차가 진입하려는 순간 어린 아이 한 명이 안전선 밖으로 나왔다. 김씨는 그 아이를 재빨리 안전선 안쪽으로 밀어내고, 자신도 뒤따라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만 중심을 잃고 선로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어 끔찍하게도 수백 톤짜리 열차가 몸을 짓이기며 지나갔다. 그는 의식을 잃었다 찾았다 하면서도 사고 현장을 두루 둘러봤다. 그의 입에서는 자신과 모르게 “아이는?”하는 물음이 신음 소리와 함께 배어 나왔다. “그때 저의 잘려나간 발목과 뭉개진 발등이 보였어요. 그리고 웅성거리던 사람들로부터 ‘아이는 무사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얼마나 안도감이 들던지….”

그의 숭고한 희생이 알려지고 사회각계 인사들이 끊임없이 그를 찾아왔다. 인터넷에도 김씨의 희생 정신을 기리고 쾌유를 기원하는 시민들의 글이 잇따랐다. 얼마 전엔 전남 나주 금천초등학교 학생들이 삐뚤삐뚤 적은 편지와 저금통을 함께 보내왔다. 아내 배씨는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도 아닌데 이렇게 도움을 받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며 송구스러워 했다.

일부에서는 사고 이후 한번도 찾아오지 않은 그 아이와 부모에 대한 비난도 거세다. 철도청은 사고 직후 새마을호 승객으로 보이는 어린이를 찾기 위해 사고 열차와 역 구내에서 안내방송을 했지만 끝내 이 어린이를 찾지 못했다. 이 어린이와 부모에 대해 분노한 시민들 사이에서는 ‘생명의 은인에 대한 배신’이라는 말까지 들려온다.

그러나 김씨는 서운해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와 그 부모를 걱정한다. “사고 당시에 주변에 아이가 여러 명 있어서 자기의 아이 때문인지 잘 모를 수 있어요. 설사 알았더라도 그때 못 나타났다는 미안함에 나중에 오기가 더 힘들었을 거예요. 아무쪼록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김행균씨는 이렇게 자신에게 시련을 안겨준 대상을 원망하거나 힘든 상황을 피해가지 않는 사람이다.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고 거기에 맞춰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게 그의 삶의 방식이다.


'살아있는 교과서' 건실한 삶

학창 시절부터 그랬다. 한국 전쟁 때 평안남도 순천에서 월남한 부모의 3형제중 막내로 자란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이 가로막히자 망설임 없이 국립 철도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학비가 없어서’ 선택한 길이지만 워낙 성실하게 공부한 덕에 졸업(1979년)도 하기 전인 1978년 12월 철도 공무원으로 발령이 났다.

부산진역 수송원에서 첫 근무를 시작해, 정확히 25년째인 올 4월부터 영등포역에서 열차운용팀장으로 일해왔다. 2~3년마다 근무지가 바뀌어 결혼생활 15년 동안 이사만 6번을 다녔다. 출퇴근 시간은 오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24시간 근무 규정이지만, 이튿날 오후 3~4시 이전에 퇴근한 적이 없을 정도로 투철한 직업의식과 사명감을 갖고 일했다.

열차 운용팀장의 임무는 열차가 역에 들어오기 전에 선로상태와 신호상태를 점검하고, 승강장으로 열차가 들어올 때 승객이 안전선 밖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위급한 상황에서는 열차를 정차시켜 승객을 대피시키는 일도 맡는다.

“영등포역의 경우 하루 1,400회의 열차가 지나다닙니다. 그 많은 열차와 사람들이 안전하게 운행되기 위해선 역무원들이 발에 땀이 나게 뛰어다니는 게 당연하지요.” 전국에서 보통 하루에도 한 두 건씩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정도라 하니 선로에 뛰어든 때도 부지기수이다.

열차와 인연을 맺고 선행은 베푼 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수원의 큰 형님 집에 얹혀 살던 총각시절에는 인천역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초등학생 여자아이를 집에 데려와 3개월 동안 조카처럼 돌보다, 백방의 수소문 끝에 부모의 품에 돌려보냈다.

‘살아 있는 교과서’ 인 김행균 씨의 이러한 인자함은 근무지는 물론 온 동네에 널린 알려진 일. 배씨는 “저런 남편이랑 사는 부인은 얼마나 좋을까”하는 주변의 얘기를 귀가 따갑게 들어왔다.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야 억장이 무너졌지만, 남편의 반듯한 성품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원래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어요. 훌륭한 남편을 둔 업이라 생각해야죠.”

아내는 김씨와 가족을 돌보느라 병원과 집을 발이 닳도록 오가고 있다. 김씨의 오랜 병원 생활로 인해 이들의 가정에서 무엇보다도 염려되는 부분은 중학교(1년)와 초등학교(2년)에 다니고 있는 두 아들이다. 현재 칠순의 할머니가 돌봐주는데 평소 아이들의 과제 하나하나 꼼꼼히 점검하던 배씨였기에 더 마음에 걸린다고 한다. “아이들 성적이 많이 떨어졌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일단은 남편의 치료가 우선이죠.”


의연한 가족들, 직장복귀에 강한 의지

아이들에게도 김씨의 사고는 적잖은 충격일터. 특히 사춘기를 맞은 큰 아이가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부부는 상당히 고민했다. 김씨의 다리를 끝내 절단하던 날에 배씨는 슬픔을 억누르고 아이들에게 “아버지, (절단 수술) 했다”고 나직하게 일러줬다. 그런데 이 충격을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들은 어머니를 애써 위로했다. “괜찮아요. 의족이 있으니 아버지 다시 걸을 수 있잖아요.”

치료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공무원연금관리공단으로부터 전액 보상(대략 8,000만원 추산)을 받고, 철도청이 가입한 상해보험금(3,000만원)도 타게 돼 별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남은 문제는 온전한 재활과 복직이다. 김씨는 최근 서해교전 당시 부상으로 오른쪽 다리를 잃고도 의족에 의지한 채 5km 달리기를 성공한 해군 이희완 대위(27)와 연락을 주고 받은 뒤 재활에 성공한 그의 강인한 의지를 높이 사며 그에게 거듭 찬사를 보냈다. 이때 마침 병원을 방문한 (교통사고로 인한) 절단 장애인 김진희(33)에게 의족에 대한 설명을 듣고 “퇴원하면 자전거 일주에 도전해보고 싶다”며 강한 재활 의지를 비치기도 했다.

“예전처럼 일할 수는 없겠지만 역을 떠난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내근직이라도 직장에 복귀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사회에 진 빚이 너무 많아 마음이 무겁다고. “사회에 나가서 사랑과 격려를 보내준 수많은 고마운 이들의 은혜를 갚고 싶다”는 김씨는 내년 봄 다시 철도에서 의족으로나마 ‘시민들의 발’이 될 것을 약속했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 2003-12-10 15:42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