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 만들어 놓고 방치한 게 원인"

[실미도의 진실] 생존자 김방일 당시 소대장 인터뷰
"부대 만들어 놓고 방치한 게 원인"

1971년 8월 23일 새벽 6시부터 시작된 ‘실미도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경비병 5명과 소대장 김방일씨 등 모두 6명뿐이었다. 3명의 부사관 소대장 가운데 한사람인 김씨는 ‘실미도 사건 발생 하루 전날 교육대장과 함께 업무차 인천에 나왔다가 부대 복귀 도중 약혼녀로부터 전화를 받은 게 생사의 갈림길이 됐다. 약혼녀의 친척이 만나고 싶다는 것을 다음으로 미루고 배에 올라 탔는데, 그 소식을 들은 교육대장이 하루 외박을 허용한 게 죽음의 문턱을 넘게 했던 것이다.

김씨는 두 번 영화를 봤다고 한다. 훈련병들이 사형수나 무기수로 그려진 것이나 실제 훈련 과정이 훨씬 가혹했음에도 간단히(?) 소개한 것을 빼고는 사실에 아주 가깝다며 만족해 했다. 김씨는 그동안 실미도 사건으로 가슴에 응어리 진 게 있었는데 영화를 통해 실미도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알려져 많이 풀렸다고 했다.

김씨는 훈련병들이 탈출을 감행한 배경에 대해 영화에서처럼 상부의 지시(전원 사살) 때문이 아니라(상부 지시는 김씨도 몰랐다고 함) 비인간적인 대우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 ??문이었다고 진단했다. 사회에서 소외됐던 훈련병들은 북파를 통해 전과, 연좌제 등에 대한 면죄부를 얻을 수 있고, 또 북파공작을 마치면 상당한 보상이 주어질 것으로 기대했는데 이것이 좌절됐고 69년말부터 대우가 형편없이 나빠지면서 훈련병들이 버림받고 있다는 것을 직감해 들고 일어났다는 것이다. 김씨는 3년 동안 복무하면서 격오지 수당, 휴가비 등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며 ‘착복’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김씨는 실미도 사건 후 정부가 기간병과 훈련병에 대해 너무 무책임했다고 말했다. 당시 사건으로 사망한 장교 및 기간병들(총 18명)은 모두 적정한 보상을 받고 국립묘지에 안장이 됐지만 살아남은 6명과 숨진 훈련병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어떤 배려도 없었다는 것.

현재 생존자 6명과 함께 ‘실미전우회’를 만들어 회장을 맡고 있는 김씨는 실미도 사건을 제대로 알리고 당시 관계자들의 명예회복과 정당한 보상을 받도록 하는데 힘쓰겠다고 밝혔다. 90년 10월, 19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준위로 예편한 김씨는 93년 고향 청주에 냉난방설비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입력시간 : 2004-01-08 15:46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