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총구를 南으로 돌렸나? 1·21사태 이후 대북 응징 위해 창설한 '김일성 주석궁 폭파부대' 혹독한 훈련·비인간적 대우·암울한 미래등이 원인으로

[실미도의 진실] 실미도 31人의 인간병기들
그들은 왜 총구를 南으로 돌렸나? 1·21사태 이후 대북 응징 위해 창설한 '김일성 주석궁 폭파부대' 혹독한 훈련·비인간적 대우·암울한 미래등이 원인으로

영화 ‘실미도’가 한국 영화사의 기록을 새로 쓰면서 실미도 현지에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 속 실미도는 30여년 가까이 ‘익명의 섬’으로 머물러야 했다. 침묵을 강요한 권력과 진실에 대한 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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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속 실미도는 현실에선 아주 가까이 있었다. 서울에서 인천 신공항 고속도로를 타고 한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다. 실미도를 찾은 2일은 평일인데도 관광객이 제법 많았다. 점진포 선착장의 매표소 입구에는 ‘실미도’ 포스터가 붙어 있고 매표소 직원은 새해 첫날엔 1,000여명 이상이 다녀 갔다고 한다.

    흔적 지워진 비극의 섬

    선착장에서 실미도가 있는 무의도(큰무리 선착장)까지는 배로 약 5분 거리. 여기서 실미도를 마주 하고 있는 실미해수욕장까지는 도보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하루에 두 차례 바닷물이 조수로 빠져 나가면 실미해수욕장에서 실미도까지 걸어서 들어간다. 오후 늦게 발을 내디딘 실미도는 총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라고 상상하기에는 풍광이 아름다웠다. 한겨울 매서운 바닷바람만이 역사의 상처를 반추시키는 듯했다.

    실미도에 부대가 주둔한 것은 1968년 4월이다. 그해 1월, 북한특수부대(124군 부대)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충성 차원에서 북한에 보복 대응키 위해 실미도부대를 급조하고 훈련병도 김신조 일당과 같은 31명으로 했다.

    영화에서는 실미도 부대원 31명이 강인찬(설경구 분)이나 상필(정재영 분) 등과 같이 사형수나 무기수 같은 강력 범죄자들로 구성된 것처럼 돼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당시 조사 자료와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부대원의 직업은 암표장사, 소매치기, 뺑소니차 기사, 포장마차 주인, 권투선수, 돌팔이 점쟁이, 미군부대 담치기 등 각종 전과자가 절반 가량됐지만 대부분 ‘잡범’ 수준이고, 기혼자 2명을 포함해 일반인도 있었다.

    평양 인근 산악지대 조형물 그대로

    부대 명칭은 창설 연월을 따 ‘684부대’ 또는 ‘김일성 주석궁 폭파부대’로 불렸다. 부대원 31명에 대한 훈련은 공군 2325전대 209 파견대가 맡았다. 영화에서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31명의 훈련병들에게 교육대장 김재현 준위(안성기 분)는 “주석궁에 침투해 김일성 목을 따 오는 것이 너희들의 임무다”고 외친다. 이때부터 냉철한 조중사(허준호 분)의 인솔하에 31명 훈련병에 대한 혹독한 지옥 훈련이 시작되고 실미도엔 인간은 없고 ‘김일성 모가지 따기’라는 분명한 목적만이 존재해간다.

    생존자인 김방일 당시 소대장(영화의 조중사, 허준호 분)은 당시 훈련에 대해 “4월에 창설된 우리 부대는 9월까지 김일성을 사살하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훈련을 했다”고 말했다. 장애물 돌파장 같은 곳에서는 훈련생이 출발하면 기관총 사격수가 자동으로 방아쇠를 당겨 조금만 늦으면 관통상을 입게 돼 초인간적으로 빨리 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 또한 담력을 키우기 위해 연고가 없는 묘지의 관에서 해골과 뼈를 추리고 입을 대기도 했다고 한다.

    김씨는 영화에서 외줄다리 건너기 훈련과정서 훈련병이 떨어져 사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두명의 훈련생이 떨어져 중상을 입었지만 응급 치료를 하고 인천에 대기중인 배를 불러 후송했다고 한다. 그러나 훈련병 31명 중 사고, 강간 사? 탈출 미수 등으로 7명이 사망했다.

    실미도 부대원들의 최후. 상황이 종료된 뒤 주민들이 버스를 구경 하고있다.

    30여년 세월의 두께 때문인지 부대의 자취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실미도의 중간쯤에 이르러 숲속 샛길을 따라 가니 언덕 너머 숲과 풀에 가려진 넓은 지대 나왔다. 방의 주춧돌로 보이는 형체가 일부 남아 있고, 근처에 당시 훈련병들이 평양 시내로 진격해 들어갈 것에 대비해 평양 근처 산악 지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시멘트 조형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대 막사가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그 곳에서 밑으로 조금 내려가자 당시에 사용했던 우물이 있었다. 70여명에 가까운 인원이 매일 먹고 빨래하고 목욕도 하던 우물이다. 김방일씨에 따르면 당시 시찰을 나온 한 장군이 우물물을 마셔 보더니, “물맛이 좋으니 작전이 꼭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했는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난 셈이다.

    1971년 8월23일 새벽, 실미도부대 훈련병 24명은 기간병 12명을 사살하고(6명은 바다로 피하다 익사) 실미도를 탈출, 서울까지 진입해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다 끝내 자폭하고 만다. 영화에서는 중앙정보부의 부대 해체지시에 위기감을 느낀 훈련병들이 실미도 탈출을 감행한 것으로 그려졌지만 실제 훈련병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 사실은 비인간적인 대우와 미래가 없이 버려졌다는 데 대한 분노 때문에 총을 들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영화에서 훈련병이 자폭하기 직전 조중사는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실제 김방일씨는 사건을 접하고 곧 바로 실미도로 달려갔다.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들어간 막사 현장은 처참하게 변해 있었고 훈련병들이 “소대장님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는 쪽지를 발견하기도 했다. 또 영화와 달리 탈출한 훈련병 중 3명은 탈취한 버스에서 이탈해 잠적하지만 결국 체포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불행한 역사의 피해자들

    실미도 사건이 일어난 지 30여년이 지난 요즘, 무의도 주민들의 기억에서 그 사건은 어떤 형상을 하고 있을까. 마을 어귀에 살고 있는 김주승(72)씨는 “영화가 개봉된 지 사흘째 되는 날 주민 50여명이 단체 관람을 했다”며 “재미 있긴 한데 마음이 찡하다”고 말했다.

    그는 실미도 사건이 일어난 71년 8월23일 오전, 탈주 훈련병의 선임이 “교육 대장이 맹장염에 걸려 인천에서 수술을 해야 한다”며 이장(최인근ㆍ작고)을 통해 처남의 배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 처남 배의 기관이 고장나 대신 동네 서영상씨(작고) 배가 차출됐다고 한다. 김씨는 사건이 터진 다음에야 실미도 군인들 소행인줄 알았다며 자주 마주쳤던 기간병들과 영화속 훈련병들의 젊은 죽음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식료품 가게를 하고 있는 박창례(71. 여)씨는 지난해 원소위(김방일 소대장)가 생존한 다른 기간병과 함께 실미도를 찾은 적이 있다며 “그 사람은 양반이었는데 그 덕분에 살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 실미도 부대원들이 훈련받던 해변. 영화 상영 이후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최규성 기자
    △ 실미도 부대원들이 훈련받던 해변.
    영화 상영 이후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최규성 기자

    큰무리 선착장에서 음식점을 하는 김선만(50)씨는 본래 실미도에는 외지에서 온 한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실미도 부대원의 유탄에 12살 아이가 죽은 뒤 마을을 떠났다고 했다. 그는 김재현 교육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모습이 비슷했고 영화에서처럼 항상 선글래스를 끼고 다녔다고 전했다. 일부 기간병 중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문제를 일으켜 주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는데 영화에서 훈련병들의 여교사 강간 사건 외에 기간병이 마을 처녀를 강간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김씨는 생존한 김방일 소대장에 대해 특히 좋은 기억을 갖고 있었는데 교육대장을 대신해 실미도 부대와 마을 간에 발생하는 일을 잘 처리했다고 한다. 한번은 주민이 쳐놓은 어망이 실미도 부대의 배로 망가졌을 때 소금 30포대로 변제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씨는 “영화를 보면서 기간병과 훈련병들의 얼굴이 떠올랐다”면서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 불행한 역사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무의도 사람들에게 실미도 사건은 현실이고 역사였다. 선착장에서 마지막 배를 기다리는 동안 20여명의 관광객들은 ‘실미도 경험’을 만끽했다. 그러나 ‘역사’는 없고 ‘영화’뿐이었다. 실미도는 여전히 ‘익명의 섬’으로 남아 있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4-01-08 16:04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