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뀐 정치환경, 여론 지지도가 공천의 잣대로경제·사회분야에서도 막강 영향력 발휘

[여론조사] 정치생명 쥔 현대판 살생부
뒤바뀐 정치환경, 여론 지지도가 공천의 잣대로
경제·사회분야에서도 막강 영향력 발휘


여론조사 기관인 H, J, P사 관계자들은 요즘 ‘괴전화’에 시달리고 있다. 민주당에 공천을 신청한 일부 출마자와 지지자들이 직ㆍ간접으로 청탁 혹은 협박성 전화를 걸어오기 때문이다. 아직 공천이 확정되지 않은 지역은 이들 세 여론조사 기관의 여론조사 결과를 기초로 공천자를 결정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게 화근이었다.

H사의 한 수석연구원은 “선거 시즌마다 여론조사가 빈발하지만 요즘처럼 긴장하기는 처음”이라며 “조사 결과에 따라 경쟁 후보자들의 명운이 갈린다고 생각하니 두렵기까지 하다”고 귀띔했다.

여론조사에 대한 공포는 출마를 선언한 당사자들에게 더욱 크게 다가온다. 경기 지역에 공천을 신청한 하위 당직자 출신 한 후보자는 “15년 가까이 당료 생활을 하면서 숱하게 선거를 치렀지만 이렇게 불안해한 적은 없다”며 “요즘 같아선 옛날처럼 누군가 ‘낙점’해주는 게 속 편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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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선출마자 생사여탈권을 쥐다

한국정치를 지배해온 ‘3김’식 보스정치가 막을 내리고 정치환경이 바뀌면서 여론조사가 총선 출마자의 생사 여탈권을 쥔 ‘살생부’로 떠올랐다. 일단 여론조사에서 지지도(혹은 인지도)가 높아야 억지라도 쓸 수 있을 판이다. ‘예전에 정치 보스에게 바치던 공천 헌금을 여론조사기관에 바쳐야 할 판’이라는 농담마저 정치권에 나돌고 있다.

한나라 민주 열린우리당 등 3당 가운데 여론조사를 가장 앞서 활용한 곳은 한나라당이다. 한나라당은 1월10일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실시, 출마자를 △공천유력 △교체대상 △정밀검증 등 3단계로 분류했다. 교체 대상은 사실상 공천탈락, 정밀검증은 실사를 벌일 대상이다. 부산 연제 지역구의 권태망 의원이 당 사무처 출신의 33세 여성 부대변인인 김희정씨에게 밀리는 파란도 그래서 가능했고, 대구 수성에서는 신예 주호영 변호사가 여론조사와 공개 면접 및 토론 과정을 거쳐 전국구인 박세환 의원을 제쳤다. 박 의원은 지역구를 강원 철원ㆍ화천ㆍ양구로 옮겨야 했다. 최근에는 민봉기(인천 남갑)ㆍ박승국(대구 북갑) 의원과 이세기(서울 성동)ㆍ김중위(서울 강동을) 전 의원이 사실상 공천에서 탈락했다.

민주당은 △전 당원 경선 △당원과 일반 국민참여 경선 △여론조사를 통한 결정 등 세 가지 방식 가운데 지역구 사정에 따라 한 방식을 택해 후보를 결정하고 있다. 여론떻潁?통한 공천이 대세지만 반론도 만만찮아 지역에 따라 변형 여론조사나 청문회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특히 민주당의 텃밭이라 할 수 있는 호남에서는 물갈이 바람에 부담을 느낀 현역 의원들이 여론조사를 수용한 당초 약속을 깨고 당원과 일반시민이 50%씩 참여하는 절충형 여론조사나 전 당원 경선 방식을 주장해 반발을 사고 있다. 광주 광산(전갑길 의원) 출마를 준비중인 고재유 전 광주시장은 “당원과 유권자가 50대 50이라면 100m 경주에서 한 사람이 50m 앞에서 출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반발했다. 김경재 의원이 떠난 전남 순천에서도 조순용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호남 대부분 지역이 여론조사 경선을 실시하는데, 전당원 경선을 하도록 한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흥분했다.

열린우리당은 후보 간 여론조사 격차가 큰 지역은 단수 공천을, 우열을 가리기 힘든 지역은 여론조사로 후보를 2~3명으로 압축한 뒤 경선을 치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최근 전북 군산과 대전 대덕에서는 현역 강봉균 의원과 김원웅 의원이 운동권 출신인 함운경씨와 전 조선일보 노조위원장 출신의 김창수씨를 따돌렸지만, 경기 고양ㆍ덕양을에서는 영입 인사인 권오갑 전 과기부 차관이 정치 신인 최 성 전 청와대 행정관에게 고배를 마셨다. 인천 부평갑에서도 현 정부에서 청와대 인사비서관을 지낸 김용석씨가 지역에서 착실히 기반을 닦아온 문병호 변호사에게 패했다. 서울 마포갑에서는 MBC 기자 출신의 노웅래씨가 정치평론가인 김광식씨를 제치고 총선 후보로 선출됐다.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 빈발하자 단수후보로 결정된 지역구에도 공천 후보들이 경선을 주장하고 나서 최종 중앙위원 인준과정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박양수 사무처장은 “복수로 공천을 신청한 지역구의 경우 전화여론조사를 통해 결정했다”고 주장했지만 반발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경기 성남 분당갑에 공천을 신청한 개혁당 출신 김용준씨는 “정치 신인들에게 불리한 전화여론조사를 통해 후보자를 결정한 것?명백히 잘못됐다”며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겠다”고 말했다.

- 총선전략의 중요 지표로 활용

여론조사는 개인의 공천을 넘어 당의 존망과 총선 전략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당 전당대회 직후인 1월12일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TNS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우리당이 25.8%로 한나라당(19.6%)과 민주당(9.3%)을 크게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그 여론 흐름이 바뀌지 않자 위기를 느낀 민주당의 조순형 대표는 설 연휴를 앞두고 전격적으로 ‘대구 출마’라는 카드를 던졌다. 민주당이 우리당이나 한나라당보다 10% 이상 지지율이 뒤지는 상황에서는 4ㆍ15 총선이 ‘2강 구도’로 치러질 가능성이 높아 선거전략을 바꾼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민주당 김홍일 의원의 복당과 한화갑 전 대표의 지역구 복귀 등도 호남표를 의식한 것으로 여론조사에 따라 총선 전략을 수정한 것이다.

한나라당도 여론조사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분란의 근저에는 ‘차떼기당’에 대한 민심 이반과 우리당에 못 미치는 낮은 지지율이 크게 작용했다. 최 대표측이 억울해 하면서도 명분에서 자꾸 밀리는 것도 낮은 지지율 때문이다. 새 지도부는 한나라당의 총선 전략을 다시 짤 게 뻔하다.

미디어리서치 김지연 본부장은 50여일 앞둔 총선 변수 중의 하나로 한나라당 변화를 꼽았다. 김 본부장은 “노무현 대통령과 우리당쪽에 파괴력 있는 악재가 나올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한나라당 문제가 어떻게 수습되느냐가 총선의 큰 변수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 본부장은 “민주당의 역부족으로 한나라당과 우리당의 ‘2강 구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며 “한나라당 대표에 새 얼굴이 등장할 경우 ‘차떼기당’ ‘매수당’이라는 오명을 일부 상쇄하는 효과(underdog)가 있을 것으로 나타나 앞으로 여론조사 추이가 주목된다”고 말했다.

- 신제품 성패 좌우하는 시장조사

여론조사는 정치 분야 못지않게 경제분야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기업이 새로운 상품을 내놓는데 시장조사는 생명 줄이나 마찬가지다. 소비자 반응조사에 따라 기획 상품의 컨셉이나 상품 출시가 바뀌는 경우도 다반사다.

농심의 스넥 제품인 ‘졸병 스넥’은 초등학생부터 중ㆍ고등 학생들에게 인기 높은 간식 중 하나다. 70년대 중반 인기를 끌었던 ‘라면 땅’의 컨셉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생라면에 스프를 쳐 부셔먹는 아이디어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 원래 농심은 생라면 조각과 스프를 나눠 내놓기로 했다. 문제는 라면을 부셔먹다 보니 손에 스프가 묻고, 땅바닥에 조각이 떨어져 부모님에게 야단을 맞을 수 있다는 것. 농심 측은 여론조사에서 지적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마라톤 회의를 열었고, 제품 컨셉을 다시 잡았다. 바로 ‘뭉쳐 먹는’ 스넥 형식의 ‘졸병 스넥’이었다. 라면조각이 부셔지지 않게, 장기 알 ‘졸’ 모양으로 과자처럼 찍어내 만들었다. 소비자들도 건빵 먹듯이 부담 없이 한 알씩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도록 고안했다. 스프 역시 신라면 맛과 짜장 맛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졸병 스넥’은 결국 시장조사에서 지적된 문제점에서부터 다시 거슬러 올라가,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새로운 제품으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현재 연 매출 200억원을 올릴 정도로 인기 상품이다.

신 상품에 대한 컨셉과 아이디어가 뛰어난 것으로 자체 판단했다가 시장조사 결과, 기대 이하의 반응으로 상품 출시를 전면 중단하는 사례도 많다. 회사측으로서도 기회 비용을 줄이기 위한 생존전략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소비자의 반응에 맞춰 상품 컨셉을 보완해 재출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조사결과의 정도에 따라 ‘처음부터 없던 일’로 돌리는 경우가 10건 중 8건을 차지한다. 또 시장조사가 특정지역에만 그쳤다가 상품 출시 후 전국적으로 판매가 되지 않아 상품판매를 접는 경우도 있다.

언론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한 출판기획사가 새로운 여성잡지 M의 창간을 앞두고 여대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섹스 스캔들과 연예 기사에 대한 반응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는데, 대부분의 여대생들이 연예 스캔들보다는 교양에 더 관심이 높다는 답변을 얻었다. 이 출판사는 교양중심의 잡지를 출간했으나 결과는 최악이었다. 창간 17호 만에 이 잡지사는 문을 닫고 말았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울고 웃는 일은 우리 주변에 아주 많다. 총선이 가까워지면서 그 같은 일은 더욱 빈번히 벌어질 것이다. 여론조사가 앞으로 정치와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거의 ‘신’으로 불리는 사태가 조만간 올지도 모른다.

박종진 기자

장학만 기자


입력시간 : 2004-02-24 17:02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