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과 깡의 해병대 정신으로 무장한전투병과·정보 등 분야에서 성차별(?)없이 실력으로 경쟁하는 지휘관

[한국의 여전사들] 수륙양용 전천후 여전사
악과 깡의 해병대 정신으로 무장한
전투병과·정보 등 분야에서 성차별(?)없이 실력으로 경쟁하는 지휘관


꽃피는 춘삼월에 때 아닌 폭설이다. 경기 김포 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대 청룡부대 2605부대에 쌓인 눈발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그 때문만이 아니다.

한국전 당시에는 서울 탈환의 감격 속에서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해병대 중앙청 소대’로, 월남전에서는 명성이 드높던 ‘귀신 잡는(신화를 남긴) 해병대’로, 그리고 1981년엔 사단으로 창설된 해병대의 전설이 살아 숨쉬는 곳. 바로 청룡부대다. 부대 정문 오른편 야산 허리에는 붉은 색 바탕에 노란색 글씨가 한 눈에 들어 온다.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다.’ 짧지만 굵은 톤의 이 한 마디가 ‘죽어서도 해병’이라는 영원한 해병대 정신을 대신하는 듯, 쌓인 눈에 반사돼 동공을 찌른다.

- 체력적 한계 정신력으로 극복

중대 전술 훈련으로 국지도발 대비작전이 한창인 부대 훈련장에는 새벽부터 해병 대원들의 뜨거운 열기로 추위를 느껴 볼 새도 없다. 낮에도 체감 온도가 영하 10도를 밑도는 이곳의 혹한기는 3월에도 그 끝을 모른다. 전날 내린 눈으로 20cm 정도 쌓인 눈밭에 발을 내딛으면 영락없이 발목까지 빠져든다. 하지만 설상 위장복으로 완전 무장한 해병 대원들은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산 언덕을 단숨에 타고 넘으며 전장을 방불케 하는 실전 훈련에 온몸을 내던진다. 북한과 맞닿은 전방까지의 거리가 80여km.

“돌격, 앞으로!” 야무지고 우렁찬 외침이 산속을 메아리 친다. 소대장의 K-5 권총의 지시에 한조 5명으로 이뤄진 소대원들은 혼연일체가 돼 민첩하게 움직인다. 해병대 여군 소대장 백옥란(25) 소위의 눈에는 불꽃이 튄다. 백 소위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원들의 잽싼 몸 동작이 눈 덮인 산 아래로 한 편의 영화처럼 전장 상황을 연출한다. 적군들이 도발 작전을 감행할 경우 산악 지역에서 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분쇄할 것인가에 역점을 둔 훈련이다.

대원들의 날카로운 소총 부리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살기가 서려 있다. 순간 순간 ‘워 게임(war game)’ 전술을 펼쳐야 하는 긴박한 위기 상황에서 백 소위의 판단력과 손동작 하나 하나에 소대원들의 목숨이 달려있다. 서로 간의 믿음이 없이는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전술 장면들이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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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번 훈련은 중ㆍ소대장 위주로 편성, 소부대 전투 기술 숙달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어 지휘관의 전술력과 지휘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 방어 전투와 역습 준비, 초월 공격, 돌파구 내 전투 등의 훈련이 반복되면서 온몸은 땀으로 뒤범벅된다. 야전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완전 무장한 채 부대까지 전방 전술 및 야지를 따라 시간당 5km 이상의 속도인 급속행군이 이어진다. 웬만큼 신체 건강한 장정도 녹아 떨어질 만한 초강도 훈련이다.

하지만 백 소위와 소대원들은 아침해가 산 중턱을 넘어설 때까지 산을 넘고 또 넘지만 결코 지쳐 보이는 기색을 한 치도 엿볼 수 없다. 평소 다져진 강인한 체력과 극기력과의 싸움이 이번 훈련의 승부처다. 적을 이기려면 결국 먼저 자신을 꽉 다잡아 하는 인내력과 정신력이 요체다.

해병대 전투병과 보병장교로 20여명의 소대원들을 이끌고 있는 백 소위. 겨울 햇살에 검게 그을린 얼굴, 다부진 표정에 독기어린 눈동자만 봐도 문자 그대로의 여전사다. 바로 저 이미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가 떠오를 만큼, 예사로운 구석이란 없다.

- “그냥 해병대가 좋아서”

학사장교 출신으로 조경학을 전공한 백 소위는 해병대 전투병과 보병을 자원했다. 백 소위는 ‘왜 하필 해병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가장 곤혹스럽다고 말한다. “그냥 해병대가 좋기 때문”이란, ‘짧지만 솔직 담백한’ 해병대식 답변말고는 더 이상 적절하게 설명할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좋다”는 말이 해병대를 선택한 모든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만, 해병대 경험이 없는 이들에겐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1남 1녀의 장녀로 집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해병대를 자원한 그는 학창 시절부터 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것도 해병대를. 그만큼 괴짜가 아닌 사람이 아니고는 해병의 길을 택하는 법은 없나 보다. 하지만 해병대에 처음부터 절반이 모난 괴짜로 채워졌다면, 그 나머지 절반은 둥근 조약돌이라는 것이 내부의 일반적 평가다. 최근에는 해병대 입대지원 경쟁률이 치열해 ㈋?지원자라도 입대하기 위해선 ‘재수는 기본’으로 통할 정도다.

백 소위도 노심초사 3수 끝에 꿈에 그리던 해병대원이 됐다. “해병대라면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 무식, 과격 하다는 3박자의 느낌이 먼저 들 수 있지만 그 선입견을 버리고 직접 몸을 담아보면 내면에 흐르는 끈끈함과 해병대 정신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자신감을 심어 주는지 모를 것”이라고 백 소위는 속내를 털어낸다.

해병대 여군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도 남 다르다. 해병대 여군이 지나가면 세 번 쳐다본다는 말이 있다. 처음엔 멀리서 팔각모와 빨간색 명찰을 보고는 (반드시!) 눈길을 마주치지 않은 채 ‘어, 해병이네’라고 흘끔 쳐다본다. 3m 시야에 들어서면 어깨의 계급장을 본 후 “어 해병대 장교네” 라고 다시 한번 쳐다본다. 그리고 옆을 지나가면 “어, 해병대 여장교네” 라며 마지막으로 고쳐 본다는 것이다. 이같이 주위로부터 홍일점으로 이목이 집중되다 보니 해병대 여군은 여타 군인과 달리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감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백 소위가 부대에 처음 배치됐을 때만 해도 그렇다. 부대 분위기는 어색함과 묘한 반감이 교차했다. 위에선 ‘혹시 전체 분위기를 흐리는 것이 아니냐’며 우려의 시선이 집중됐다. 아래에선 ‘왜 하필 우리 소대장이 여자냐’라는 불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3개월도 못돼 분위기는 180도 역전됐다. ‘남자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독하다’는 평가가 쏟아질 정도였다. 그만큼 다른 곳도 아닌 귀신 잡는 해병대의 여군은 스스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살아 남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튀지 않으면서, 남에게 뒤 처지지 않으면서도, 같이 묻어 가야 하는 곳이 여성에게도 예외가 아닌 바로 해병대다.

특히 장교로서 자신이 통솔하는 소대원들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한 카리스마와 모든 면에서 완벽한 리더십을 갖춰야 하는 법. 그렇지 못 하고서는 지휘 체계가 겉도는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처음엔 이 부분이 여성인 백 소위에게 가장 중압감으로 작용했다. 자신보다 5,6살 어린 동생(?) 같은 소대원들을 일일이 통솔ㆍ관리하다 보면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든 면에서 이들보다 강해야만 명령 체계가 바로 서는 법이다.

- 카리스마와 신뢰로 부대 통솔

백 소위는 4km 완전무장 구보를 16분 플랫에, 윗몸 일으키기를 2분에 70개, 팔 굽혀 펴기 2분에 60개 이상을 소화해 낼 정도로 다부진 체력을 가졌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체력적인 면에서 혈기왕성하고 건장한 남성 소대원들을 앞서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다. 몸으로 부딪쳐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여성의 체력적 한계를 정신력으로 이겨나갈 수 밖에 없다. 규율이 엄격하기로 소문난 곳이기는 하지만.

백 소위는 최근 동계 작전 수행 능력을 높이기 위해 실시된 3박4일의 혹한기 야전 생존술 훈련중 얼음판에서 미끄러져 왼쪽 팔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일반병의 완전무장 장비 무게는 35kg정도지만, 소대장의 경우 40kg을 웃도는 각종 장비의 무게를 등에 짊어 져야 한다. 키 1m60cm, 몸무게 51kg의 백 소위는 행군 도중 얼음판 위에서 발을 잘못 짚어 넘어지고 말았다. “에이, 쪽 팔리게 이게 뭐야”라는 혼잣말을 내뱉고 그는 벌떡 일어나 훈련에 계속 참여했다. 퉁퉁 부어 오르는 팔목의 고통을 느꼈지만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팔목이 부러진 사실이 알려지면서 중대장은 백 소위에게 “훈련 참여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백 소위는 끝까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소대원들을 관리하고 통솔해야 하는 지휘관의 입장에서 자신의 몸이 단지 자신만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원들이 백 소위를 여성으로서가 아닌 ‘악과 깡’으로 똘똘 뭉친, ‘불가능을 모르는 전천후 해병’의 여전사로 인정하는 이유도 바로 그의 강한 정신력 때문이다. 복부에 왕(王)가 새겨질 만큼 극도의 지옥 훈련으로 단련된 백 소위는 최근 군대 밖에서 불고 있는 ‘몸짱 열풍’에 대해 한마디 한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몸짱이 아닌, 생활 자체가 몸짱이 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극한 생존 경쟁 상황에서 몸짱을 얘기하는 것은 내 자신에겐 사치”라고.

여자이기 때문에 지휘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은 잘못이라고 강조했다. 남자같이 돼야 남자를 지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휘관의 카리스마는 부하를 싸움으로 제압할 수 있는 힘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남자 부하가 힘으로 해보자고 달겨들 수 없도록 하는 능력, 장교에 대한 믿음으로 자연스럽게 복종하도록 만드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거부하는 몸짓’을 보이는 부하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백 소위는 꾸준히 면담 등을 통해 먼저 인간적으로 다가서면서 문제를 풀어간다. 계급 체계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살 수 聆?때 비로서 조직은 살아 난다는 믿음이다. 한 소대원은 “(소대장이) 처음엔 도도하고 냉정해 보였는데 지금은 인간적으로 누나 같으면서도 내무반에서는 담임 선생 같이 느껴진다 ”고 말할 정도다.

군대란 처음부터 남성들을 위해 만들어 진 조직체이다 보니 내무 생활이란 게 여성이 있다면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여성 화장실이 따로 없는 탓에 백 소위가 화장실을 들어갈 경우 다들 화들짝 놀라며 처음엔 난리법석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같은 벽도 사라진 지 오래다. 백 소위가 화장실에 들어올 때면 경례를 부치지 않고 본업(?)에 충실할 만큼 의례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 “여자임을 잊으며 살때가 많아요”

숙소에 모여 차를 마시며 모처럼의 휴식을 즐기고
있는 고근영 중위, 배옥란 소위, 장수영 중위(왼쪽
부터). 여군장교가 아닌 그냥 해병대 장교로 불리
우기를 원한다. /사진=최규성 차장

우리나라 해병대에는 현재 장교를 포함해 30여명의 여군이 남성 못지 않게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학사장교 출신도 올해로 3기수를 넘기면서 전투보병에서부터 공병, 보급, 정보 분야 등에 이르기까지 여군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별 배려와 차별성이 아닌 정정당당한 실력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이 부대 정보작전과 고근영(28) 중위는 “군사작전 계획과 정보 판단, 교육 훈련, 보급 등에서 여성의 치밀함, 섬세함, 부드러움은 오히려 남성들이 할 수 없는 부분을 대신해 임무옌릿?효과적으로 수행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며 “여군으로 꼭 남자를 이겨야 한다는 ‘여전사’로서의 치열한 이미지에 집착하기보다는 여성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군인 정신을 배양하는 모습을 실천해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공병대대 장수영(26) 중위는 “군대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면 가끔 스스로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다”며 “이 같은 느낌을 떨쳐버리기 위해 화장을 하고 근무하는 습성을 기르고 막사로 돌아가면 치마를 즐겨 입으면서 여성으로서의 장점을 더욱 살리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최근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해병대 지원이 급증하는 것과 관련, “무엇보다 공동체 의식이 강조되는 해병대 정신이 진정 좋아서 선택해야지, 팔각모의 날렵함이 그저 멋있어 보여 자원했다가는 3개월 훈련도 제대로 못 버텨 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팻말의 명제를 새삼 곱씹게 된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 오늘밤 이루는 단잠의 상당 부분은 유능하고 씩씩한 ‘그들’의 존재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이다.

장학만기자


입력시간 : 2004-03-09 17:16


장학만기자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