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권에서 새 정치 펼칠 민주노동당의 튼실한 뿌리

[민노당 쇼크] 국회 입성 견인한 3인방 '권영길·단병호·노희찬'
제도권에서 새 정치 펼칠 민주노동당의 튼실한 뿌리

민주노동당 10인의 당선자들에겐 거친 역사를 헤쳐 온 ‘ 투사’의 훈장이 있다. 원내 제 3당으로 부상한 이들 투사들은 의석수 10석 이상의 힘을 발휘할 것으로 보여 17대 국회의 ‘ 태풍의 눈’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특히 권영길 대표와 단병호 당선자는 민주노동당의 산파로, 또 노회찬 사무총장은 진보정당운동의 산 증인으로 민주노동당의 국회입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이다. 향후 민주노동당의 좌표 또한 이들 3인의 행보를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권영길(63) 대표는 민주노동당의 역사와 현실을 대변한다. 권 대표는 민주노총의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고, 민주노동당의 창당은 민주노총의 역사적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자출신인 권 대표는 서울신문 파리특파원(1980~87년)을 마치고 귀국, 노동 운동에 뛰어들어 1990년 언론노련을 창립하고 1ㆍ2ㆍ3대 위원장을 지냈다. 신문사를 그만둔 뒤 1995년 민주노총을 창립해 초대 위원장에 올라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를 추진했다.

권 대표는 1997년 민주노총ㆍ전국연합ㆍ진보정치연합 등이 창립한 ‘국민승리21’의 대선 후보로 출마했으며 2000년 1월 창당된 민주노동당의 초대 대표에 올랐다. 그 해 실시된 총선에서 낙선하고 2002년 16대 대선에 출마, 기성 정치인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 권 대표는 이번 4ㆍ15 총선에서 지역구(경남 창원을)에서 당선돼 진보정당의 원내 진입이라는 신화를 창조했다.

민주노동당은 이 달 말과 6월초에 새 지도부를 구성할 예정이지만 권 대표의 지도력은 상당 기간 유지될 것이라는 게 노동계와 시민 운동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권 대표는 지난 2월 23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기자에게 17대 총선 목표와 관련해 “ 득표율로는 15% 이상, 15명 이상의 의원을 배출시키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번 총선에서 정당 득표율 13.0%, 10개 의석으로 권 대표가 기대한 목표에는 미달했지만 원내 제3당으로 부상, 한국 헌정사를 새로 쓰는 이정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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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권 대표의 야망은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그는 4월 29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2012년 대선을 통해 집권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권 대표는 이를 위해 ‘정책 정당’ ‘ 국민의 정당’으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을 전제로 2006년 지자체 선거에서 정당 지지율을 20%대로 끌어 올리고, 2008년 총선에서 명실상부한 제1 야당이 되겠다는 계획도 언급했다. 민주노동당이 브라질 노동자당처럼 집권의 꿈을 이룰 수 있을 지 17대 국회는 권 대표에게 첫 관문이 되는 셈이다.

민주노동당을 대표하는 또 다른 인물은 ‘노동운동의 대부’로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낸 단병호(55) 당선자다. 흔히 권영길 대표가 민주노동당의 ‘얼굴’에 해당한다면, 단 당선자는 ‘발’에 비유된다. 그만큼 민주노동당의 ‘현장성’을 대변한다는 의미다. 또한 권 대표가 민주노동당의 싹을 피웠다면 단 당선자는 그에 앞서 뿌리를 내리는 역할을 했다.

단 당선자는 1980년대 동아건설 창동공장 노조위원장에서 2004년 국회에 진출하기까지 그의 삶의 대부분을 노동 투쟁 현장과 차가운 감방에서 보냈다. 그는 1990년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을 결성한 뒤 1994년까지 내리 4년간 의장을 지냈고, 1996년 민주금속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을 거쳐 1999년부터 2003년까지 2ㆍ3기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는 동안 5년 4개월 동안 다섯차례 구속됐고 3년 3개월을 수배 상태로 지냈다.

지난 2월, 단 당선자는 민주노총 위원장을 퇴임하면서 “ 노동자로서 일하는 사람들을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의 필요성을 꿈꿔 왔다”며 속내를 드러낸 바 있다. 단 당선자는 이번 총선에서 노동계를 대표해 비례대표 2번으로 무난히 국회에 입성했다. 그는 당선 직후 “ 이번 총선에서 진보정치의 원내 진출이 실현된 것은 노동자ㆍ농민ㆍ서민 등 ‘ 일하는 사람들’이 정치의 주체로 당당하게 나섰다는 데 의미가 있다”면서 “ 국회의원의 특권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국민의 호흡을 느낄 수 있는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말했다. 요즘 비정규직 문제에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그는 상임위와 관련, 환경노동위에 뜻이 있음을 내비쳤다.

4월 30일, 중앙대 대운동장에서 진행된 노동자결의대회에 참석한 단 당선자는 제도권 진입과 관련해 노동계 투쟁 방식도 바뀌는 것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노사ㆍ노정 문제가 얼마나 철저하게 상대적인 것으로 투쟁 방식이 바뀌느냐 하는 것은 정부나 사측의 변화 의지, 변화 방향과 맞물려 있다”며 “당과 민주노총의 관계는 대단히 긴밀하게 유지될 것”이라고 말해 노동 운동의 틀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임을 암시했다. 한마디로 타협하지 않는 건강한 ‘야성(野性)’을 유지하겠다는 메시지다.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은 권영길 대표와 함께 투톱 체제를 이뤄 4ㆍ15 총선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TV 토론에서 ‘ 삼겹살 판갈이’, ‘ 자살한 야당’, ‘ 돈 지갑 주운 여당‘ 등 화제의 입담으로 인기몰이를 해 민주노동당의 지지도를 2~3% 가량 끌어 올렸다는 평을 얻고 있다.

노 총장의 촌철살인의 품격은 그의 선 굵은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이미 경기고 재학 시절 ‘유신독재반대’ 유인물을 돌릴만큼 일찍 사회 모순에 눈을 떴던 그는 군 제대후 늦깍이로 고려대 정외과에 들어가 졸업과 동시에 노동운동에 뛰어 들었다. 전기용접기능사 자격증을 따 서울ㆍ부천ㆍ인천 등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다, 1987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의 창립을 주도해 구속되었고, 1992년 백기완 선거 캠프에서 출발해 진보정당운동에 투신했다. 1993년부터 진보정당운동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을 지냈고, 진보정당운동의 암흑기인 1992~96년까지 진보정치연합 대표를 지내는 등 ‘진보정당의 산증인’이라는 들을 만큼 줄곧 한 길을 걸어 왔다.

노 총장은 국민승리21 기획위원장, 민주노동당 부대표 등을 거쳐 이번 선거에서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2002년 사무총장에 당선 뒤 진보정당의 살림꾼이자 야전 사령관으로 세 번의 선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당 내 위상이 상당하다. 장차 의원단 대표(다른 당의 원내대표 또는 총무)로 물망에 오르고 있는 그는 상임위와 관련, “ 민주노동당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되는 통일외교통상위나 재경위, 문광위 등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싶다”고 말한다.노 총장은 또 소수 정당으로 의정 활동의 한계가 있다는 지적에 대해 “ 실현 가능한 정책을 제시해 다른 정당들이 뒤쫓아 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겠다”며 “ 의원 개개인에 대한 설득과 시민 사회의 지원도 이끌어 내겠다”고 밝혔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4-05-04 16:21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