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가족화로 '시부모와 함께 살기'에 부담느끼는 신세대경제불황 지속으로 가족중시 확산, 대가족 회귀현상 두드러져

[新 대가족] 대가족, 짐인가? 힘인가?
핵가족화로 '시부모와 함께 살기'에 부담느끼는 신세대
경제불황 지속으로 가족중시 확산, 대가족 회귀현상 두드러져


회사원 김모(30)씨와 최모(29ㆍ여)씨 커플. 두 사람 모두 나무랄 데 없는 조건에다 서로 성격도 잘 맞아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사귀어 왔다.

무난히 결혼까지 가리라고 의심치 않던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불거진 것은 얼마 전 최씨가 김씨의 집을 방문한 뒤부터. 부모와 조부모는 물론이고 출가한 4명의 누나 부부, 작은할아버지 내외까지 한집에서 사는 대가족을 보고 최씨는 질리고 말았다.

그녀를 반갑게 맞아 주는 친척들의 호의는 고마웠지만 대가족이 식사를 하고 난 뒤 쌓인 엄청난 설거지 더미를 보았을 때는 눈앞이 아득해 진다. 시부모만으로도 충분히 어려운 시댁. 모든 일가 친척이 모여 있는 집에 들어가 결혼 생활을 하려니 그녀는 두렵기만 하다. 그를 사랑하고 있지만, 그의 대가족과 한집에서 잘 살아 갈 자신이 없다. 그녀는 과연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일까. 최근 대가족 형태의 전통적 가정이 무너지고 부부 중심의 핵가족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음에도, 최씨처럼 대가족 제도를 두고 고민하는 이들은 적지 않다.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 첨예해 지는 양상이다.

- 전통적 가족형태 지지 많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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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정보회사 선우(www.sunoo.com)의 설문 조사 결과를 보자. 이 같은 최씨의 사연에 대해 성인 남녀 535명(남 202명ㆍ여 333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남녀의 의식 차이는 컸다. 남성의 83%는 “ 막연한 두려움일 뿐, 결혼한다”고 답했으나, 여자의 53%는 “ 여자에게는 힘든 삶, 헤어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가정학과 성미애 교수는 “ 젊은 세대와 여성들은 가족주의를 반대하는 반면, 남성과 노인들은 가족주의를 지지하는 편”이라며 “ 이런 가치관의 갈등으로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이러한 전통 가족의 근간에는 여성(특히 며느리)의 희생이 담보돼 있기 때문에 “ 과거는 좋았다” 식의 강요는 옳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렇다면 대가족의 전통은 훌훌 털어버려야 할, 버거운 짐일까. IMF 이후 사회가 극도의 침체와 불안에 시달리면서 다시 ‘ 가족’을 중시하는 분위기도 고조되는 있는 이즈음이다. 한국가정경영연구소 강학중 소장은 “ 미국이 9.11 사태 이후 개인주의에서 가족주의로 눈길을 돌린 것과 같이 우리나라에서도 IMF 이후 다시 가정(대가족)으로 회귀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를 보호하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 힘의 원천인 까닭이다. 이러한 전통적 가족형태는 사회의 변천에 따라 다양한 가족 유형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다수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 한국노인의 전화’에 의뢰해 장래에 노부모와 함께 살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10명 중 6명은 ‘ 그렇다’고 답했다. 같이 살기를 원하는 이유도 ‘ 부모이기 때문에’가 67.9%로 단연 압도적이었다. ‘ 부모님이 혼자 사실 수 없어서’는 13.7%, ‘ 逵′?능력이 안돼서’는 4.4%에 불과했다.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곧 ‘효’라고 믿는 것이다.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이재경 교수는 ‘가족의 이름으로’(2003, 또 하나의 문화)라는 저서에서 “ 한국 가족이 형태상으로는 핵가족화하고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직계 가족의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부모 세대나 자녀 세대 모두 서로에게 지원을 기대하는 의식이 변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이를테면 의식은 변함없이 전통적 가족 형태를 지향하는데, 현실은 핵가족에 뿌리를 두고 있는 형국이다. 여하튼 ‘ 가정 해체’, ‘ 가정 위기’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는 가운데 대가족제도에 바탕을 둔 가족주의는 지금 21세기에 새롭게 조명 받을 태세다. 시대역행적이라느니, 시대착오적이라느니 하는 일부의 비아냥을 무화시키는 하나의 미더운 사회 작동 원리로서 재환영 받고 있는 현실이다.

- "따로 살면서 모셔요"
   

가족에 대한 가치관과 현실이 충돌하는 현 시점에서 새로운 가족형태에 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젊은 부부와 부모가 가까운 거리에 살며 도움을 주고 받는 ‘ 수정 확대 가족’이다. 최근 여성부가 전국의 3,500가구, 1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부부는 전체의 12%에 그쳤으나 이들 분가 부부 중 40%는 부모와 같은 동네에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맞벌이 부부가 시댁 부근에 살림집을 장만하는 형태가 우리 사회에 새로운 확대 가족의 모습을 제시하면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유치원 교사인 백모(29) 씨는 지난해 결혼하면서 시댁과 5분 거리에 있는 인근에 신혼집을 장만했다. 시댁과 가깝다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지만, 먼 미래를 생각하면 올바른 선택이라고 믿고 있다. 백씨는 “ 남편이 장남이라, 분가하는 데 따른 부담감을 줄이기 위해 시댁 인근에 살게 됐다”며 “ 시부모님과 가깝게 사는 것이 앞으로 태어날 아기의 육아문제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기대했다.

70대 윤모 할머니는 얼마 전 40대 아들 부부와의 20여 년 동거 생활을 끝냈다. 애초 아들 부부의 결혼 때부터 며느리 눈치 보기 싫어 따로 살고 싶었지만, 모아 놓은 재산도 없고 달리 생계를 해결할 뾰족한 수가 없어 아들 내외의 부양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며느리와의 갈등이 커지자, 아들에게 통사정해 2,000만원짜리 전세방을 얻어 이사했다. 물론 아들 집 인근이다. 윤 할머니는 “ 요즘은 시어머니가 며느리 ‘ 시집살이’ 하는 시대가 아니냐”며 “ 한 집에 살 때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자주 왕래하는 게 며느리와의 정을 쌓는 데도 더 좋다”고 했다.

이러한 변화의 키워드는 실용성이다. 젊은 세대는 부모로부터 양육의 도움을 받아 좋고, 연로한 부모는 자식이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 의지가 된다는 것이다.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서혜경 교수는 “ 대가족 제도다, 핵가족 제도다 하는 개념을 넘어, 이 두개의 사회 제도가 혼합되면서도 한국 고유의 경로 효친 사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수정확대가족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 2004-05-11 16:22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