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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와 신데렐라’ 신드롬] ‘우리 가슴에도 왕자는 있다’
'파리의 연인' 마니아 모임서 들춰 본 요즘 남자들 심리
드라마 속 캐릭터 보며 "저렇게 살아봤으면" 동경심




SBS드라마 '파리의 연인'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이 안국동에서 정기모임을 가지고 있다. 김지곤 기자

7월 2일 저녁, ‘ 파리의 연인’의 연인들이 모였다. 궂은 날씨에도 나와 토론회를 가진 이들은 SBS 드라마 ‘ 파리의 연인’ 공식 홈페이지 회원들이다. 이 드라마에 중독된 ‘ 파리지앵’과 ‘ 파리지엔느’ 이기도 하다. 온 라인 활동은 활발했지만 오프 라인의 만남은 처음. 그러나 잘 알던 사이인 것처럼 서로 별명을 부르는가 하면, 일상을 시시콜콜 다 알고 있었다.

‘ 파리젠느 능력 평가 고사’ 출제에다 패러디 신문기사까지 만드는 김미현씨, 극중 수혁을 너무 사랑해 ‘ 수혁 사랑’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 동건줌스’ 운영자 조완정씨, 밤새 홈페이지를 떠나지 못해 눈가에 다크 써클이 생겼다는 임찬임씨, 주인공 사진을 이용해 틀린 그림 찾기 시리즈를 만든 김상미씨 등 몇 명은 안국역에서 기다리는 동안 첫 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한다. 지향하는 것이 같으면 마음도 통하는 법이라 했는데, 드라마 하나가 이들을 이렇게 엮어준 셈이다.

축제의 현장에 와 있는 듯, 들뜨고 술렁이는 분위기. 그들은 우선 기자를 이방인 대하듯 했다. 그리고 처음 건네는 말, “ 파리의 연인 보세요?” 였다. “ 아, 네 저도 봐요.” 그러자 염탐하는 분위기는 사그러들고, 방금 전의 화목한 분위기로 장면 전환. 그들의 시험에 통과한 기자는 휴우, 다행이다 싶어서 한숨을 돌리는데, 옆에 있던 한 여성이 하는 말, “ 기주가 죽는다고 누가 그래요? 작가 언니에게 물어 봤는데, 파리의 연인은 비극이 아니래요. 기주 절대 안 죽는대요.” 한기주(박신양)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 기주 폐인’을 자청하는 이민정씨였다.

참았다는 듯이 먼저 말을 거는 김재영씨. “ 있죠, 나 아직까지 설레요. 수혁(이동건)이가 태영(김정은)이의 손을 자기 가슴에 가져다 대고 ‘ 이 안에 너 있다!’ 하는 대사 말예요.” 동시에 회원들의 우우 하는 환호성! 여고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랄까. 동건줌스의 회원들은 극중 수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라고. “ 애기야 가자. 이 대사 모르면 요즘 간첩이에요.” 모른다 하면 곧 바로 왕따 될 것 같은 분위기. 이제 남자들은 박신양처럼 애인에게 ‘애기야’ 라는 애칭을 사용해야 될지도 모른다.


- ‘애기야 가자’ 모르면 간첩?

기말고사 기간이라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다음 카페지기 공성우 군은 고3 수험생임에도 5만이 넘는 카페의 운영자 역할을 한다. 카페 회원이 6:4(여:남)비율이라며 남자 회원도 만만치 않게 활동을 한다고 하는데, “저희 반 남자애들도 거의 다 보는 편인데, 월요일 학교에 가면, 수혁과 기주 흉내를 내는 애들이 꽤 많아요. 남자들이 봐도 멋진 캐릭터죠. 부자에 엘리트고, 게다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의 사랑 방식을 대립적으로 잘 그려 놨어요. 고등학생인 우리에게는 일종의 교과서 같은 역할을 해요. 재벌2세가 나오면 저 사람들은 언제 일하나 싶을 정도로 방탕한 생활만을 보여주었는데, 이 드라마는 남자들이 자기에게 맡겨진 일도 열심히 하며 사랑도 할 줄 아는 캐릭터죠. 나도 여자친구가 생기면 저렇게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그런 심리가 패션 따라잡기로 가는 것 같아요.”

남학생임에도 여학생들이 좋아하는 순정물 같은 드라마 카페를 운영하고 열광하는 게 신기하다는 질문에 그는 서슴없이 대답한다. “ 우리에겐 이런 드라마가 현실이에요. ‘ 무인시대’나 ‘ 장길산’ 같은 사극은 부담만 돼요. ‘ 야인시대’ 같은 드라마는 남자들에게 김두한이라는 실제 영웅의 삶을 보여주어서 한때 재밌긴 했는데 그런 삶이 오히려 현실과 동떨어진 삶 아닌가요? 영웅은 아무나 될 수 없는 거고, 결국 영웅은 단 한 명뿐인데, 사랑 이야기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이야기거든요. 무조건 남자답게 그리는 캐릭터는 이제 우스울 뿐이에요.” 남자들의 취향이 변하긴 변했다. 영화 ‘ 여친소’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남자들을 이상하게 쳐다볼 이유가 없듯이, 무협지는 더 이상 남자들만의 오락물이 아닌 것이다. ‘ 파리의 연인’을 재미 있게 보고 있는 한 40대 후?남성은 김정은의 귀엽고 코믹한 연기가 좋아서 계속 보게 된다고 한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소박하고 털털한 성격에 부담 없는 여자라 그런지, 순수한 사랑을 했던 시절을 자극하는 여자 캐릭터지 뭐야.”

정기모임 때 토론 주제는 ‘요즘 남자들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 였는데, 아쉽게도 남자 회원은 나오지 않았다. “회원 중에 남자들 많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정기모임에는 잘 안 나오려 해요. 카페에서 활동도 활발히 하고, 수다도 잘 떨어요. 리플도 얼마나 많이 달리는데요.” 남자 친구에게 수혁이 입고 다니는 패션을 그대로 입힌다고 하는 한 회원은 “ 제가 수혁의 보헤미안 스타일로 꾸며 주면 무척 좋아해요.” 수혁은 유럽풍 빈티지 스타일을 주로 입고 나오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반항아의 이미지를 가진 캐릭터인데, 강태영을 사랑하는 방식이 남자가 보아도 반할 정도라고 한다.


- 남자들 마음은 늘 ‘수혁’과 ‘지주’

“남편이 그러는데, 남자들에겐 모두 수혁과 기주 같은 모습들이 있대요. 마음은 늘 수혁과 기주라는 거예요. ‘ 이 안에 너 있다’ 라면서 갑자기 수혁의 대사를 따라하는데, 그때 남자들 참 귀여워요. 드라마를 빗대서 그런식으로 은근히 자기 맘을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덜 창피한가봐요. 그동안 사회에서 남자들에게 요구했던 방식들이 그들을 억압했는지도 몰라요. 결혼하고 나서 보니까 남자들이 얼마나 여린 사람인지 알았다니까요.” 정환맘으로 불러달라는 그녀는 드라마 1회부터 지금까지 모두 남편과 함께 봤는데, 주연 남자들을 한번씩 따라하는가 하면 갑자기 ‘우리 파리 한번 가자’라고 바람을 넣는다고 한다. 그들은 그 드라마를 보기 위해 9시가 되면 애기를 재우기로 바쁘다고 한다. “ 제 남친은요, 수혁이 드럼을 치다가 스틱을 집어 던지는 장면을 내가 멋있다고 했더니, 바에 가서 드럼을 한번 쳐보겠다고 그러면서 그걸 따라하지 뭐예요.” 미선씨는 별걸 다 따라한다고 남자친구를 나무랐지만, 색다른 모습에 새삼 놀랐다고 한다.

김재영씨도 거든다. 29세 된 남동생이 그 장면을 보더니 내 속이 더 후련하다,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고 말했다고. 그리고 그녀는 “ 얼마 전에 ‘ 내 남자 친구는 왕자님’이란 영화를 남편과 같이 보았는데, 남편이 ‘ 나도 저렇게 왕자처럼 살고 싶다’ 라고 말하는데, 속으로 놀랬어요. 신문이나 잡지에서 재벌가 아들들의 생활이 공개되면서 부쩍 그 세계를 동경하는 남자들이 많아진 건 분명해요.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경제적인 부담에선 많이 벗어났지만, 오히려 그것이 가장의 유일한 권위를 잃은 계기가 아닌가 싶어요.”

계속되는 취업난과 극심한 경기 침체로 로또를 하며 인생 역전을 꿈꾸는 사람들. 드라마 속 주인공의 패션을 따라하고 그들의 대사를 암기하는 10대 청소년. 여자 친구가 좋아하는 드라마 속 남자를 질투하더니 어느새 자신이 그 남자를 모방하기도 하고, 드라마 하는 동안은 해외 출장도 뒤로 미루는 간 큰 남편들.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동경하며 자신의 욕망을 거기에 투영하고, “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며 푸념하는 남자들.

남자들도 꿈꾼다. 말없이 도와주고 싶은, 위급할 때는 자신을 던져서라도 구제해주고 싶은 강태영 같이 약하고 순수한 여자를…. 왕자가 되는 날을 위해, 남자들은 오늘도 열심히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는다.

우리는 판타지의 실현을 원하는 게 아니다. 보다 정확히는 트렌디 드라마라도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 사회에서, 판타지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아닐까. 필요한 건, 꿈꿀 수 있는 권리일지도 모른다.

** 자료제공:SBSi.com 송승현 PD



유혜성 자유기고가 cometyou@hanmail.net


입력시간 : 2004-07-0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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