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문화를 자연스런 문화적 코드로 인식 문화향유와 함깨 비판능력도 키워야

[日流열풍] 왜색의 족쇄를 풀고 대문으로 들어서다
일본문화를 자연스런 문화적 코드로 인식 문화향유와 함깨 비판능력도 키워야

‘최후의 금기’가 이제는 ‘일류(日流)’가 되어버렸다.

왜색(倭色) 혹은 저질ㆍ퇴폐라는 규정 아래 금기시되던 일본 문화가 이제 대중문화산업의 차원을 넘어 우리 젊은이들의 의식주 깊은 곳까지 파고 드는 흐름, 일류가 됐다.

지금 한국에 불고 있는 일본 바람은 드라마 ‘겨울 연가’의 주인공 배용준을 일컫는 ‘욘사마’ 열풍으로 대변되는 일본에서의 ‘한류(韓流)’와는 그 성격을 달리 한다. 한류는 한국의 TV드라마, 영화, 가요 등 대중문화와 그 스타에 대한 열광을 바탕으로 한다. 기본적으로 한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에 대중문화산업의 국경 넘나들기다. 일본만이 아니라 중국, 대만에 불고 있는 한류 현상도 그 성격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오늘날 서울의 종로, 신촌, 강남을 휩쓸고 있는 일류는 다르다. 거기에는 배용준 같은 특정 대중문화의 스타가 아니라, 일본의 전통 축제 마쓰리의 먹거리와 입성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식 선술집 이자카야에는 일본 그림이 걸리고 일본 전통 복장을 한 종업원들이 일본어로 손님을 맞이한다. 10대부터 20, 30대의 한국 젊은이들은 일본이 넘쳐 나는 그곳에서 일본식 의식주, 기본적 생활문화를 자연스럽게 흡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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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화가 모네, 고흐 등이 일본의 전통 서민회화 우키요에(浮世繪)에서 영향을 받아 그 화풍을 발전시킨 19세기말 유럽의 일본식 문화유행은 자포니즘(Japonism)이라 불렸다. 20세기 후반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면서는 화풍(和風) 혹은 일풍(日風)의 바람이 구미를 휩쓸었다. 자포니즘, 화풍과 지금 한국에 불고 있는 일류의 바람은 어떻게 다르고 또 무엇이 비슷할까. 한국의 일류는 단순히 한때의 유행인가, 아니면 새로운 문화 코드인가.

영화 ‘동백 아가씨’ 포스터.

가수 이미자가 1964년 발표한 가요 ‘동백아가씨’가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가 6ㆍ29선언 이후에야 해금된 사실은 일본문화를 보는 과거 우리 사회의 시각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인 예이다. 1965년 한ㆍ일 국교 정상화 이후부터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시작된 1998년 이전까지 일본 문화 전반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각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문화는 한국 사회에서 ‘최후의 금기’로 남아 있었다.


- 달라진 세대의식의 결과

‘언어 도서 가요 등 왜색 범람’ 1981년 광복절의 한 신문은 이렇게 전하면서 ‘문화의 해방은 아직 못 이뤄’라고 커다랗게 활자를 뽑아 보도하고 있다. 84년 4월의 스크랩은 ‘일 대중문화 교실까지 오염’이란 제목 아래 한국의 중고생들이 일본 패션, 가요를 비판없이 수용하고 있으며 일본 잡지나 액세서리 등의 주요 고객을 10대들이 차지하고 있다며 이를 비판하는 요지의 뉴스를 전한다. 독립기념관이 개관된 1986년에는 일본 전통연극 가부키의 국내 공연을 ‘호기심 편승’이라고 규정하면서 ‘일본문화가 뒷문으로 밀려온다’고 보도한 신문 기사도 보인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처럼 ‘왜색 문화’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면서 아시아는 물론 서구에 침투하는 일본 문화의 영향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한편으로는 TV드라마나 가요, 영화의 일본 작품에 대한 베끼기 논란이 끊이지 않은 채. 한국 정부가 일본 대중문화 개방 스케줄을 공식적으로 밝히기 1년 전인 97년에는 일본 식당 체인점이 속속 개점해 성시를 이루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입맛까지 일제(日製)가 점령, 김치 비빔밥 육개장까지 로열티를 주고 역수입해야 할 판’이라고 개탄한 사회면 기사도 보인다. 올해 2월 일어났던 탤런트 이승연의 ‘위안부 누드’ 파문은 한ㆍ일의 역사와 대중문화를 보는 우리 사회의 여러 시각을 한꺼번에 격렬하게 분출시킨 사건이었다.

일본에서 판권을 사들여 제작,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영화 ‘올드 보이’.

무제한으로 일본 대중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된 시대, 이제 의식주에까지 불고 있는 일류 바람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일단 일류는 일본 대중문화의 전면적 개방, 달라진 세대 의식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대체적인 시각이다.

과거 일본 문화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었다. 첫째는 한ㆍ일 간의 특수한 역사적 관계에서 비롯된 국민 감정 혹은 정서를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 36년간의 식민 지배로 인한 상처가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현실에서 무분별한 일본 문화의 유입은 역사를 망각하고 다가올 미래를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일본문화의 특징을 저질적인 선정성, 폭력성으로 보는 시각이다. 섹스 관련 산업을 ‘욕망산업’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고, SM(사도마조히즘)이라는 약칭으로 가학ㆍ피학적 코드를 대중문화는 물론 순수문화 영역에서도 거리낌없이 노출하는 일본 문화의 속성을 한국 사회가 쉬이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것이 한국 청소년들에게 미칠 영향은 훨씬 심각하다는 우려가 여기에 자리잡고 있다.

세번째는 산업으로서의 일본 대중문화가 지금 막 성장하고 있는 한국 대중문화 산업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였다. 하지만 그 영향은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의 시장 분석에서 예상보다 훨씬 미미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류는 오히려 그 역풍을 보여준 현상이기도 하다.


- 역사의식서 비켜난 젊은 세대

위안부 누드 파문을 일으켰던 탤런트 이승연.

일류 바람에 거리낌없이 동참하고 있는 한국의 젊은 세대는 그러나 이 같은 우려들을 기우로 본다. 이들은 기성 세대의 민족 감정, 역사 의식을 담아 일본 문화를 바라보지 않는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몰래 구해서 은밀하게 돌려보던 30대 이상과는 달리, 인터넷에서 동호회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10, 20대는 일본 애니메이션, 만화 선호에 대해 “그냥 좋다” 혹은 “세계가 인정하는 경쟁력” 이상의 이유를 대지 않는다. 국민 정서나 저질 시비는 이들에게 더 이상 일차적인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빠르게 일본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화’하는 것이 그들의 관심이다. 특정한 문화의 흐름을 국경을 구분으로 막는다는 것은 그들의 상상 밖에 있다. 문화야말로 그들에게는 생명체와 같은 존재이다.

이런 그들에게 이자카야, 젠 스타일, 코스프레는 더 이상 은밀한 호기심이나 배척의 대상이 못된다. 미국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소룡, 사무라이, 서부극 코드를 온통 잡탕처럼 뒤섞어 만든 영화 ‘킬 빌’에 열광하는 세계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일류를 하나의 자연스러운 문화적 코드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다양한 문화의 수용 능력은 그 자체로 한 사회의 성숙도의 지표가 된다. 남는 문제는 문화 향유 능력과 동시에 형성되어야 할 비판 능력의 성숙일 것이다.

/하종오 기자


입력시간 : 2004-07-21 12:07


/하종오 기자 joh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