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로 불러낸 환상의 세계생활화 된 일본대중문화, 꿈 꾸듯 만화 속 주인공이 된다

[日流열풍] 재패니매이션과 코스프레
현실로 불러낸 환상의 세계
생활화 된 일본대중문화, 꿈 꾸듯 만화 속 주인공이 된다


의상을 뜻하는 ‘ 코스튬(costume)’과 ‘ 플레이(play)’의 합성어인 ‘ 코스튬 플레이’는 만화ㆍ게임ㆍ영화 속의 등장인물로 분장하고 그들의 동작이나 상황을 재현하는 대중적인 행위 예술이다. 일본식 영어로는 ‘ 코스프레’라고도 한다. 7월 17~18일, 학여울 전시장에서는 그 말을 그대로 딴 ‘ 제39회 코믹 월드 서울 코스프레 콘테스트’가 열렸다.

그다지 좋은 날씨가 아니었음에도 그 열기는 뜨거웠다. 참가자들은 직접 만들어온 의상을 입고 유명 만화 캐릭터로 분장해 자신들의 끼를 맘껏 뽐냈다. 한 달에 두 세번 꼴로 열리며 행사장마다 코스튬 플레이어가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는 행사들 중 하나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코스프레 관련 동호회는 7만 명을 훨씬 상회하는 회원 수를 보유하고 있다.

인터넷 다음 카페에서 ‘ 코스프레 동호회’를 운영하고 있는 임시영(19ㆍ고교생)양은 코스프레를 하는 이유를 “ 나와 캐릭터의 일체감을 느끼기 위해”라고 한다. “ 코스프레를 하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여가 생활로는 딱이죠. 일단 예쁜 옷 입고 시선 받으면 기분 좋잖아요.” 더더군다나 평소 동경해 마지 않던 만화 속 예쁜 여주인공으로 여겨지니 더 말할 것이 없다는 투다.


- 코스프레·구체관절인형 마니아 급증

환상의 세계를 현실로 불러온다는 즐거움은 비단 코스튬 플레이어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구체 관절 인형’ 붐도 그 즐거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난 6월 홍대 앞에 구체 관절 인형을 테마로 카페를 연 유재혁 사장(47)의 말에 따르면 주말이면 90여 평에 달하는 카페가 손님들로 가득 찰 정도. 비단 인형 마니아만이 아니라 중학생, 연인, 가족 등을 비롯한 일반인들의 발길도 잦다고 한다. 가게 매출은 계속 상향 곡선을 긋고 있다.

‘ 구체 관절 인형’이란 인형의 목ㆍ팔꿈치ㆍ무릎ㆍ손목ㆍ발목ㆍ어깨 등에 공모양의(球體) 관절을 넣은, 인형 이상의 인형이다. 사람처럼 턱을 괴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 있으며 무릎을 꿇고 앉는 등의 신체 표현도 가능하다. 평균 키는 60~70cm, 작은 인형은 40cm 정도다. 인형의 본체가 80만원 이상이고 가발은 4~5만원, 옷은 최대 40~50만원까지도 한다니 인형 하나에 족히 100만원 정도가 필요한 셈. 그래서 인형 마니아들은 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20~30대의 여성들이다.

또 이 인형은 인형 주인이 직접 화장을 시키고 가발을 씌우고 옷 색깔에 맞춰 눈동자를 바꿔 끼울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같은 인형이라도 화장하는 방식이나 눈동자의 색깔 등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이 나올 수 있다고. 자신의 미적 환상을 인형에게 투영하는 것이라 보면 된다. 고등학교 때 코스튬 플레이어였다는 김미선(가명ㆍ24세)씨의 말. “ 나를 대상으로 하는 코스튬 플레이는 아무리 옷을 비슷하게 만들어 입어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인형을 가리킴)를 만난 후엔 완벽히 그 세계가 재현된다. 우선 인형은 나보다 예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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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 환상의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재현해 낸다며 즐거움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들이 좇고 있는 것은 자신의 환상이 아니다. 일본 만화가 이미 공고히 구축해 놓고 있는 일본식 환상의 세계다. 일본 만화만 흉내내는 것 같다는 기자의 지적에 임시영씨는 “ 국내 만화의 캐릭터는 다 거기서 거기다. 독특함이 없다. 반면 일본 만화의 캐릭터들은 성격도 다양하고 ‘ゾ臍?튀는 요소’가 있다”고 답한다. 코스프레에 푹 빠져 있는 십대들도, 구체 관절 인형의 매력에 빠진 인형 마니아들도 되고 싶고 닮고 싶어하는 존재는 바로 일본 만화의 주인공인 것이다. 유년기부터 TV에서 방영되는 각종 애니메이션을 접했고, 책 대여점에서 일본 만화를 빌려 보며 성장한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일본 대중 문화는 결코 이질적이거나 낯설지 않다.


- 일본풍서 비켜나지 못하는 드라마

사실 우리나라에서 방영되는 TV드라마들 중 ‘ 일본풍’이라는 비난에서 비껴 날 수 있었던 드라마는 정통 사극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들만 봐도 그렇다. 방영 10회 만에 시청률 40%를 가뿐히 넘는 등 기염을 토하고 있는 SBS ‘ 파리의 연인’ 여주인공 김정은은 아예 드라마 속에서 캔디의 주제곡을 부른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그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여자 탤런트들의 이름을 나열해 보면 그게 바로 역대 한국판 캔디들의 명단이 될 정도다. ‘ 파리의 연인’만이 아니다. MBC 주말 연속극 ‘ 사랑을 할거야’는 세대간 사랑의 충돌이 주제다. 만화가인 엄마(김미숙)가 재혼 상대로 사랑하고 있는 남자(강석우)의 아들(연정훈)이 바로 딸(장나라)의 남자 친구라는 설정이다. 우리 문화 풍토에선 개연성이 없다는 비판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낯선 광경이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 설정은 ‘ 악마로소이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등 많은 일본 만화에서는 흔하다.

6월 1일 첫 선을 보인 후, 매주 화요일마다 KBS2 TV를 통해 방영되고 있는 ‘ 고스트 바둑왕’은 방영 직전 만화 팬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등장 인물 이름과 의상 등 설정을 한국식으로 바꾼다는 방침을 세웠기 때문이다. 또한 주연급 캐릭터가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캐릭터의 상당 부분을 지워서 내보내기로 했다. 팬들은 “ 이미 만화책으로 출간이 되어 웬만한 사람은 일본 만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며 “ KBS측의 결정은 눈 가리고 아웅 하자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이에 맞서는 KBS의 입장도 단호했다. 가치 판단이 미성숙한 어린이들이 주시청자이기 때문이 일본 문화를 적절한 수준에서 걸러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일본 만화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왜색’을 벗겨내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러나 일본 문화가 무차별적으로 유포돼 있는 상황에서 이불 속에서 만세 부르기로 끝나지나 않을지.

서유진(22ㆍ외국어대 독문3)씨에겐 일본 문화가 곧 생활, 그 자체다. 전통 일본 의상(유카다)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옷차림에다 일본풍 신발(조리)을 신고 홍대앞의 일본 수공예품 전문 가게 ‘진교’(금붕어)에 들러 선물을 고르는 그의 입가에는 웃음이 배어 있다. “ 일본 만화나 드라마는 쓸데없이 진지하지 않아서 좋다.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들, 평범한 소시민의 성공기 등을 주요 테마로 잡아 공감이 간다. 나는 한국 드라마나 만화는 별로 보지 않는다. 아류라는 느낌이 강하다.”

일반 대중의 정서를 공략해 가며 일상 속으로 침투해 오는 일본 문화. 한국 문화의 경쟁력이라는 해묵은 화두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게 되는 요즈음이다.

박소현 인턴기자


입력시간 : 2004-07-21 13:12


박소현 인턴기자 pest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