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 회고전…숨막히는 감동과 몰두의 순간35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은 걸작품, 시기별 대표작 망라한 세계적 미술전

[色의 幻-샤갈展] 색의 마술에 걸리다
샤갈 회고전…숨막히는 감동과 몰두의 순간
35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은 걸작품, 시기별 대표작 망라한 세계적 미술전


"아이, 이리 더븐 날에 요 사람들이 다 오데 가는기라?", "저 안에 무슨 일이라도 있깐?"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가는 행인들의 뒤통수에 대고 삼복 더위의 덕수궁 돌담길이 수군거린다.

시립미술관에서는 35년 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 미술관에서 개최된 샤갈 전작 전시회(474점) 이래 세계적으로도 드문 샤갈 회고전(120여점)이 열리고 있다. 이곳 방문객들의 수만도 하루 3,500여명(주말 4,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대성황을 이뤄 '여름은 미술동네의 비수기'라는 이 바닥의 정설을 뒤엎고 있는 현장이다.

거장 샤갈의 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관람객들. 그들은 샤갈과의 시공을 초월한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는 등 그의 작품세계에 흠뻑 취했다. / 최흥수 기자


- 국내 미술품전시 사상 최고의 규모

관련기사
소설가 성석제의 미술관 나들이
샤갈전 관람포인트
샤갈은 누구인가

이번 색채의 마술사 샤갈 회고전은 이를테며누 전시회의 블록버스터물. 프랑스 니스의 국립샤갈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 파리시립미술관, 트레티아코프미술관, 스위스 샤갈재단, 개인 소장품 등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샤갈의 걸작들이 한 데 모였다. 120여점에 이르는 전체 작품에 대한 보험가만 하더라도 1억달러(약 1,200억원)에 달하는, 우리나라 미술품 전시사상 찾아보기 힘든 규모다. 덩치뿐만 아니다. 그의 작품을 구분 짓는 시기별(러시아 - 프랑스 파리 - 미국 망명 - 프랑스 정착) 대표작들을 망라해 내실화도 꾀했다는 평이다.

전시관으로 들어서자 샤갈과 그의 가족 사진 그리고 그의 왕성한 작품 활동을 짐작할 수 있는 흑백 사진 20점과 간략하게 정리된 그의 연대기가 객들을 먼저 맞는다. 작품을 즐기기 위해 작가의 삶을 이해하는 사전 작업이 요구되는 건 당연지사. 그러나 여느 작가보다 오래 살다간(98세) 샤갈이다 보니, 예습이 더욱 절실하다는 게 서울시립미술관 자원봉사 도슨트(docentㆍ전시장 안내원) 윤정애씨의 설명이다. 또한, 생전에 작품성을 인정 받지 못해 남루한 생을 살다 간 고흐와는 달리, 일찌감치 명성을 얻어 말년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탓(?)이기도 하다. “나의 작품은 내 추억이다”고 했던 샤갈의 말 그대로다.

본격적인 작품이 걸린 전시관으로 깊숙이 들어서자 샤갈의 대표작 ‘도시 위에서’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버스 옆구리, 시내 곳곳의 벽보판과 현수막, 손에 쥐고 있는 입장권 등에서 보던 바로 그 그림이다. 1915년 샤갈이 벨라와 결혼한 직후 제작한 그림 중의 하나로 신혼의 행복을 사실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전통적인 회화 형식을 취한 작품이다. 그의 고향 비테프스크의 다른 화가들은 추상을 시도할 때여서 더욱 돋보인다. 작품 평가액만도 1,000만달러(약 120억)에 이른다는 도슨트의 설명에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얼떠름한 표정. “생애에 한번 볼 수 있을까 말까 한 작품을, 그것도 1m도 채 되지 않는 작품과의 거리 사이에 어떤 장애물도 없이 맨눈으로 보는 느낌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전주서 올라 온 샤갈의 어느 팬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작품세계

작품 설명이 시작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도슨트 윤씨를 따르는 사람들은 30여명으로 늘었다. 콩나물 시루에 재인 듯 다닥다닥 붙어서 고개만 삐죽 내민 그들이 더위를 탈법도 하지만, 말 한마디를 놓칠세라 여념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무리의 중간에 선 한 중년 신사는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의 위태로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결국 앞 사람에게 그것을 떨구는 ‘실례’를 범하고 만다. 다음 작품은 ‘셍 폴 위의 부부.’ 10여 미터를 이동하는 동안 맨 뒤에 섰던 커플이 약삭빠르게 맨 앞으로 헤집고 가는 바람에, 그 자리에 섰던 덩치 큰 중학생들이 뒤로 밀렸다. “안 들려욧!” 맨 바깥 줄에서 나온 아우성. 조그마한 확성기라도 동원하면 시원시원히 들릴 법도 하지만, 조용히 개인적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겹겹이 쌓인 인파는 어느새 50여명. “뒤에서 안 들리는 분들은 15분 뒤에 시작하는 다음 설명을 들으시면 됩니다.” 하루 두 차례(오전 11시, 오후 4시) 진행되던 작품 설명 투어가 네 차례로 늘어 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40~50분 정도 걸리는 투어다.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자족적(自足的)인 존재.’ 도슨트의 작품 해설과 설명은 되려 작품 감상과 이해를 그르치게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이른바 ‘내재 비평가’들의 작품 감상 열기도 만만치 않다. 허리춤에 팔을 얹은 채 작품 앞으로 다가섰다 물러서기를 반복하는, 방학 숙제를 위해 들렀다는 중학생, 엄마의 등을 받침삼아 스케치북 위에 샤갈을 옮기고 있는 손놀림 빠른 초등학생. 모두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있는 이들 이상의 진지함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왔다”며 극구 말 붙이기를 꺼리는 아줌마들. “언어가 묘사할 수 없는 것을 그림으로는 보여 줄 수 있다”는 게 샤갈의 생각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그림을 다시 언어로 전환하는 작업에는 무리가 따랐을 법도 하다.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에서 많은 울림을 받았다며 그 시의 모티프가 된 샤갈의 ‘나와 마을’을 보기 위해 찾았다는 한 중년 신사는 유독 그 작품이 빠진 이번 전시회가 못마땅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유대인으로서 샤갈이 겪은 고난과 슬픔이 묻어나는 그의 다른 많은 작품들을 접하니 암울했던 시대를 살았던 자신의 젊은 날도 보상되는 듯 하다며 결국 반색한다. “학교 근처의 ‘사발에 술 내리는 마을’ , ‘김에 밥 내리는 마을’ 이라는 술집과 밥집을 애용하는데, 그 간판들의 ‘저의’가 궁금해서 샤갈을 찾았다”는 캠퍼스 커플도 있다.

사람들의 발길을 이곳으로 잡아는 끄는 요인은 다양했다. “‘샤갈’ 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낭만이죠. 조금은 오래 된 거리를 오랜 친구와 함께 거닐며 커피를 함께 하고 싶은 그런 느낌까지 전해주는… .”그래서 서울 모처에 자리한 카페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을 자주 들른다는 구춘옥씨(52). 그의 말마따나 여기서 접하는 샤갈은 한결같이 부드럽고, 따뜻하며, 환상적이고 아름답다.


- 샤갈이라는 이름 자체가 낭만

샤갈의 마을에 눈이 내리도록, 한국 사람들이 샤갈에게 관심을 ??도록 한 사람은 것은 시인 김춘수였다.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 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네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라고 노래하면서 였다. 그러나 샤갈의 마을에 눈이 내린다고 따라 읊조리던 시심에 내리던 게 단지 눈 뿐일까.

박상우의 소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낭만과는 거리가 있는 소설이다. 치열했던 80년대를 지나 1990년에 발표된 소설에서 여섯 명의 친구들은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카페를 찾아 떠난다. 그들이 원했던 건 여섯 명의 ‘우리’가 정치적 이슈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일 수 있는 푸근한 카페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줄고 줄어 두 명만 샤갈의 그림 앞에 선다. 그러나 그 둘이 얻어 들은 말이란 “결국은 둘도 안 남는다는 걸 알아야지. 결국은…….”이라는 말이다.

샤갈은, 참으로 먼 길을 돌아 온 우리들 속에 웅크리고 있던 기억과 자의식을 불러 낸다. 전투적이고 치열했던 시간, 사상적으로도 경직된 시대…. 민족ㆍ민중ㆍ민주를 외쳤지만 마음 한 켠에는 이방의 도시를 품고 남몰래 꺼내 보기도 했다. 그렇다면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란 말은 현실을 버틸 수 있게 하는 마법의 주술이었던가.

이번 전시에 단연 돋보이는 작품은 국내에 한번도 공개된 적 없는 ‘유대인 극장’ 연작(Panels of Jewish Theater). 극소수의 대형국제전을 통해 구미권에서만 소개된 작품이다. ‘무용’, ‘연극’, ‘음악’, ‘문학’으로 구성된 이 패널화는 1920년에 모스크바 소재 유대인 극장의 패널화로 제작됐지만 스탈린 정권에 의해 철거된 이후, 50년 이상 창고에 방치되어 있다가 8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상 빛을 보게 된 작품이다. 1995년 파리 시립미술관에서 개최한 샤갈의 러시아 시기 전시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 작가 샤갈의 예술과 철학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알려진 이 작품은 한국 전시를 위해서 특별히 공수된 작품이다.


- 샤갈의 색감에 질투 느끼는 미술학도

미술관의 도슨트가 관람객들에게 <도시위에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최흥수 기자
미술관의 도슨트가 관람객들에게 <도시위에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최흥수 기자

시간은 흐르고 흘러 해는 기울고 더위가 옅어질수록 샤갈을 만나기 위한 사람들의 발걸음은 더욱 분주해진다. 이런 미술관 분위기와는 달리 한 작품에 10분 이상씩을 할애하는 한 커플이 유난히 눈에 띈다. “우리도 그림을 그리지만, 어울리는 색깔 찾는 것이 가장 힘든데 샤갈의 경우는 막 쓰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며 질투부터 한다. 허무해 보이는 질투심, 샤갈을 딛고 올라서겠다는 야심이 말마따나 묘하게 어울렸다.

폐관까지 한 시간을 조금 못 남긴 저녁 8시 5분. 연인 한 쌍이 미술관에 도착한다. 이미 관람 소요시간을 감안, 더 이상의 객을 받지 않는 시간이다. “서둘러 봐야 시간 내에 볼 수 있다”는 안내 요원의 말에 “샤갈과의 첫 만남을 주마간산으로 시작할 수 없다”며 등을 돌린다. 훗날을 기약하고 발길을 돌린 그들의 등은 이미 땀으로 후줄근히 젖어 있었다.

해는 기울었지만, 여전히 후끈거리는 미술관 밖에는 많은 이들이 미술관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샤갈과의 이별을 아쉬워하기라도 하듯 벤치와 파라솔에서, 더러는 잔디 위에 누워서 샤갈을 이야기한다. 잔디 위에 앉은 한 중년 부부는 샤갈에게 빠져 전시관을 서너 바퀴 돌았는데, 3시간 가까이 혹사당한 다리가 도저히 움직이질 않아 주저 앉았다고 푸념. 그러나 행복한 피로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정민승 인턴기자

박소현 인턴기자


입력시간 : 2004-08-05 16:08


정민승 인턴기자 prufrock@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