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통합 위한 '한국적 길' 닦아야실용주의적 패러다임으로 이념적 양극화 제어할 '역사적 대타협' 필요한 때

기고-우리 현실에 맞는 이념구도에 대해
[중도, 세상 속으로] 사회통합 위한 '한국적 길' 닦아야
실용주의적 패러다임으로 이념적 양극화 제어할 '역사적 대타협' 필요한 때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이념 논쟁이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이른바 ‘486 세대’들이 제기한 뉴라이트(New Right)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은 수구 보수와 수구 진보를 모두 비판하고 합리적 보수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해 이념 논쟁에 새로운 불을 지폈다. 이에 좌파 진영은 뉴 라이트가 ‘미국의 네오콘’ 또는 ‘일본의 극우 세력’을 연상케 한다는 반비판으로 대응함으로써 맞불을 놓은 상태다.

현재 진행형인 이 논쟁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는 미지수다. 좌파들이 비판하듯이 뉴 라이트는 올드 라이트(Old Right)와의 차별성이 모호하고 그 정책 대안 역시 구체적이지 않다. 게다가 노무현 정부가 좌파적이라는 비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뉴 라이트의 등장에 긍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보수와 진보가 함께 가는 게 민주주의라면, 합리적 우파의 등장을 애써 외면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히려 이념에 있다기 보다는 현실에 있다. 그리고 이 현실은 대격변의 한가운데에 있다. 과연 우리 현실에 적합한 이념 구도는 어떤 것인가. 이념 논쟁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어야 하는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자유주의든, 사회민주주의든 정치 이념들은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라 수입된 것이며, 바로 이 점에서 최근 서구의 경험을 돌아 볼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 등장과 좌파의 대응
어떤 이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놓인 사회 구조와 무관할 수는 없다. 서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난 30년간 세계화의 증대와 정보 사회의 도래는 기존 좌파와 우파의 구도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먼저 변화를 모색한 그룹은 우파로, 이들은 사회민주주의가 주도한 복지 국가의 실패와 이에 따른 시장의 복권을 강조한 신자유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규제 완화, 재정 긴축, 민영화, 국내 시장의 완전 개방, 그리고 노동 시장의 유연화 등은 바로 신자유주의의 주요 정책 목록을 이룬다.

이 신자유주의는 미국의 레이건 정부, 영국의 대처 정부, 독일의 콜 정부 등 우파가 재집권하는 데 정책 이념을 제공했으며, 특히 90년대에 들어와서는 금융자본의 세계화 물결과 함께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었다. ‘대안이 없다’는 좌파들의 개탄은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가 갖는 위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보수단체 회원드이 광화문에 모여 '4대입법 저지 국민행동대회'를 갖고 국가보안법 사수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김주성 기자

신자유주의에 대한 좌파의 대응이 바로 ‘제3의 길’이다. 역사적으로 ‘제3의 길’은 여러 유형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과거의 ‘제3의 길’과 90년대 중반에 등장한 ‘제3의 길’은 적잖이 다르다. 과거의 ‘제3의 길’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넘어 서려는 전략이라면, 90년대 ‘제3의 길’은 사회민주주의(구 좌파)의 ‘제1의 길’과 신자유주의(신우파)의 ‘제2의 길’을 넘어 서려는 기획이다.

‘제1의 길’에 대해서는 시장의 효율성을 강조하고, ‘제2의 길’에 대해서는 사회적 평등을 부각시키는 전략이 새로운 ‘제3의 길’의 핵심을 이룬다. 영국의 블레어 정부, 프랑스의 조스팽 정부, 독일의 슈뢰더 정부는 넓은 의미의‘제3의 길’을 내세워 좌파의 재집권에 성공했으며, 미국의 클린턴 정부도 크게 보면 이 범주에 속한다.

서구의 이런 이념 구도가 보여주는 특징은 두 가지다. 첫째, 좌파와 우파간의 이념적 경계가 갈수록 희미해 지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세계화의 증대가 시장을 특권화하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둘째, 바로 이런 맥락에서 신 중도(new middle) 또는 급진적 중도(radical middle)를 표방한 ‘제3의 길’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제3의 길’에는 여러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영국의 ‘시장 지향 모델’, 네덜란드의 ‘시장과 합의 지향 모델’, 스웨덴의 ‘개혁 복지국가 모델’, 프랑스의 ‘국가 주도 모델’ 등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를 결합하려는 흐름이 대세를 이뤄가고 있다.


다양해지는 이념의 잣대
우리 사회에서 이념의 구분 기준은 서구 사회와 사뭇 다르다. 서구의 경우 국가와 시장, 성장과 분배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가 핵심 기준이었다면, 우리의 경우에는 한미 관계와 남북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가 주요 기준이었다.

하지만 최근 이런 이념 구도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먼저 1990년대 IMF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 구조 조정을 겪으면서 서구적 기준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대체로 우파가 시장, 성장, 전통을 중시한다면 좌파는 정부, 분배, 변화에 무게 중심을 둔다.

더불어 이런 이념 구도에 또 하나의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세계화의 충격이다. 세계화는 민족주의에 맞서는 세계주의(globalism)를 강조함으로써 기존 좌파와 우파의 이념구도를 다시 양분해 왔다. 구체적으로 우파의 경우 그것은 구 보수와 신 보수간의 긴장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최근 논란이 되는 뉴 라이트는 신 보수를 표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좌파의 경우 이념 분화는 ‘개혁 세력’과 ‘진보 세력’의 분화로 나타나고 있으며, 정치 사회 내에서는 열린우리당 내 좌파 그룹과 민주노동당이 두 세력을 각각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변화가 함축하는 바는 우리의 이념 구도가 더 이상 좌파와 우파의 이분법으로만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현재 이념 지형은 한미 관계, 남북 관계, 국가와 시장, 성장과 분배 등 여러 기준들이 교차됨으로써 복합적 구도로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전통적인 좌파 대(對) 우파의 구도로 파악하기 어려운 이슈들 또한 증가하고 있다.

시장 개방을 요구하는 자유무역협정(FTA)를 어떻게 할 것인가, 원자력을 개발할 것인가 말 것인가, 지방 분권과 국가 균형 발전을 어디까지 할 것인가 등의 문제는 좌파 대 우파의 구도를 넘어서는 이슈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제3의 길'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 소속 회원들이 집회를 갖고 "국가보안법은 통일을 가로막는 반민족 악법"이라며 즉각 폐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 류효진 기자
바로 여기에 한국식 ‘제3의 길’이 갖는 의의가 있다. ‘제3의 길’은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시장의 활력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복지 정책을 동시에 제고하려는 전략이다. 아울러 양성 평등과 생태 보호 등을 포함한 ‘생활 정치’를 적극 껴안으려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이 전략은 보수와 진보를 평균적으로 절충하는 게 아니라 생산적으로 종합하며, 두 이념 및 정책의 결합에서 나오는 시너지 효과를 높이려는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현실에서 성장과 분배, 혁신과 통합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하기란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또 그 프로그램이 우리 현실에 과연 얼마나 적실성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도 있다.

서구 사회와 달리 우리 사회는 현재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여전히 분단 체제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렵다고 해서 과거 박정희식 개발 독재 모델로 회귀하거나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일방적으로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

개발 독재는 이미 낡은 모델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이라 할 수 있는 부정 부패, 신뢰 위기, 생태계 파괴 등은 바로 그 개발 독재 모델이 낳은 부메랑이다. 더불어 신자유주의도 소망스런 전략이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 위기 이후 소득 분배의 악화, 사회 통합의 약화는 바로 신자유주의 구조 조정이 가져온 직접적인 결과들이다.

성장의 엔진이 멈춰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소수만을 위한 성장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성장을 위한 경제 정책과 통합을 위한 사회 정책이 함께 가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는 한국적 ‘제3의 길’을 요청하고 있다.

요컨대 현재 한국사회 발전 패러다임은 좀 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이 실용주의는 세계화 시대에 성장 동력을 확충하고 사회적 양극화를 제어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서 좌파와 우파, 자본과 노동, 사회적 강자와 사회적 약자 간의 ‘역사적 대타협’이 요청된다. 좌파와 우파간의 생산적인 경쟁과 협력을 매개하고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에 바로 ‘제3의 길’의 과제가 놓여 있을 것이다.


생산적인 이념 및 정책논쟁 필요
좌파와 우파, 그리고 ‘제3의 길’이 생산적인 긴장을 이루기 위한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 이념과 이와 연관된 정책 논쟁을 부정적인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때로는 이슈를 예각화하고 대안 경쟁을 강화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며, 그 속에서 새로운 비전을 발견할 수 있다.

다양성과 복합성의 증대가 현재 우리 사회가 갖는 특징이라면 문제를 해결하는 처방을 어느 한 이념이 독점하기 어렵다. 민주주의를 둘러싼 수많은 의제들에 대해서 좌파적, 우파적, 중도적 대안의 차이는 존재하며, 이들 사이의 생산적인 이념 및 정책 논쟁은 민주주의를 풍요럽게 하고 성숙시킬 수 있다.

둘째, 언론과 정치권의 역할이 중요하다. 언론은 특정한 이념적 지향을 선택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공공적 특성을 고려해 이념 및 정책 논쟁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다뤄야 한다. 이념 논쟁에 편승해 특정 이념 내지 정파를 일방적으로 옹호하고 다른 이념 내지 정파를 과도하게 비판하는 것은 언론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더불어 정치권의 변화도 요구된다. 정치의 본질은 모름지기 합리적인 정책 경쟁에 있다. 대화와 타협을 존중하되 정책 대안에 있어서는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할 때 우리 민주주의는 업그레이드할 것이다.

입력시간 : 2004-12-08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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