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문 나서면 온갖 게임기가 유혹사행심 조장하는 어른들의 부도덕문방구·게임 기업자 나눠먹기 시스템

[10대 도박중독] 동심, 게임에 점령당하다
학교문 나서면 온갖 게임기가 유혹
사행심 조장하는 어른들의 부도덕
문방구·게임 기업자 나눠먹기 시스템


유난히 포근했던 3월 초순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I 초등학교 정문앞. 목 좋은 곳에 자리잡은 문방구 앞은 하굣길의 학생들로 장사진이다. 학생들은 그러나 학용품을 구입하려는 것도, 다른 볼 일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8~9일 집으로 바삐 가던 동심을 붙든 것은 같은 학교 친구가 터뜨린 ‘잭팟’이었다. ‘탑블레이드 – 학습 카드 자동 판매기’라는 이름의 오락기에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두 개의 버튼을 10초 동안 열심히 눌러 댄 결과, 1만원을 호가하는 컴퓨터 게임 CD(3등)를 탔기 때문이었다. 이 밖에도 2등에게는 RC(무선 조종)자동차, 1등에게는 휴대용 고급 게임기를 상품으로 지급한다고 상단에 적혀 있었다. 대박의 주인공과 친구 몇몇은 잠시 후 “학원 시간이 다 됐다” 유유히 사라졌지만, 시간은 남은 무리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서성댔다.

주택가와 상가 사이에 자리 잡은 인근의 또 다른 K 초등학교. 이 초등학교 주변의 문구점, 슈퍼, 비디오ㆍ도서 대여점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게 앞에 두 대씩 설치된 미니 오락기도 커다란 책 가방을 둘러 맨 초등학생들의 차지였다. 두 대 중 한 대는 ‘파이터’ 게임기, 또 다른 한 대는 오락의 기능기로 명명하기엔 어딘지 부족해 보이는 ‘경품오락기’가 각각의 가게 앞에 짝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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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구 오락기 앞에 장사진
동심을 사행심으로 물들이기에 충분해 보이는 오락기들은 ‘탑블레이드’ 외에도 다양했다. 100원을 넣고 버튼을 누른 뒤 가위 바위 보를 해 이겼을 경우 최고 2,000원 상당의 물건을 교환할 수 있는 구슬이나 코인을 토해 내는 ‘가위바위보’, 빠르게 돌아가는 바늘을 세운 뒤 바늘이 가리키는 숫자 만큼의 과자를 교환하거나 다시 게임에 사용할 수 있는 메달(게임 코인)이 나오는 ‘시계판’, 성인오락실의 파친코를 닮은 ‘777’ 등 ‘도박기’로 불러도 손색없을 오락기가 즐비했다.

“제 친구들은 여기서 3,000원짜리 ‘배틀 비드맨(구슬 게임기)’이랑 ‘마술 상자(마술쇼 소품 상자)’도 타고 그랬는데, 저는 ‘호롱불 열쇠 고리’ ‘꼬마 새총’밖에 못 탔어요.” 한 문구점 앞의 ‘777’오락기에서 ‘파리도 못 잡는’ 꼬마새총을 경품으로 받은 윤정원(가명ㆍ초등4)군의 말이다. 윤 군은 “돈 많은 애들은 하루에도 5,000원씩 이 오락을 하는 데 쓴다. 지난 여름에는 밤 8~9시까지도 이 게임을 하기위해 줄을 선 적도 있다”며 경품 오락기에 대한 초등학생들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틀 뒤 서울 성북구의 D초등학교 근처. 이 곳의 문구점, 슈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추운 날씨 때문에 자연스럽게 길거리 오락은 안 하게 됐는데, 날씨가 풀리면서 문방구, 슈퍼에 들리면 그리고 길가다가도 주머니에 돌아다니는 100원짜리가 있으면 (경품)오락기에 동전을 넣는다”는 한 D초등학교의 이민기(가명ㆍ초등5) 군은 “이번 새 학기에 필요한 연필을 모두 여기서 탄 메달로 교환했을 친구도 있을 정도“라며 “심심풀이용으로 이만한 게 없다”고 자랑했다.

어린이들의 사행심을 미끼로 코묻은 돈을 울궈내는 문방구나, 슈퍼 앞의 오락기들은 어른들의 철저한 나눠먹기 시스템으로 운용된다. 오랜 설득끝에 홍제동의 한 문구점 주인이 그 구조에 대해 말했다. 그는 “(일반 게임용 오락기의 경우) 업자들이 오락기의 프로그램 업그레이드와 기기 관리를 맡고, 가게 주인들은 자리와 전원을 무상 공급하는 것으로 운영된다”면서 “여기서 발생하는 수입은 절반씩 나눈다”고 말했다. “경품 오락기의 경우, 가게에서 잘 팔리지 않는 재고 물건이나 과자를 처리하는 수단으로 쓰기도 한다”는 것. 재고품까지 처리해 준다니, 그야말로 꿩먹고 알 먹고인 셈이다.

생활지도·법령정비 시급
가게 앞에 설치된 두 대의 게임기가 올리는 월 매출은 ?좋은 곳이 50만원, 일반 주택가의 경우 20만원에 이른다는 것이 오락기를 공급하고 있는 업자 H씨(42)의 설명이다. 월세를 내야 하는 처지의 가게 주인들이라면 쉽게 내칠 수 없는 벌이라는 손익 계산까지 들려 준다.

현행 음반비디오물및게임에관한법률 시행령, 싱글로케이션 제도(일반 영업소에 게임기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한 제도)는 △배팅 기능 또는 경품 제공 기능이 없어야 하고 △한 영업소에 2대 이하로 설치해야 하며 △설치 장소는 영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설의 내부를 원칙으로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빛좋은 개살구라는 것이 현장의 전언이다.

흥사단 본부 이영일(35) 부장은 “당국은 어린이들이 학교 앞 문방구에 설치된 자동 판매기 또는 이와 유사한 경품오락기 등에 대해 사행심 조장 방지 차원에서 생활 지도를 강화할 필요가 있으나, 명목뿐”이라면서 “보건법에 의거, 학교 환경 위생 정화 구역내에 위치한 학교 주변의 유해 업소에 대해 수시로 점검과 계도를 펼쳐 불법 사항이 지속될 경우 교육청 또는 유관 기간에 고발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흥사단은 2003년부터 전국의 시민 단체들과 연대해 도박 산업 규제 및 개선을 위한 운동을 펼쳐 오고 있다.

정민승 기자


입력시간 : 2005-03-17 16:49


정민승 기자 msj@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