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에 휩싸인 '경제 민족주의'잇따른 규제성 조치에 외국인 투자자·외국 언론 비판의 목소리정부 '국내·외자 동일 대우' 천명 불구, 논란 재연 소지 여전
[외국계 자본, 약? 독?] 외국계 자본에 족쇄 채우나? 논란에 휩싸인 '경제 민족주의' 잇따른 규제성 조치에 외국인 투자자·외국 언론 비판의 목소리 정부 '국내·외자 동일 대우' 천명 불구, 논란 재연 소지 여전
한국 경제가 때아닌 민족주의, 국수주의 논란에 휩싸였다. 최근 외국계 자본에 대한 규제성 조치가 잇따르면서 촉발된 일이다. 물밑에서는 외국인들의 볼멘소리가 들리고 외국 언론은 이들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듯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영국의 경제전문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FT)’는 논란의 불씨를 지핀 장본인 격이다. 이 신문은 틈만 보이면 우리 정부와 여론을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지면서 한국 때리기의 선봉을 자임하는 모습이다. FT는 3월 31일 최근 한국 정부가 ‘5%룰’(상장 기업의 지분을 5% 이상 보유할 경우 지분 매입 목적 등을 보고하도록 의무화한 제도)을 강화한 데 대해 직격탄을 날린 바 있다. 소버린이나 뉴브리지캐피탈 등 일부 외국계 자본에 대한 여론의 반감이 고조되자 한국 정부가 이에 대한 통제적 정책을 펼치고 나섰다는 것이었다. 이 신문은 동북아 금융 허브를 지향한다는 한국 정부가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은 ‘경제 민족주의’이자 ‘정신 분열적인 태도’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국부유출론 등으로 외국 언론에 빌미 제공 FT는 세계 3대 신문의 하나로 꼽힐 만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유력 일간지다. 세계 50여 개 주요 도시에 포진한 수백 명의 필진이 쏟아내는 기사는 100개가 넘는 국가에서 읽혀지고 있다.
국제적 영향력이 큰 신문이다 보니 한국 정부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지난달 31일자 ‘5%룰’ 관련 보도에 대해서 사실과 다르다며 반론 보도문 게재를 요구한 것은 그런 까닭이다. 사실 ‘5%룰’과 ‘은행의 외국인 이사 수’와 관련한 최근 정부 조치에 대해 전문가들의 견해는 별 문제가 없다는 쪽이 대세다. 5%룰의 경우 오히려 주요 선진국에 비해 아직도 약하다는 지적이다. 미국과 비교해 보면 주식 취득 후 의결권을 제한하는 냉각 기간도 훨씬 짧을 뿐더러 보고해야 할 내용도 단출하다. 더욱이 보고 의무를 위반했을 때의 벌칙 조항도 ‘1년 이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 벌금’으로 사실상 솜방망이 수준이다. 은행의 외국인 이사 수 제한 역시 금융 선진국들 대다수가 시행 중인 제도다. 미국의 경우 은행 이사에 대해 임기 중 시민권 보유, 선임 1년 전부터 국내 거주 등의 엄격한 자격 요건을 두고 있다. FT 본사가 있는 영국도 마찬가지로 자국 鳧?산업의 보호에 어느 나라보다 열성이다. 영국에 진출한 외국 금융기관은 3명 이상의 이사진 가운데 반드시 1명 이상을 영국 국적자로 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런던 금융 중심가에 근무하는 고위 임직원의 80% 이상이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정통 앵글로색슨(영국인의 중심을 이루는 민족)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FT는 왜 한국 정부의 조치에만 ??딴죽을 거는 것일까.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을 겨냥한 FT의 최근 보도 행태에 어떤 ‘저의’가 깔려 있지 않느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와 관련, 한 경제 전문가는 “최근 한국 정부의 조치들은 글로벌 기준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민족주의 운운하는 파이낸셜 타임스의 보도는 이해하기 어렵다”며 “영국 등 일부 외국계 자본의 이해 관계를 반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반면 최근 부쩍 거세진 국내의 반(反)외국인 기류가 FT 등 외국 언론에 꼬투리를 제공했다는 시각도 있다. 사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소버린, 헤르메스, 뉴브리지캐피탈, 골드만삭스 등이 잇달아 ‘국부(國富) 유출’ 논란을 일으키면서 정치권의 대응이 외국계 투기 자본에 대한 규제 쪽으로 흘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지난 2월 청와대 경제보좌관실에서는 ‘투기성 외국자본 유입의 영향과 대응 방향’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노무현 대통령에게 제출한 바 있고, 윤증현 금감위장과 이주성 국세청장 등 ‘칼자루’를 쥔 고위 당국자들은 외국계 자본의 시장 교란 행위나 탈세를 엄정하게 다루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국회에서도 외국계 자본을 규제하기 위해 은행법이나 외국인투자촉진법 등을 개정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었다.
이런 일련의 흐름이 외국인들의 경계심을 자극했을 소지는 충분해 보인다. 게다가 일부 외국계 자본에 대한 국세청 세무조사가 전격 실행되면서 ‘경제 민족주의’ 논란은 더욱 불 붙는 형국이다. 한 외국계 펀드의 전직 임원은 이와 관련해 “정부의 최근 조치는 투기 자본에 대한 반대 여론을 반영한 측면이 짙다”며 “세무조사를 할 수는 있지만 방법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또 “건전한 다른 외국 자본들에게도 불안감을 전염시키는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외국게 자본 이탈 땐 경제에 상당한 타격 박종근 국회 재정경제위원장도 “외국 자본이라고 하더라도 국세청에서 조사할 게 있으면 할 수 있지만 어떤 정책적인 의지나 판단이 개입된 것처럼 비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며 정부의 신중한 대응을 촉구했다. 그렇다면 외국계 자본에 대해 ‘확 달라진’ 정부의 태도를 어떻게 봐야 할까. 일단 고위 당국자들은 최근의 경제 민족주의 논쟁에 마침표를 찍으려는 듯 국내 자본이든 외국 자본이든 똑같이 대하겠다는 원칙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인식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외국인투자촉진법 개정안을 발의했던 한 의원의 보좌관은 “외국계 자본에 대한 여권의 정책 기조가 적대적으로 바뀐 것으로 보는 시각은 적절치 않다”며 “외환 위기 이후 절박한 국내 사정 때문에 하지 못했던 규제를 이제 하자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실의 임수강 보좌관도 “일부 외국 언론이 국수주의라는 얘기를 하지만 한국의 자본 시장 개방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평균을 넘어선다”며 “글로벌 스탠더드로 맞추기 위해서는 외국 자본에 대한 규제 정도를 오히려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 역시 한국 정부의 외국계 자본 정책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용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IMF 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자본 시장 개방과 규제 완화 정도는 과도한 수준이었다”면서 “이제야 문제 의식을 갖고 공정한 룰을 만들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 게 아닌가 여겨진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규제 강화가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을 나타내기도 한다. 정종남 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국장은 “국세청의 세무조사는 일부 외국계 펀드에 국한돼 있다”며 “이렇다 할 소득이 없을 경우 자칫 투기 자본들에 대해 면죄부만 주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한편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을 비롯해 스탠다드차타드은행(SCB), 뉴브리지캐피탈 등은 최근 한국 정부의 ‘국내ㆍ외 자본 동일 대우’ 방침에 대해 잇달아 수용 의사를 밝혀, 민족주의 논란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분위穗? 하지?향후 정부의 정책 방향이나 국세청 세무조사 결과에 따라 언제든지 재연될 소지는 남아 있다. 손해를 감수하고 투자할 외국 자본은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입력시간 : 2005-04-27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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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