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적 생활패턴으로의 긍정적 변화 실감, 교육전문가 다 된 엄마
[가정의 달 특집] "TV를 끄니 자녀교육이 보이네요" 계획적 생활패턴으로의 긍정적 변화 실감, 교육전문가 다 된 엄마
“세상에서 제일 힘든 직업이 엄마인 것 같아요.” 집에서 TV를 끈 지 8개월째인 세 사내아이의 엄마 이경임(36ㆍ서울 용산구 청파동) 씨의 자부심 섞인 푸념이다. 틈만 나면 TV 앞에서 혼을 빼는 아이들에게 TV보다 나은 오락거리며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자니 고민거리가 많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이들이 심심하면 책을 찾고 종이접기 등 학습 습관이 붙는 놀이에 관심을 갖는 것을 볼 땐 8개월 전 ‘결행’이 스스로 대견스럽기만 하다. TV를 끄기 전 전업주부인 이씨는 ‘악동들’(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 아이와 유아원생 둘)과 하루 하루를 전쟁 치르듯 보냈다. 은행에 다니는 남편(박노식ㆍ36)의 귀가는 대개 아이들이 잠든 후다. 같이 사는 친정 어머니가 집안 살림을 도와 주기는 하지만 항상 힘에 부쳤다. 그래서 지치고 피곤할 땐 애들을 모아놓고 TV를 켰다. TV 앞에선 싸움도 멈췄고 놀랍도록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TV를 볼 때 엄마가 말을 걸면 짜증을 낼 정도였다. 엄마의 존재가 필요 없는 시간이 됐다. TV는 편안한 시간을 보장하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러나 평화는 잠깐 뿐. 가장 큰 문제는 한 번 켜면 쉽게 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TV 앞으로 몰려들고, 얼마 지나면 채널 다툼에 우는 놈이 생긴다. ‘TV 그만 보라’는 엄마의 목청이 덩달아 높아지는 건 당연지사다. TV 앞 휴식과 전쟁이 반복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여느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이 씨의 최대 관심사는 교육이다. 그런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데, 어느날 갑자기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는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익히는 데 중점을 두고 있지만, 지금 하는 것은 그 반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아들 셋 모두를 보낸 숙명여자대학교 부설 숙명유아원이 펼친 ‘1주일 간 TV 안 보기’에 주변의 권유로 참여했다. 처음엔 큰 기대 없이 다만 얘들이 잘 따를까 걱정을 했지만 별 저항 없이 그런대로 넘어갔다. 남편 도움도 컸다. 주말에 함께 산책을 가 ‘TV의 안 보기 체험’의 의미를 아이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남편의 몫이었다.
부족감 느끼며 스스로 공부하는 부모로 아이들과 함께 독서와 만들기 등 오락거리를 찾으면서 부모로서 부족함을 느끼게 됐고,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해 인근 도서관도 찾게 됐다. 가족 생활 자체에 긍정적인 변화가 왔다. TV 안 보기 체험 후 이 씨는 먼저 리모컨을 던져 버렸다. TV 보기를 어렵게 하기 위한 1단계 작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별 효과가 없었다. 말이 TV를 가려서 보고, 절제해서 보는 것이지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켜 놓기가 다반사였다. ‘어른들도 이러한데 아이들은…’에 생각이 이르자 결단을 내렸고, 지난해 10월 마침내 실행에 옮겼다. 거실 상석에 버티고 있던 TV를 외조부모 방으로 옮겼다. 아이들에게는 TV가 고장나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아직 TV에 덜 중독된 탓인지 TV 보자며 심하게 조르는 아이는 없었다. 이제 TV는 할아버지, 할머니만 볼 수 있게 됐다. TV가 있던 자리에 놀이 탁자를 놓고 방에 있던 큰 아이의 책상을 거실로 옮겼다. 거실 바닥에는 세계 지도를 딱하니 깔았다. TV를 치우니 공간도 꽤 넓沮側?집안 분위기가 달라졌다. 무엇보다 집안이 학습과 놀이 중심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TV 치우기는 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예전에는 되는대로 하루를 보냈으나 이제는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 특히 아예 TV를 안 보는 주말에는 왜 그렇게 하루가 긴지 며칠전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계획을 짜다 보니 당연히 남편과 풍灼構?돼 자연스레 대화도 늘었다. 예전에는 서로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제는 ‘건설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해 대화 자체를 즐기게 됐다. 또 공연 할인권 같은 것도 예사로 보아 넘기지 않게 되는 등 각종 형식의 문화를 직접 접하는 기회도 늘었다. 전에 비해 돈이 조금 많이 들지만, 얻는 것에 비하면 얼마든지 감수할 정도다.
익숙해진 책읽기, TV 중심에서 벗어나 이 씨는 무엇보다 아이들 학습 습관이 제자리를 잡아 가는 모습에 대만족이다.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큰 아들 성빈이는 책 읽는 습관이 붙었고, 책상에 앉아 훨씬 오래 버티게 됐다. 또 수첩을 들고 다니며 시도 때도 없이 무얼 적는다. 기록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동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통솔력도 생겼다. 조그만 일에도 다투었던 것에서 벗어났다. 의젓해진 것이다. 이 씨는 거의 매일 아이들과 함께 ‘TV 안 보기’를 실천하고 있는 가족들이 모이는 효창공원에 간다. 그곳에서 서로 애들 교육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등 온갖 이야기를 나눈다. 가족 단위의 동아리 활동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까지 생활에 활력과 리듬이 붙었다. 요즘 이 씨는 도서관족(族)이 됐다. 애들 책은 물론이고 자신의 읽을 거리를 찾아 동네 교회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을 일주일에 두세 차례 찾는다. TV를 안 보면 인기 드라마가 화제에 오르는 모임에서 소외감을 느끼거나 큰 사건의 실시간 정보가 궁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 씨의 생각은 의외로 간단하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 궁금하면 신문 읽고 인터넷 보면 되고, 드라마에 괜히 애간장 녹일 일 없다는 것이다. 큰 아들에게 커서 어떤 일을 하고 싶냐고 하자 대뜸 “건축가”라고 대답한다. 집 없는 사람에게 집도 지어주고, 엄마에게도 큰 집을 선사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다. 엄마와 스킨십이 많다 보니 보다 넓은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고픈 엄마의 속내를 벌써 읽었나 보다. TV 안 보기 시민모임(대표 서영숙 숙명여대 교수)은 지난주(5월2일~8일)를 전국 TV 안보기 주간으로 정했다. TV를 껐더니 벌써 교육이, 가족이, 인생이 보였다는 반응이 줄을 잇는단다. 일단 TV를 끄고 1주일만 버텨보면 느낌이 온다는 것이다.
입력시간 : 2005-05-12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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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