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치있는 보행로와 품격의 자존심의 패션·음식점, 기분좋은 '명소 찾기'

[광화문 르네상스] 골목길 돌면, 멋과 맛의 향기 가득
운치있는 보행로와 품격의 자존심의 패션·음식점, 기분좋은 '명소 찾기'

1970~80년대 ‘아베크 족’들의 주무대였던 서울 종로 북촌의 인기가 시들해지는가 싶더니 다시금 젊은이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여기에 맞춰 예전에는 찾아 볼 수 없던 옷 가게들이 속속 생기고 있고, 색다른 음식점들의 수도 요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청계천 복원과 함께 광화문 일대가 걷고 싶은 길, 도심 속의 산책로로 요란스럽게 변하고 있다면 이곳 북촌의 변화는 조용하게 진행되는 편이다. 주택으로 사용되던 한옥의 내부를 리모델링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가게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건물 외양은 그대로 둔 채, 내부에 손을 대는 방식이어서 조용할 뿐,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는 북촌이다.

고작 왕복 2차선의 도로에 거주자들의 차도 겨우 댈 수 있을 정도의 주차공간에다, 뜸하게 다니는 마을버스. 접근하기에 결코 용이하지 않은 이곳을 20~30분씩 발품을 팔아가며 사람들이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복궁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플라타너스를 낀 운치 있는 보행로와, 여름에는 장미로 붉게 물드는 기무사의 담벽, 그리고 청와대 앞길ㆍ삼청파출소를 지나 총리공관ㆍ삼청공원으로 이어지는 왕복 1시간 정도 걸리는 아름다운 산책로를 걷다 보면 그 이유를 금세 알 수 있다.

바로 역사와 문화, 낭만과 사색이 어우러진 분위기 때문이다. 서울의 웬만한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한국의 파리’를 보는 듯한 느낌과, 인사동의 높은 임대료 압박에 떠밀리다시피 옮겨온 갤러리도 행인 유인에 한몫 한다는 평가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은 ‘서울 한복판의 다른 도시’, ‘가장 한국적인 동네’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급 레스토랑과 패션몰이 변화 주도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의미의 북촌(north village)은 삼청동, 원서동, 재동, 계동, 가회동, 사간동, 안국동, 인사동을 아우르는 지명. 전통 한옥군과 오밀조밀한 골목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600년 역사도시의 모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3~4년 전부터 고급 레스토랑들이 이곳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콰이민스 테이블’, ‘뺑&빵’, ‘로마네 꽁띠’ 등 이름부터 현대적인 업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전통과의 대립보다는 공존을 모색해 가는 중이다.

삼청동길 맨 위쪽에 자리잡은 ‘콰이민스 테이블’은 와인과 파스타를 메인 메뉴로 1년 전에 문을 연 레스토랑. 이곳 지배인 박인찬(30) 씨는 “손님의 90%이상이 20대 여성들”이라며 전통과 현대 그리고 그 속에서 여유와 활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점이 북촌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삼청동길에는 식도락가들에게 많이 알려진 터줏대감 격의 음식점도 많다. ‘눈나무집’, ‘온마을’, ‘용수산’,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 등 손으로 꼽기 힘들 정도다. 이들 오래된 업소들은 서구적 형태의 식당들이 잇달아 문을 여는 것에 대해 기대반, 우려반의 시각을 보이고 있다. 북촌의 전통적인 분위기가 훼손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과 함께 이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도약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기대를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다.

30년전 삼청동길에서 한옥 이발소를 인수해 문을 연 한방찻집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을 지금까지 운영해 오고 있는 김은숙(66) 사장은 “25년 전만 하더라도 북촌에는 이 찻집 하나와, 맞은 편의 분식집 하나가 전부였다”면서 “지금 같은 분위기가 일기 시작한 것은 불과 3~4년 밖에 안됐다”고 증언했다. 김 사장은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업소가 늘어나면서 이 지역이 새롭게 태어나는 느낌’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오래된 찻집과는 별개로 ‘어린왕자’ 등의 커피하우스를 비롯 삼청동길 중간중간에 테이크아웃 커피점도 잇달아 등장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것은 그만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젊은 여성들이 자주 찾는 곳에 패션몰이 빠질 리 없다. 삼청동길 주변에 15여 군데의 앤티크, 빈티지 패션 몰이 들어선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가게 내부의 마감재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고 있을 정도다. 자체 디자인, 자체 제작한 옷과 신발을 판매하고 있는 ‘디오지나’가 이번 달 말에 개업 7주년을 맞는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옷ㆍ액세서리 가게들은 길어야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대부분이 지난해 말, 올 초에 생긴 것들이다.

수제 패션액세서리, 값도 저렴
이 곳 상점들의 특징은 ‘한 가지 사물에 한 가지의 정확한 표현이 있다’는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에 비견될 정도다. 즉, ‘하나의 사이즈에, 한 가지 색상, 한 가지 디자인’으로 나온 제품들만 판매하고 있다. 생긴 지 한 달을 갓 넘긴 ‘융’ 등 주변의 옷 가게들 대부분이 물건을 떼다 파는 형식이 아니라, 이 분야를 전공한 사장이 직접 디자인하고 자체 염색, 제작한 제품들이다. 가격도 백화점에 비해 저렴한 편이어서 희소성이라는 가치 외에도 경제성까지 겸비하고 있다.

옷을 사기 위해 9일 이 곳을 찾은 대학원생 김경민(25ㆍ서울 돈암동) 씨는 “강남동, 압구정동이 허영을 떠는 분위기라면 북촌은 잔잔하고 들뜨지 않아 분위기는 즐기고 실속은 챙길 수 있는 곳”이라고 이 지역에 속속 등장하고 있는 옷, 액세서리 가게들을 평가했다.

강남 갤러리아 백화점의 명품관에 입점해 있는 고급 신발 브랜드 ‘향’의 북촌 진출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북촌을 찾는 이들의 상당수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시장 분석 결과에 따른 결정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서 17년째 거주하고 있는 김인종(39ㆍ서울 소격동) 씨는 “전통과 현대의 모습이 공존하며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북촌이 강남의 분위기를 닮아 가는 것 같다”며 염려하기도 했다.

남촌(남산골)과 달리 종친이나 사대부 등 이른바 ‘잘나가는’ 고관대작들이 모여 살았다는 선비의 마을, 북촌. 서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을 찾으려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북촌이 점잔을 털어내고 있다.


정민승 기자


입력시간 : 2005-06-16 16:34


정민승 기자 msj@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