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투기와의 전쟁' 비웃는 투기꾼, 수법 날로 지능화·고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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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투기 공화국]
정부 '투기와의 전쟁' 비웃는 투기꾼, 수법 날로 지능화·고도화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공기업에서 고위 간부로 일하다 2000년 무렵 명예 퇴직한 50대 후반의 김모 씨. 30년 가까이 재직한 직장을 떠날 때 손에 쥐고 있던 재산은 아파트와 퇴직금 등을 합쳐 대략 6억 원대였다. 오로지 회사 일밖에 몰랐던 그는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이 돈을 어떻게 관리해야 노후를 편안히 보낼 수 있을까.

며칠을 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은 부동산. 1980년대 초 서울 강남구 개포동 주공 아파트에 처음 둥지를 튼 뒤 20년 이상 강남에서 살아오며 ‘부동산 불패’ 신화를 직접 체험했기에 어쩌면 자연스런 대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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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놓기만 하면 세 배·네 배로 폭등
김 씨는 우선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딴 뒤 중개업소를 차렸다. 특유의 꼼꼼함으로 단골 고객도 많이 확보했다. 그러는 동안 부동산으로 대박을 터뜨린 사례를 자주 접하게 되면서 스스로 부동산 투자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후는 순풍에 돛 단 형국. 때마침 불어 닥친 강남 부동산 열풍을 타고 재산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그가 쌓아올린 부(富)는 무려 50억 원대. 열 배 가까운 수익률이다.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너무나 손쉽게 돈 버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그 사람들의 요령을 조금씩 따라 하다 보니 저도 어느새 큰 돈을 번 것이죠. 우쭐한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가끔은 나라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김 씨의 사례가 아주 특이한 것은 아니다. 강남에 가보면 몇 년 사이 집 값이 두 배로 올랐다며 미소 짓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노른자위 지역에 아파트 몇 채 사 놓으면 금세 재산이 세 배, 네 배로 불어난다. 거액의 은행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구입해도 이자가 하나도 무섭지 않을 만큼 집 값은 폭등했다.

문제는 이런 기현상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법과 제도 때문에 그대로 용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부동산 대박일수록 오히려 더욱 짙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 온 나라가 서민, 중산층, 부자 가리지 않고 부동산 타령을 하는 ‘투기 공화국’으로 변했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통하는 사회. 그럴수록 불법과 편법도 판을 치게 된다. 온갖 종류의 투기꾼들이 양산되는 것도 부동산 광풍의 부산물에 다름 아니다. 견디다 못한 정부는 얼마 전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투기를 ‘사회적 범죄’, ‘사회적 암’으로까지 규정하며 관계 당국 간 연합 공세에 나섰다.

성공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현 정부는 지금껏 수도 없이 많은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지만 별 효력이 없었다. 투기꾼들에게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부동산 가격의 폭등을 초래하는 역효과를 내기도 했다. 부동산에 관한 한, 정부가 엉금엉금 긴다면 투기꾼들은 날아 다닌 셈이다. 간혹 당국에 적발되는 투기꾼들의 교묘한 수법은 이 같은 실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국세청은 지난 6월 말부터 이른바 ‘기획부동산’ 업체들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 조사에 착수했다. 기획부동산 업체는 투기적 가수요를 부추겨 토지ㆍ주택 가격을 끌어올리는 부동산 투기 세력의 핵심으로 꼽힌다. 이들은 주로 서울 강남 테헤란로 주변의 고급 빌딩에 사무실을 차리고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는 게 국세청의 분석이다.

A사의 사례를 보자. 이 회사는 경기 용인 등 개발 예상 지역의 임야 13필지(5만5,000여 평)를 121억원에 사들였다가 취득 원가의 3배에 달하는 351억원에 되팔아, 불과 1년 만에 200억원이 넘는 차익을 남겼다. 동원된 수법은 텔레마케팅을 통한 분할 매각. 전체 5만5,000여 평을 100~500평 규모로 쪼갠 뒤 200여 명의 텔레마케터를 동원해 277명에게 나눠 팔았다.

이 과정에서 토지 매입자들은 명의상 계약자인 회사 통장이 아닌 실질적 사주인 이모 씨 통장으로 대금을 입금했고, 이 씨는 이 돈 가운데 154억원에 대해서만 법인세 신고를 하고 나머지 197억원은 개인적으로 유용했다.

또 이 씨는 토지 매매가 완료된 후 A사를 폐업하고, 동일 수법으로 투기 행각을 벌이기 위해 미리 설립해 둔 B사에 잔여 토지를 증여한 사실도 확인됐다. 회사를 폐업한 것은 매매 차익에 대한 세금 추징을 피하는 한편 투자로 피해를 본 투자자들의 항의나 고발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다.

또 다른 C사의 경우도 비슷하다. 이 회사의 사주는 한꺼번에 4개의 기획부동산 업체를 설립한 뒤, 자신은 뒤로 숨고 ‘바지 사장’들을 앞세워 그룹 형태로 운영한 게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C사는 2003년부터 2004년에 걸쳐 지방 임야나 염전 등 33만6,000평을 매입한 뒤 100~400평 단위로 분할, 평당 취득 원가의 6배 가격에 팔아 넘겼다. 거래 횟수만 1,044회에 달했고, 동원된 텔레마케터도 500명이나 됐다.

투기꾼 발본색원에 칼 빼든 검찰
7월 초 ‘부동산 투기사범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한 검찰도 투기꾼들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칼을 뺐다. 그 동안 산발적으로 이뤄졌던 단속 활동도 한층 강도를 더할 전망이다. 특히 행정중심 복합도시라는 호재가 있는 대전 충남 지역은 핵심 수사 부서인 특수부가 직접 나설 정도로 강력한 단속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대검 관계자의 전언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그만큼 투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는 셈이다.

이 지역에선 토지거래 허가요건을 갖추지 못한 서울 등의 외지인 들이 토지거래허가를 원천적으로 회피하기 위해 매매가 아닌 위장 증여 계약으로 토지나 임야를 사들이는 투기 사례가 성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에 어김없이 거간 노릇을 하는 세력은 ‘떴다 방’ 업자나 일부 부동산 업체들이다.

증여세 부담이 적지 않음에도 이런 위장 거래가 빈번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매도인은 매수인이 증여세를 부담하면 양도소득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매수인은 땅 값이 뛰면 단기간에 투기 이익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매도인-중개인-매수인 3자가 모두 이득을 취하게 된다. 이 밖에도 미등기 전매, 명의 신탁, 허위 등기 원인 기재 등 다양한 방식이 투기적 거래에 동원되고 있다.

지난해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에 신규 분양된 한 아파트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타인의 청약 통장을 사들인 뒤 통장 명의자를 이 지역으로 위장 전입을 시켜 아파트를 대량으로 부정 당첨 받은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위장 전입 과정에서 주민등록증이나 주민등록등본의 전입일자 변조가 이뤄졌고, 여기에는 관계 공무원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투기꾼들은 청약통장 매수 및 명의자 담당, 주민등록 변조 담당, 주소 위장신고 담당, 주민등록등본 발급 담당 등으로 5~6명이 한 조를 구성해 일을 분담하는 점 조직 형태로 활동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수사를 맡았던 대전지검 관계자는 “주민등록등본 상의 전입 일을 변조하는 방법은 간단해 유사한 아파트 투기가 다른 지역에서 행해졌을 가능성도 크다”고 밝혔다.

부동산 투기 수법은 정부 단속을 비웃듯 갈수록 간교해지고 치밀해지는 양상이다. 그 동안 부동산 투기를 ‘망국 병’이라고까지 규정해 온갖 대책을 시행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법과 제도가 사회의 변화에 뒤쳐져 따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부동산 불패 신화’라는 악령이 전 국토를 뒤덮도록 오랜 세월 방치한 국가는 과연 책임이 없을까.

부동산 전문가들이 말하는 투기 수법

원장정리
분양계약서 상의 최초 당첨자 명의를 시공사나 시행사가 분양권 매입자의 명의로 바꿔치기 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분양권 전매가 금지된 투기과열지구에서 성행한다. 아파트 분양 후 대한주택보증에 실제 계약자 명단을 넘기기까지는 1~2개월 정도 소요되는데, 이 기간에 대량으로 계약자 명단을 바꿔치기 한다.

또 3순위나 1, 2순위 미계약분의 경우, 건교부가 명단을 받기 전에는 최초분양 계약자 파악이 어려운 점을 업체들이 악용하기도 한다. 원장정리를 하다가 적발되면 주택법에 따라 거래를 알선한 중개업자를 비롯해 시공사, 최초 계약자, 매수인 등이 모두 처벌을 받게 된다.

복등기
원장정리와 마찬가지로 분양권 전매가 금지된 지역에서 주로 이뤄진다. 절차는 이렇다. 당첨자인 최초 계약자(A)가 매수자(B)와 분양?매매계약서 체결→계약금 및 '밑서류'(계약서, 권리포기 각서, 이행 및 양도 각서, 인감증명서 등) 공증→B가 분양금 대납→준공 후 이전등기 때 A와 B가 거의 동시에 등기→등기 후 매매 형태로 A에서 B로 매매계약 체결('다운계약서' 작성) 및 등기이전→A는 다운계약서로 양도세 납부.

은행 자체감정 의뢰
대출 신청자가 은행에 자체감정을 의뢰, 주택담보대출 금액을 높이는 것을 말한다. 은행에서 자체감정을 할 경우 주택 감정가액을 시세보다 1억~2억원 정도는 올려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한 것. 투기지역 내 주택담보대출 한도가 제한된 요즘 아주 유효한 방법인 셈이다.

부담부 증여
주택을 증여하면서 과세표준을 낮추기 위해 일부러 해당 물건을 담보로 대출을 일으키는 것을 가리킨다. 토지의 경우에는 최근 분할증여 등이 성행하고 있다.


김윤현 기자
사진=이호재 기자


입력시간 : 2005-07-21 20:27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