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 않은 '홀로 된다는 것'

[추석 특집] 싱글, 그들만의 명절나기
외롭지 않은 '홀로 된다는 것'

대기업에 입사해 올해 6번째 추석을 맞는 ‘노총각’ 방영민(가명ㆍ34ㆍ남) 씨는 사흘로 그치는 이번 추석 연휴가 못마땅하다. 사흘이라는 시간이 부모님이 계시는 전남 영광에 다녀오기에 너무 짧아서가 아니다.

명절연휴 때마다 나가던 해외 여행을 하는 데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 추석에는 남은 연차 하루를 연휴 앞날에 써 목요일 저녁에 푸켓행 비행기에 오를 계획이다.

휴가철과 함께 연휴 때만 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항공사에서 5년째 일하고 있는 올해 나이 서른 둘의 미혼인 정수민(가명ㆍ여)씨. 명절마다 고향 제주도로 내려가던 그는 이번 추석에는 포기했다.

대신 연휴 사흘 내내 회사에 남아 일을 하기로 했다.짭짤한 특근수당도 수당이지만, 더 이상 집에 내려가기 싫어졌기 때문이다.

‘고된 업무로 휴식이 필요해서’, ‘회사일이 바빠서’ 등 두 경우 모두 명절에 고향을 찾을 수 없는 그럴듯한 이유에 해당하지만, 그 이면에는 명절에 집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비켜 가보자는 심산이 작용했다. 그 스트레스는 연중 잠잠하다가도 명절만 되면 나오는, ‘너 언제 결혼하니?’라는 질문공세다.

위 두 경우와 다소 차이는 있지만, 정일두(가명ㆍ29ㆍ남)씨도 이번 추석 연휴에는 집에 가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는 ‘집에서 나온다’는 표현이 맞다. 도서관에 공부하러 간다는 핑계로 집을 나와 친구 자취방으로 ‘피신’할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명절에 맞춰 대구로 내려가는 친구의 자취방 열쇠를 예약해뒀다.

여자친구는 물론, 아직 직장도 못 구한 싱글 백수인 그는, 취업을 해야 결혼도 꿈꿀 수 있는 시대건만, 지난 설에 집안의 복합 공세에 시달린 뒤 이 같은 결단을 내렸다.

최근 관련 업체와 단체의 설문조사에서도 명절 때면 많은 싱글들이 명절 기피증세를 보이고 있다. 결혼 정보회사 듀오에 의하면 미혼남녀 630명 중 36.9%가 “추석이 달갑지 않다”고 응답했고, 그 중 “친지들의 결혼 성화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힌 이가 44.6%에 달한다.

또 다른 설문조사에서는 조사에 응한 808명의 네티즌 중 46%가 고향에 내려가지 않겠다는 대답을 했다. 짧은 연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혼자와 미혼자의 구분 없이 이뤄진 설문임을 감안하면 집에 내려가지 않겠다는 미혼자의 비율은 이를 웃돈다.

해외여행을 떠나고, 회사에 남아서 일을 하기로 한 싱글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문제는 마땅히 정해진 일도 없고 집에도 내려가지 않는, 집(방)에 혼자 남아 명절을 보내는 독신자들이다.

집에서는 좀처럼 밥을 해먹지 않던 이들이지만, 거의 모든 음식점이 문을 닫은 상황에서 한번 정도 밥을 해 먹어야 하는 상황은 불가피하다.

여느 때 같으면 같이 어울리던 사람들의 대부분도 집에 내려갔거나, 오랜만의 가족모임, 동문회 등 각종 모임으로 바쁘기 때문에 혹은 자신의 처지가 창피하기도 하기 때문에 쉽게 연락을 할 수도 없다.

긴긴 연휴를 ‘나홀로 집에서’ 보내야 하는 상황도 영화 속만의 얘기가 아니다. ‘전세극장(극장 관람객이 자기 혼자였던 경우)’, ‘TV와 춤을(하루종일 TV앞에서 보내게 되는 경우)’ 등이 사람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회자되고 있지만 이들에게는 엄연한 현실이고,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식량과 만화책, 비디오 등 엔터테이닝 머티리얼을 확보하라’는 구호도 이들에겐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싱글들의 이 같은 처절한 명절나기도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부상한 새로운 동호회 문화에 따른 것으로 ‘솔로 벙개’, ‘싱글 파티’ 등이 대표적이다.

상부상조 내지는 동병상련의 상황을 파티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것이지만 나름대로 쏠쏠한 재미와 나름의 보람도 찾을 수 있다는 게 경험자들의 중론이다.

각 포털 사이트의 솔로클럽, 싱글클럽 등의 카페 게시판에서는 어렵지 않게 ‘00지역 추석 오프 모임’ 등의 글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설이 있었던 지난 2월의 게시판으로 내려가보면, ‘설날벙개(번개) 장소:00 시간:00 회비:00’라는 글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온라인에서 만난 사들웰옜의조瓚恝【? 번개에 콩 구워 먹듯 갑작스럽게 만나는 만남을 의미하는 ‘벙개(번개)’지만, 이들의 만남이 일회성으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게 이들의 한결 같은 얘기다. 카페 자료실에는 ‘벙개’로 만난 뒤 결혼에 골인한 회원들의 결혼 사진이 이를 뒷받침한다.

초면인 사람들과의 파티나 회동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내 독신자들의 모임도 있다. 지난 설 연휴 때 집에 내려가지 않은 김양희(34ㆍ여)씨는 당시 사내의 여성 독신자(싱글) 7명과 근교의 펜션에서 ‘처녀들의 파티’로 연휴를 보냈다.

김씨는 “여자들끼리 명절에 이게 무슨 청승이냐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여자들끼리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단체로 피부팩 등을 하면서 보내기 때문에 ‘방콕(방에 콕 박혀 있는 것)’하는 것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훨씬 유익한 시간이었다”며 “이번 추석 연휴가 짧긴 하지만, 그 사이 남자친구가 생기거나 결혼을 하지 않는 한 당시 멤버들은 그대로 이번 추석에도 회동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일터를 벗어났지만, 비슷한 처지이거나 비슷한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단결도 잘되고, 이후 직장에 돌아가면 다른 직장동료들보다 높은 업무효율도 생긴다”고 덧붙였다. 그야말로 사내 MT였던 셈이다.

명절에 집에 내려가기 싫어하는 싱글들의 이 같은 움직임에 주목, 한 여행사에서는 싱글들만을 위한 이색적인 여행 상품을 내 놓기도 했다.

특수 계층에 한정된 여행 상품이어서 큰 수익을 내지 못하고 결국 폐기되긴 했지만, 20대후반~30대 중반으로 참가 나이를 한정한 여행상품을 내놓았던 것.

하지만 그 관계자는 “명절에 집에 내려가는 미혼남녀들의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외국으로의 여행을 선택하는 싱글들이 늘어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언제고 다시 대박을 낼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말했다.

명절이면 집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집에 내려가는 것을 포기했던 싱글들. 그래서 그 누구보다 우울한 명절을 보내야 했던 그들의 표정이 점점 싱글싱글 밝아지고 있다.


정민승기자


입력시간 : 2005-09-14 16:06


정민승기자 msj@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