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딛고 경영정상화 일군 구조조정의 달인들

지난 11월23일 서울 강남구 한 호텔 컨벤션센터에서는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가슴으로 만나는’ 행사가 열렸다.

한국능률협회(회장ㆍ송인상)가 ‘스토리와 감동이 있는 희망의 경영 이야기’라는 주제로 개최한 2005년 추계 최고경영자 세미나가 바로 그 무대였다.

통상적인 최고경영자 세미나가 주로 경영 혁신과 관련된 ‘지식’을 전달하는데 중점을 둔다면, 이날 세미나는 구체적인 사례 전달과 함께 강연자들의 ‘인간적인 경험’을 주로 다뤄 참석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각각 ‘재기’, ‘혁신’, ‘도전’이라는 세부 주제 아래 강연에 나선 손복조 대우증권 사장, 조헌제 대한송유관공사 사장, 이종선 모닝글로리 사장 등 3명은 부실기업으로 전락한 회사를 다시 일으킨 경험담을 생생하게 들려줘 장내를 감동시켰다.(관련 기사 참조)

한 참석자는 “평소 최고경영자들의 강연을 많이 듣는 편인데도 그날의 강연은 더욱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고 전했다.

한국능률협회 경영기획실 관계자도 “역경을 딛고 일어선 기업인들의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현재 경영상 어려움을 겪는 기업인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제공해줄 수 있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들에게 IMF 외환위기 이후의 기업 환경은 아마도 불확실성과 생존경쟁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기업들에게 시련과 역경은 있기 마련이지만 IMF 이후 그 가능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과의 경쟁 가열, 예측이 어려운 세계 경제, 급변하는 시장 흐름까지 무엇 하나 기업들을 불안으로 내몰지 않는 게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 최고경영자들의 최대 화두는 결국 어떻게 기업을 존속시키고 나아가 경쟁력을 높이느냐 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이들은 구조조정과 경영 혁신을 통해 기업 가치를 제고하는 일에 밤낮을 잊고 산다.

다른 사람의 경험담도 아주 소중한 교훈이 된다. 구조조정에 성공한 최고경영자들이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등 경제 유관기관에서 주최하는 각종 간담회나 세미나 등에 강사로 자주 초대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잭웰치에게서 얻는 지혜

박해춘 사장 부임 1년여 만에 우량회사로 거듭난 LG카드

그렇다면 최고경영자들에게 구조조정과 기업혁신의 ‘사표’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인물은 누구일까.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간혹 기업인들을 상대로 실시하는 설문 조사에서 세계 초일류 기업을 만든 잭 웰치 전 GE 회장이 십중팔구 일등으로 나오는 결과를 종종 볼 수 있다.

실제 많은 기업인들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잭 웰치의 업적과 명언을 격언 되뇌듯 심심찮게 거론하는 현실이다.

삼성경제연구소 한창수 수석연구원은 “구조조정이란 것을 처음 시작한 데다 나름대로 기준이 될 만한 족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잭 웰치를 구조조정의 전범 내지는 교과서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종선 모닝글로리 사장은 “잭 웰치가 한 말 중에 ‘좋은 선수가 좋은 구단을 만든다’는 구절이 있다”며 “평범한 듯 보이지만 그의 말에는 기업 운영의 핵심을 꿰뚫는 지혜가 드러난다”고 밝혔다.

국내에도 스타급 구조조정의 전도사가 없지 않다. 1997년 총부채 4,700억원, 부채비율 1,114%, 매출 마이너스 성장, 장기 파업 진행 등 ‘초부실 기업’이었던 한국전기초자에 들어가 3년 만에 차입금 제로, 당기순이익 1,717억원의 ‘초우량 기업’으로 바꿔놓은 서두칠 사장(현 이스텔시스템즈 사장)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서 사장은 전문 컨설팅기관의 “현재 경쟁력으로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다”는 진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단시간에 기적을 일궈냈다.

우의제 하이닉스 사장

그는 한국전기초자에 가자마자 7개 분야에 걸친 구조조정을 과감하고 효율적으로 진행했다. 편의상 그리 나눠놓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바꾸는 전면적 혁신 작업이었다.

그의 업적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임직원의 일치단결된 동참을 이끌어낸 데다, 자산과 인력을 감축하지 않고도 회사 전 부문을 우량 구조로 바꿔 놓았다는 점 때문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뚜렷한 목표를 함께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IMF 이후 구조조정의 확산은 역설적으로 제2, 제3의 서두칠을 낳는 토양이 됐다. 공적자금 투입으로 부실 기업에 대한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면서 많은 최고경영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는 계기를 맞은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며 결국 새로운 구조조정의 달인들도 적잖이 탄생했다. 서울보증보험의 부실을 털어낸 뒤 수렁에 빠진 LG카드로 건너가 회생의 주역이 된 박해춘 사장, 경제 관료 출신으로 파산 위기의 코리안리(옛 대한재보험)를 떠맡아 매년 흑자를 내는 등 우량 회사로 거듭나게 한 박종원 사장, 옛 대우그룹 간판 계열사였던 대우인터내셔널의 과거 명성을 회복한 이태용 사장, 은행권 출신으로 하이닉스의 부활 찬가를 주도한 우의제 사장 등이 최근 많이 주목받는 인사들이다.

조직혁신으로 이룬 사업

이태용 대우 인터내셔널 사장(왼쪽), 서두칠 이스텔시스템즈 사장













이들 기업의 변신에는 물론 채권단 등의 협조와 배려가 적잖은 도움이 됐지만 최고경영자의 조직 혁신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사실 구조조정은 당초 우리 사회에 좋지 않은 인상으로 다가온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IMF로 많은 노동자들이 고용 불안을 느낄 때 ‘구조조정=인력감축’이라는 공식 아닌 공식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구조조정의 본질은 기업 활동에 수반되는 영속적인 경영 행위로 이해돼야 한다. 끊임없이 변하는 외부 환경에 맞춰 기업 체질을 늘 개선해 나가는 것이 곧 구조조정이기 때문이다.

인력 감축에 초점을 맞추는 구조조정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당장의 손쉬운 비용 절감은 이룰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는 성장 잠재력을 오히려 훼손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한창수 연구원은 “기업이 다 죽게 된 상황에서 실시하는 구조조정은 ‘외과적’ 수술에 불과해 반짝 효과에 그치거나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며 “그런 까닭에 기업이 건강할 때 구조조정의 타이밍을 잡는 것이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구조조정을 지휘하는 최고경영자의 덕목은 명확하다. 조직 전체에 위기의식과 긴장감을 불어넣고 미래를 위한 확고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을 갖춰 놓아야 구조조정이 언제든 이뤄질 수 있고 조직의 경쟁력도 배가된다. 세계 일류기업으로 평가받는 토요타자동차나 삼성전자가 늘 위기를 말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