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컨버전스로 움직이는 세상, 5년 뒤를 미리 가 보니…

독립적으로도 충분한 존재 이유를 가지는 휴대폰, MP3 플레이어, 디지털 카메라, DMB 등의 가전들이 디지털 기술로 모듈(moduleㆍ부품, 조립단위)이 되고, 사용자는 구미에 맞춰 이 모듈들을 마음대로 결합하는 시대가 왔다. 이른바 IT 가전 기기들의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카메라로 음악을 듣고, 전화기로 사진을 찍고 TV도 볼 수 있게 되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만능 기술 ‘디지털’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앞으로 5년 후는 어떨까. 내로라 하는 전문가들이 얘기하는 ‘미래의 디지털 시대’를 바탕으로, 백수 청년의 그때 어느날 오후를 구성해봤다.

"휴대폰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2010년 11월 1일 오후 2시 5분 :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집 밖으로 달려나가는 올해 31세의 K군. 한때 한창 유행하던 말로 그를 표현하면 ‘백수’요, 점잖은 말로는 ‘취업준비생’이다.

버스 정류장에 거의 다다른 K는 A사 앞을 지나는 2002번 버스의 도착 예정 시간을 확인하기 주머니를 더듬다가 휙 발길을 돌린다. ‘폰’을 책상 위에 두고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3~4년 전에도 폰을 휴대하지 않은 사람들이 ‘천연기념물’ 취급 당할 정도로 드물긴 했지만, 그게 없다고 해서 생활이 썩 곤란한 것은 아니었다.

걸려오는 전화를 못 받는 정도의 불편과 전철에서 고스톱을 칠 수 없음에 밀려오는 약간의 무료함이 고작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 ‘요물’ 없이는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시대가 됐다. 폰을 두고 나왔다면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발길을 돌리는 수 밖에. 휙.

‘평소 안 입던 정장에, 트렌치 코트까지 걸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어, 정신이….’ 오늘 이렇게 정장 차림을 한 것도 A사 1차 PT(프리젠테이션)면접 시험을 보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치면서 시작된 이 생활도 올해로 3년째. 디지털 기술의 심화로 ‘고용 없는 경제발전’이 더욱 가속화하는 탓에 ‘백수생활’도 K가 생각했던 것보다 길어졌다.

그래도 고행기간 3년은 또래들의 평균이기에 K에겐 조바심 같은 건 없다.내공

2시 15분 : “2분 뒤에 버스가 도착합니다. A사까지 소요 예상 시간 18분, 빈 좌석 없습니다.” 버스 정류장 스탠드 밑으로 들어서자 목적지를 입력해 둔 폰이 상냥한 아가씨의 목소리로 K에게 알린다.

‘3시 반까지 닿으면 되니까 아직 여유 있어. 앉아 갈 수 있는 다음 버스를 타자.’ 폰의 터치 스크린에 K의 손가락이 스치자 다시 그 상냥한 목소리, “다음 버스는 8분15초 뒤에 정차 합니다. 이곳 정류장에서 기대할 수 있는 빈 좌석은 15석 입니다.”

이번 면접의 프리젠테이션 주제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지만 준비성 하나 만큼은 철저한 K. 정거장에 선 채 PT예상 문제들을 다시금 정리한다.

그가 가정한 주제는 ‘네오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 올해를 세계시장 진출의 원년으로 삼아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A사가 제시할 가능성이 높은 PT 주제다.

세계 각국의 유비쿼터스 보급률과 현황 그리고 몇 년 전부터 급속히 보급되기 시작한 와이브로 보급률 등등의 자료들이 널찍한 화면에 시원스레 펼쳐진다.

“1분 뒤에 버스가 도착합니다. 전방 교통사고로 A사까지 소요 예상 시간 25분, 빈 좌석은 12석입니다.” 프리젠테이션 준비에 넋을 놓고 있던 K를 다시 상냥한 목소리가 깨운다.

도착한 버스의 문이 열리고 K가 승차하자 보고 있던 화면의 한쪽 구석에 e-머니 잔액이 표시된다. “e-머니 잔액 600원입니다.

다음 승차시 충전이 필요합니다. 지금 충전하시겠습니까?” 폰에 내장된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ㆍ무선인식시스템)가 버스의 RFID송신기에 반응한 것이다. ‘굶주린 지갑이여 조금만 참아라, 이번에 합격하면 가득 채워주리니.’

2시 41분 : “오~!” 머리를 식히기 위해 며칠 전 구입한 전자북 ‘100전100승 면접법’이라는 처세술책을 읽고 있던 K는 앞뒤의 버스 승객들이 일제히 내 지르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 휙 둘러보았다.

그는 곧 DMB 방송을 보고 있던 승객들이 박지성의 골인에 보인 반응이었음을 옆에 앉은 할아버지의 폰 화면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시험을 앞둔 나한텐 축구관람은 사치지.’ K는 다시 시선을 폰 화면에 고정한다. “하차할 정거장은 다음 정거장입니다, 운전기사에게 하차 사실을 알렸습니다.”

3시 15분 : 면접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K는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자 최종 정리한다.

폰의 디지털 캠코더 기능을 이용해 자신의 프리젠테이션 연습 영상을 모니터링 하는 것으로. ‘그래, 이 정도면 됐어.’ 여느 시험 때와 달리 자신감이 솟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K는 대기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면접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 면접관도 있네.’ 면접관으로 나온 A사 간부들은 생각보다 젊었다.

‘필시 최첨단을 달리는 IT기업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리라.’ ‘100전100승 면접법’이 일러준 대로 K는 자신이 면접관을 면접한다는 자세로 면접에 임했다.

면접관들의 개별 질문이 끝나고 마지막 면접관으로부터 PT주제가 주어졌다. “마지막으로 PT입니다. 네오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에 A사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보세요.”

누가 그랬던가 ‘시험은 운칠기삼.’ 그 누구보다 억세게 운수 좋은 K였다. 가져간 폰을 단상의 노트북 옆에 놓자 그 자료들이 그대로 스크린에 투영됐다.

4~5분 뒤 면접관들을 향해 고개와 허리를 살짝 숙인 K앞으로 박수가 쏟아졌다. 확신에 찬 K는 당당한 걸음으로 시험장을 나왔다.

3시 45분 : 다시 직원의 안내로 대기실에 들어선 K의 폰에 메시지가 떴다. ‘수고하셨습니다. 면접비 5만원이 e-머니로 지급되었습니다. e-머니 잔액은 50,600원 입니다.’

“5만 발의 탄약도 장전됐겠다 이제 뭘 하지.” 이후 전형 일정 등에 대한 직원의 설명이 쏟아지고 와중에 대기실에 벗어 뒀던 외투를 챙기고 있는 K였지만 갑자기 느긋해진 그의 머리는 이후 스케줄을 잡고 있었다.

‘그래 여자친구가 미술관에 볼 거리가 많다고 했는데, 오늘 거기에 가보자.” 폰의 1번을 길게 누르자 그의 여자친구 다빈이의 모습이 화면에 뜬다.

“오빠 시험 잘 봤어? 어떻게 될 것 같애? 응?” – “ 그런대로 봤어. 그래도 뚜껑은 열어봐야 하는 것 아니겠어.” – “나 지금 A사 밖에서 오빠 기다리고 있는데….” – “그래? 금방 나갈게 1층 로비에서 봐.” 면접 때문에 소리를 죽여 놓고 있었지만, 이제 다빈의 입 모양만 봐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는 K였다.

내일이면 내 '폰'도 이미 구식

K와 그의 여자 친구가 발길을 향한 곳은 서울시립미술관. 인근 빌딩에서 퇴근하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들른 미술관이었지만, 그곳에서는 최첨단 IT기업의 면접을 치르고 나온 K를 위한 것인 양 기획전 하나가 열리고 있었다. ‘추억의 아날로그전.’

K가 들고 있는 폰 만큼이나 묵직한 아날로그 방식의 휴대폰이 맨 처음 그들을 맞았다. “1995년 생산된 최초의 국산 휴대폰으로 6년 동안 300만 명의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모델입니다.

당시로서는…” 전시품으로 다가서자 그의 폰 화면에는 도슨트의 친절한 안내 멘트가 문장으로 떴다.

속도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K. 이날의 기획전은 그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 하나를 남겼다. ‘그래도 그렇지 10여 년밖에 안된 물건들을 갖다 놓고 ‘추억’의 아날로그전이라니….’

10년 뒤엔 자신도 이 세상에서 추억 거리라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일순 소름이 돋았다. 자신보다 어려 보이던 아까 그 A사의 면접관이 떠올랐다.


정민승 기자 msj@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