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로그, 첨단에 감성을 입히다

기술 만능의 차가운 디지털 시대에 ‘따뜻한 감성 입히기’ 바람이 산업에도 불고 있다.

아날로그 기반의 사회에서 디지털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 혹은 디지털(digital)과 아날로그(analog)가 융합하는 현상을 의미하던 디지로그(digilog)가 새로운 산업 트렌드로 부상하고 있다.

디지털 기기들의 짝짓기(디지털 컨버전스)가 활발한 가운데 디지털은 또 다른 방에서 아날로그와도 동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다양한 기능으로 무장한 요즘의 디지털 기기들에 부담을 느끼는 ‘디지털盲’ 세대를 타깃으로 한 새로운 제품전략 혹은 ‘일시적인 틈새 시장’공략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디지로그는 디지털 기반의 제품을 아날로그로 보완함으로써 새로운 ‘틈새’의 영역을 이미 넘어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현대경제연구원에서도 ‘2006년 국내 7대 트렌드’라는 보고서를 통해 디지로그를 2006년 한국의 변화를 이끌 물결 중 하나로 지목하기도 했다. 블루오션으로써 디지로그 산업의 확산을 전망한 것이다.

디지로그 제품은 싸다? 천만의 말씀

엡슨 디지털카메라

디지로그 개념이 반영된 대표적 분야가 디지털 카메라다. 완전 자동으로 작동되던 디지털 카메라가 폭발적으로 보급됐지만 그와 함께 수동으로 조작하던 옛 필름 카메라에 대한 향수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 탓이다.

셔터가 없어 셔터음을 내지 않는 보급형 디지털 카메라나 휴대폰 디지털 카메라(폰카)의 경우에도 촬영시 ‘찰칵’ 소리를 내게 한 것은 아날로그적 감성과 디지털의 접목으로 볼 수 있다.

엡슨(EPSON)이 지난해 여름에 내놓은 디지털 카메라 ‘R-D1’도 좋은 사례다. 이 카메라는 모든 센서들이 디지털로 움직이되 그 외양은 20~30년 전의 모습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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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를 누르면 필름감기는 소리까지 내는 이 카메라는 언뜻 봐서는 디지털 카메라로 보이지 않는다. 찍은 사진을 즉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액정화면과 디지털 조작 스위치 등 디지털 카메라가 갖춰야 할 것들은 다 갖추고 있다.

다만 가격은 비슷한 성능의 카메라보다도 3배정도 비싼 300만원대다. 디지로그가 첨단, 다기능화하는 디지털 가전들의 진화에서 한 발짝 물러선, 가격을 낮춘 저가 공략의 수단으로 보는 의견은 그래서 적절하지 않다.

결국 셔터 릴리즈 한번 누르면 끝나던 일이 셔터 스피드와 조리개 값을 일일이 손으로 조정해야 할 정도로 번거로워졌지만, 그 노동은 예술적 노동으로 승화됐다.

MP3플레이어, 휴대폰, 메신저에도 부는 아날로그 바람

1970년대~80년대에 유행하던 대형 녹음기 ‘붐박스’를 닮은 MP3플레이어도 인기다. 지난해 독일 유명 일간지 빌트가 베스트 MP3플레이어로 뽑은 MPIO의 MP3플레이어 ‘FG100’가 주인공이다.

LG전자 PDA폰

작은 덩치와 세련미를 추구하는 여느 제품에 비해 투박한 디자인이지만 추억을 자극하는 아날로그적 따뜻함이 인기를 끈 비결이다.

삼성과 세계적인 덴마크 오디오 전문 업체인 뱅앤올룹슨이 공동 개발한 휴대폰 ‘세린’도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느낌이 융합된 상품이다.

키 패드를 과거 다이얼 전화기를 연상시키는 원형으로 설계했고 단순미를 앞세워 고급스러운 무광택 검정 색상을 사용했다.

언뜻 60년대~70년대 부잣집 거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검은색 다이얼 전화기를 연상시킨다. 유럽 출시 가격은 1,000유로(118만원). 국내에서는 아직 출시되지 않았지만 해외 구매 대행 사이트 등에서는 인기 아이템이다.

종이와 연필을 쓰는 것처럼 태블릿(판) 위에 전자펜으로 그림, 문자 등을 입력하는 펜태블릿과 펜마우스도 철저하게 디지털화된 기기.

병사들에게 제공되는 표준식단 메뉴가 CD로 제작됐다 (연합뉴스)

하지만 그래픽 전문가용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일반인들에게도 보급되고 있다. 또 지난해 겨울에 나온 MSN 메신저 7.0 버전에 추가된 ‘잉크대화’ 기능도 주목할 만하다.

잉크대화 기능은 마우스로 문장을 ‘그려’서 전송하는 대화 방식이다. 디지털이 소리, 영상 등 모든 데이터를 ‘0’과 ‘1’로 획일화 시키듯 딱딱해진 디지털 서체(글씨 폰트)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필체로 소통하고자 하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작용한 산물이다.

생활전반을 지배하는 디지로그

디지로그는 디지털 카메라, MP3플레이어 등 최첨단 가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일반 서비스에서도 나타난다. 전자 상거래가 대표적인 예다. 물류라는 아날로그적인 기반에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디지털이 가미된 디지로그다.

2004년에 총 300억원(전자도서관 시스템 구축 포함) 규모의 ‘전자북(e-book)’시장이 지난해엔 500억원으로 급성장한 것도 디지로그가 우리생활 속에 파고들고 있음을 설명해 준다.








휴대전화, 개인휴대단말기(PDA), PC 등 각종 디지털 기기를 통해 책의 내용을 구매 즉시 확인할 수 있고 종이책의 50%수준에 그치는 저렴한 가격, 탁월한 검색기능 덕분에 전자북 시장은 올해 1,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온라인 서점의 등장으로 한차례 유통혁명을 맞이했던 도서 시장은 전자북의 급신장으로 또 다시 질적인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현대경제연구원 이부형(37) 연구위원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낚시나, 자동차 경주 같은 게임들까지도 멀리 가지 않고 방안에서 즐길 수 있을 만큼 디지로그는 우리 생활 전반에 침투해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이 같은 현상들을 두고 “디지털 사회라고 해서 사람들의 아날로그적 사고와 행동들이 사라질 수 없으며, 오히려 디지털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아날로그적 행태들도 존중되고 풍부해져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디지털 컨버전스가 가속화하면 할수록 반작용으로 디지로그도 빨라진다는 얘기다.


정민승 기자 msj@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