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김형준 / 영화 제작가협회 이사장 (한맥영화사 사장)

요즘 충무로에 가면 말조심을 해야 한다.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로 여간 신경이 날카롭지 않기 때문이다. 거의 ‘기습적’이었던 정부 발표에 모두가 ‘당했다’는 표정이다. 영화계가 벌집 쑤셔놓은 듯 난리가 난 것은 당연지사.

배우, 감독, 스태프, 제작자 할 것 없이 연일 ‘가투(가두투쟁)’에 나서느라 충무로가 거의 올스톱한 상태다. 이름값만 수백억원에 달하는 스타들도 ‘전투복’ 차림으로 어깨띠를 두르고 추운 거리로 나섰다.

광화문 주변에선 연일 간판스타 릴레이 1인 시위라는 낯선 풍경이 등장했다.

영화인들은 여간해선 물러서지 않을 태세다. 이 싸움판의 한 가운데에 1,000만 관객을 끌어 모은 ‘실미도’ 제작자, 김형준(46)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이사장도 있다. 8일 오전 그가 사장으로 있는 한맥영화사를 찾았다.

개런티·수입배분·불법다운로드 등 난제 첩첩
자본 앞세운 할리우드 대작과 경쟁하기엔 벅차

약속 시간을 조금 넘겨 나타난 김 이사장의 얼굴엔 불면의 흔적이 역력하다. 지난 밤 ‘충무로 식구들’과 울분에 찬 대화로 지샌 술자리 여파다.

“지금 건강하다고 해서 건강보험 가입 안 하는 것 아니죠? 건강보험 같은 게 스크린쿼터입니다.

당장 한국 영화가 좀 잘 나간다고 해서 한국영화 건강보험인 스크린쿼터를 던져버릴 수는 없죠. 결코 엄살이 아닙니다. 스크린쿼터 지키기는 한국 영화의 생사가 걸린 절박한 문제입니다.”

“정부에서 자유무역협정(FTA)은 한국과 미국이 윈-윈하는 거다, 한미 동맹 강화 차원이라고 거대 담론을 펴지만 스크린쿼터 축소는 시장 위축에 위기를 느낀 할리우드의 정치적 공세에 우리 정부가 무릎을 꿇은 것 입니다. 할리우드 영화는 세계의 문화다양성을 위협하는 문화 제국주의의 상징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 세상 밖으로 내모는 일

자리에 앉자마자 김 이사장은 스크린쿼터 축소에 대한 반박논리를 격하게 쏟아낸다. 한 편 제작에 수십억원이 들어가는 영화는 갈수록 산업적인 측면이 강해져서 안정적인 국내시장 확보 없이는 버텨낼 수 없다는 것.

한때 잘 나가던 홍콩영화가 몰락한 게 좋은 예라고 했다. 안정적 국내시장이 없었던 홍콩영화가 해외에서 주춤하자 곧장 무너져 버린 것이다. 정부는 한국영화가 경쟁력을 갖췄다고 하지만 시장 규모면에서는 아직 ‘우물안의 개구리’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래도 지금의 한국영화 열풍을 잘 이어가면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반박하자 김 이사장은 대답 대신 잠시 쓴웃음을 짓는다. 그러고선 우선 제작비를 한 번 따져보자고 했다.

우리는 한 편 제작비가 대충 40억원대인데 비해, 할리우드는 최소 1억 달러를 훌쩍 넘기는데 어떻게 시장에서 장기적으로 경쟁할 수 있겠냐는 얘기다. 실제 지난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킹콩’의 제작비는 무려 2억 700만 달러가 들어갔다.

“이건 마치 이종격투기의 무적 챔피언 표도르와 한국선수가 맞붙는 격입니다.”

대뜸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간다. 더욱이 정부는 현행 스크린쿼터가 연간 146일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극장은 106일밖에 한국영화를 걸지 않는 형편인데, 다시 법적으로 73일까지 축소하면 그 다음 상황은 불보듯 뻔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는 이미 물 건너간 듯하고 여론도 퍽 영화계 편이 아닌 것 같다, 정부 발표를 뒤집는데 실패한다면 대안은? 하며 다시 한 번 쿡 찔러 봤다.

그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싸움에서 지는 것은 생각해 본 적 없다”고 잘라 말한다. 충무로의 승부사다운 반응이다. 다만 그는 한국영화계의 오랜 숙제에 대해 설명했다.

제작가협회가 주도하는 ‘영화산업 구조 합리화’ 작업이다. 지금까지 한국 영화판은 워낙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어 온 탓에 소위 합리적 ‘룰’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영화가 여기저기서 대박을 터뜨리자 숨어있던 문제가 드러났다고 그는 주장한다.

영화산업 구조 합리화는 영화에서 번 돈이 다시 영화에 투자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시장을 좀 더 튼튼하게 하자는 취지다. 또 갈수록 영화판에 자본의 영향력이 커져 영화가 문화사업으로 살아남을 ‘새로운 질서’가 절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 이사장은 요즘 영화 제작에선 투자자의 의견이 80%를 차지한다고 전했다. 캐스팅부터 영화 성격까지 쥐락펴락하는 형편이 영화계의 속사정이라는 것이다. 영화계의 이런 구조를 혁신하기 위해 김 이사장은 우선 3대 과제를 제시한다.

먼저 톱스타의 출연료 문제. 이 문제는 지난해 한차례 홍역을 치른 뒤 일단 주연 배우의 몫을 영화에 대한 지분보다 인센티브 제공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두번째는 영화수입의 70% 이상을 챙기는 극장주와의 관계 설정 문제이다. 마지막 문제는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생기는 영화계의 수입 누수를 어떻게 최소화할 것이냐는 것이다.

사실 제작자와 배우, 극장주의 이해가 얽히고 설킨 이 문제들을 풀려면 그야말로 ‘영화계의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스크린쿼터 문제로 영화계 모두가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이 ‘새로운 질서’를 합의할 좋은 기회가 아니냐고 말하자 영화인들은 손사래를 친다. 오해받기 십상이라는 표정이다.

1999년은 한국영화사에서 특별한 해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기점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블록버스터 가능성을 활짝 연 작품 ‘쉬리(감독 강재규)’가 나온 것이 이 때다.

‘쉬리’는 국내에서 할리우드 대작 ‘타이타닉’의 관객 동원 기록까지 눌렀다. 일본과 홍콩에서도 돌풍을 일으켰다. 충무로는 “하면 된다”는 자기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 이사장은 ‘쉬리’ 신화가 탄생하게 된 것은 그에 앞서 한국영화 산업의 구조 변화 덕분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흥행 대박으로 번 돈 영화에 재투자되는 선순환구조 정착 절실
과감한 세금 혜택·해외시장 다변화로 자생력 키워야

90년대 폭발적인 비디오 보급으로 대기업들이 영화에 돈줄을 대기 시작했고, 이 때 신진 제작자, 감독들이 대거 충무로에 등장했다. 결국 이들이 영화판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또 96년 대법원 판결로 심의제가 없어지고 등급제로 바뀐 것도 한몫했다.

판에 박힌 스토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셈이었다. 여기에다 김대중 정부의 영화 지원책과 복합영화관의 탄생 등은 한국영화 부흥에 자양분이 됐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요인들보다 ‘쉬리’가 나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모태는 스크린쿼터라는 결론으로 다시 돌아갔다.

사진=박철중 기자

김 이사장은 2003년 ‘실미도’로 200억원의 이익을 냈다. 그 이전에 실패작 때문에 진 빚을 갚고 이것 저것 떼고 나니 손에 쥔 것은 ‘푼돈’이었지만, ‘실미도’ 성공은 그에게 물질적, 심리적으로 다시 베팅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영화 산업은 리스크가 큰 모험이다. 아무리 잘 될 것 같은 영화도 막상 뚜껑을 열면 딴판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의 작품 중 ‘천년호’의 흥행 실패는 거의 배신감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성공의 조건을 ‘1%의 영감과 99% 노력’이라고 설파한 에디슨의 말은 영화판에서는 수정돼야 한다.

‘1%의 영감과 39%의 노력, 나머지는 60%는 운’이라는 것. ‘운6기4’라는 얘기다. 그런데 왜 영화에 올인하느냐고 짓궂게 묻자 “산고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고 다시 아이를 낳는 어머니 같은 심정”이라고 짧게 답했다. 애정과 열정 없이는 영화를 제작하지 못한다는 말일 터이다.

15편의 영화제작, 충무로의 해외통

그는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은 지 20년째다. 1987년 미국에서 돌아와 삼촌이 운영하던 현진필름에 근무하면서부터이다. 77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부모를 따라 미국 이민을 갔다가 97년 영주권을 포기했으니 20년을 미국인으로 산 셈이다.

유창한 영어 덕에 충무로에서 해외통으로도 통한다. 92년 강우석 감독의 ‘미스터 맘마’ 시나리오를 썼고, 94년엔 지금의 한맥영화사를 설립해 15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그의 영화엔 최민수 주연이 많다. ‘가슴 달린 남자’ ‘사랑하기 좋은 날’ ‘피아노맨’ 등이 그것이다. 근데 수익면에선 별로 재미를 못 봤다. 최민수 본인은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냥 씩 웃는다.

원점으로 돌아가 한국영화 생존의 길을 다시 물었다. 그는 ‘세금 카드’를 꺼냈다. 대만과 영국, 독일, 호주 등 많은 나라들은 기업이 영화에 투자했을 때 과감한 세금 혜택을 준다는 것이다.

어차피 거대 자본의 미국영화와 경쟁하려면 대기업의 투자를 끌어 들여야 한다는 현실 인식 때문이다. 개인 투자가 주류인 우리 영화판에서는 투자 이익의 27.5%를 세금으로 떼고 있다. 이래서는 돈이 안 들어온다는 호소다.

또 하나가 해외시장 개척. 현재 한국영화 수출물량의 70% 안팎이 일본에 편향되어 있는 것이 문제다. 시장 다변화를 위해선 배우 중심의 한류보다는 이제 내용 위주로 가야 한다는 주문이다. 결국 성공의 제1조건은 한국만의 특색을 지닌 스토리라는 말이다.

40대 후반기로 접어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취미는 컴퓨터 게임. 스타크래프트, 용천기에 빠져 날밤을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술도 즐긴다. 미국서 결혼해 슬하에 공주 2명을 뒀다. 그의 최신작은 4월에 개봉하는 ‘모노폴리’. 양동근 김성수 윤지민 주연의 금융사기극을 다룬 작품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서는 기자에게 혼잣말로 툭 던진다. “오늘도 거리투쟁하러 가야지.”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