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와 미덕 강조…조용하지만 선 굵은 행보로 내실 다져

1995년은 LG그룹의 경영권이 창업 3세대로 넘어간 해다. 당시 구자경 명예회장은 장남인 구본무 회장에게 그룹의 미래를 맡겼다.

이 해에는 구씨 일가와 그룹을 공동으로 경영해온 동업자인 허씨 일가에게도 큰 변화가 있었다. 창업 세대인 고 허준구 LG건설(현 GS건설) 명예회장의 장남인 허창수 GS그룹 회장이 LG전선 회장에 취임하면서 그룹 경영 전면에 처음 등장한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LG그룹은 구본무 회장의 LG와 허창수 회장의 GS로 분리됐다. 회사 분할 과정에서 이렇다 할 잡음조차 없었던 두 가문의 동업 청산에 대해 재계에서는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GS그룹의 오너이자 조타수인 허창수 회장은 LG전선 회장 취임 이후 지난해 그룹 분리 때까지 재계에서 ‘은둔의 경영자’, ‘얼굴 없는 경영자’ 등으로 불렸다. 원체 얼굴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10년 간 구본무 회장과 함께 LG그룹을 원만하게 이끌면서 그룹의 2인자 역할뿐만 아니라 허씨 일가의 대표로서 소임도 조용하지만 충실하게 수행해냈다.

GS그룹 회장에 오른 것도 그의 자질과 역량을 전폭적으로 신뢰한 허씨 일가가 한 목소리로 추대한 덕분이다.

인화와 화합, 내실의 경영자

허 회장은 2002년 작고한 선친을 쏙 빼닮았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듣는 편이다. 훤칠한 용모와 깔끔한 매너도 판박이지만 무엇보다 경영 스타일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는 평가다.

대외적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회사 일을 챙기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는 집안의 전통이기도 하다. 창업 초기부터 구씨 일가가 주로 사업 확장, 공장 건설 등 ‘바깥살림’을 맡아 경영을 주도했다면, 허씨 일가는 숫자에 밝은 내력을 십분 발휘하며 재무, 영업 등 ‘안살림’에 전념해 왔다.

허 회장 역시 이런 구-허씨 간 역할 분담에 따라 LG상사 시절 잠시 일반상품 과장을 맡았던 기간을 빼면 줄곧 관리 부서에서 경영 수업을 받았다.

오랫동안 안살림을 챙겨온 덕분인지 허 회장의 경영관에도 그런 이력이 많이 묻어난다. 그가 경영과 관련해 평소 강조하는 덕목이 바로 ‘인화와 화합, 내실’이라는 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속을 중시하는 경영 철학은 허 회장 특유의 리더십으로도 나타난다. 그는 한 번 사람을 신뢰하면 끝까지 믿고 맡긴다.

전문 경영인들에게도 많은 권한을 위임하고 주요 사안에 대해서만 큰 흐름과 방향을 제시한다. 그런 까닭에 ‘선이 굵은 경영자’라는 평가도 자연스럽게 얻었다.

한편으로는 섬세하고 자상한 면모도 가졌다. 그와 함께 일을 해본 부하 직원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허 회장의 리더십은 온화한 성품과 친화력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말한다.

늘 자신보다 상대방을 먼저 배려할 뿐 아니라 분위기를 편하고 부드럽게 만들려고 하는 허 회장의 마음 씀씀이가 남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날 허 회장은 임원 몇 명에게 만보기를 직접 사서 나눠줬다. 평소 회사 업무를 챙기느라 운동도 제대로 못하는 그들의 건강을 챙겨주려고 했던 것이다. 허 회장의 자상함에 해당 임원들이 감동한 것은 불문가지.

학습 강조하는 변화와 혁신의 전도사

허 회장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얻는데 관심이 많고 이를 회사 경영에 반영하는 것도 신속하다. 평소 집무실에서 짬이 날 때마다 독서와 웹서핑을 즐기는데, 경영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발견했다 싶으면 얼른 실무자를 불러 이에 대한 토의를 할 정도다.

그는 학습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교육의 기회도 많이 부여한다. GS건설 임직원 30여 명을 일주일 동안 미국에 보내 최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인 AOL센터와 라스베이거스 건축전시회 등을 견학하도록 한 적도 있다. 이는 건설업계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자신이 꼼꼼히 읽은 책을 임직원들에게 권장하는 일도 빠뜨리지 않는다. 최근 GS건설 경영진이 허 회장의 추천에 따라 읽은 책 중에는 ‘미국 건설산업 왜 강한가’, ‘영국 건설산업의 혁신전략과 성공사례’ 등이 있다.

그의 이 같은 ‘학습 경영’이 목표하는 바는 뚜렷하다. 끊임없는 혁신과 변화를 통해 그룹의 지향점인 ‘밸류 넘버원’이 되자는 것이다. 그는 틈만 나면 임직원들을 향해 “여러분의 경쟁력이 바로 GS의 경쟁력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연마해 강한 실행력을 발휘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한다.

GS의 아침을 여는 외유내강형 총수

허 회장은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출근하기 전이지만 이 때부터 그는 무척 바쁘다. 먼저 전날 독서한 내용을 반추하거나 정리한 다음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아침 시간을 이용해 규칙적으로 즐기는 운동은 조깅과 걷기, 등산이다.

골프 실력은 평균 80대 중반. 하지만 회사 일을 챙기느라 라운딩을 자주 하지는 못하는 편이다.

1998년부터 안양LG(FC서울의 전신) 축구단 구단주를 맡아오기도 한 그는 축구에 대한 관심과 사랑도 남다르다. 구단 명칭을 FC서울로 바꾸고 서울 연고지를 갖게 된 것도 허 회장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후문이다.

허 회장은 사람들과 곧잘 어울려 대화를 즐기는 소탈한 성품의 소유자다. 술도 남들만큼은 즐긴다. 주로 마시는 술은 맥주지만, 위스키도 반 병 정도는 거뜬하다. 그러나 회사 경영과 마찬가지로 술을 마시는 데도 절제의 미덕을 중시하는 까닭에 주량을 넘기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밖으로는 소탈하면서도 안으로는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하는 허 회장. 수많은 임직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거대 기업을 이끌어가는 그의 카리스마도 바로 이런 외유내강형 리더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허창수 회장 주요 프로필

생년: 1948년

본적: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학력: 경남고등학교(67년 졸업)

고려대학교 경영학과(72년 졸업)

미국 세인트루이스대 MBA(77년 졸업)

주요 경력:

LG그룹 기획조정실 인사과장(77년)

LG상사 해외기획실 부장(79년)

LG상사 도쿄지사 상무(86년)

LG화학 부사장(89년)

LG산전 부사장(92년)

LG전선 회장(95년)

LG건설 회장(2002년)

GS그룹 회장(2004년)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