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에 수많은 족적 남긴 인사들 배출

▲ 1906년 5월1일 민영휘 선생 창립당시 '휘문의숙' 사진
‘천하의 영재를 얻어 나라를 지키자(得天下英材 求國)’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위태롭던 시기에 나라의 동량을 키우고자 문을 연 ‘민족사학 휘문’의 건학 이념이다.

휘문의 공식 역사는 1906년 고종 황제가 학교 설립자인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휘(1852년~1935년)공의 명자 ‘휘(徽)’자를 딴 ‘휘문의숙(徽文義塾)’이란 교명을 하사한 데서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 휘문의 역사는 민영휘 공이 사저에서 광의의숙을 개숙한 1904년부터 시작됐다.

광의의숙은 이듬해 학부에 청원을 하고 궁내부로부터 인허를 받아, 서울 종로구 원서동의 옛 관상감(觀象監) 터(현재 현대그룹 계동 사옥 자리)에 교사를 신축했다. 그리고 1906년 8월 20일 첫 입학시험을 치러 총 130명의 신입생을 선발했다. 이때 주로 가르쳤던 교과 과목은 지리, 어학(영어)번역, 물리, 작문, 산술(수학) 등 주로 근대 학문이었다.

휘문은 사립임에도 교과서 인쇄와 편찬을 하던 인쇄소 ‘휘문관’을 비롯, 서적실과 각종 과학실험 기기 등 당시 다른 학교보다 월등히 훌륭한 교육 시설을 갖췄다.

황제의 칙명에 의한 개교와 훌륭한 교육 시설 덕에 당시 많은 조선의 명문가 자제들은 일본 색채가 강했던 공립학교를 가는 대신 휘문으로 몰렸다. 흔히들 휘문을 ‘귀족 학교’ ‘신사 학교’라고 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휘문의 인물

■ 정ㆍ관계

최두선(전 국무총리ㆍ3회) 이순용(전 내무부장관ㆍ4회) 이선근(전 문교부장관ㆍ13회) 백두진(전 국무총리ㆍ18회) 이한기(전 국무총리ㆍ28회) 최영희(전 국방부장관ㆍ32회) 서정욱(전 과기처장관ㆍ44회)

■ 재계

김성수(오양수산 대표ㆍ41회) 이재욱(노키아 TMC 명예회장ㆍ52회) 권혁홍(신재양제지 사장ㆍ53회ㆍ현 휘문교우회장) 오남수(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ㆍ58회) 이문원(풍산금속 사장ㆍ58회) 정의선(기아자동차 사장ㆍ81회)

■ 학계

권덕규(한글학자ㆍ4회) 김동익(동국대 총장ㆍ6회) 이병희(전 한양대 총장ㆍ21회) 고병익(전 서울대 총장ㆍ33회) 백낙환(인제대 명예 이사장ㆍ36회) 장충식(전 단국대 총장ㆍ44회) 김정배(전 고려대 총장ㆍ52회)

■ 문화계

박용철(시인ㆍ1916년 입학) 안석주(삽화가ㆍ10회) 홍사용(시인ㆍ10회) 박종화(소설가ㆍ11회) 이승만(삽화가ㆍ12회) 권환(시인ㆍ13회) 정지용(시인ㆍ15회) 이무영(소설가ㆍ1920년 입학) 이태준(소설가ㆍ1921년 입학) 조택원(최초 무용가ㆍ17회) 오지호(화가ㆍ17회) 전형필(간송박물관 설립ㆍ18회) 이마동(화가ㆍ18회) 김유정(소설가ㆍ21회) 김영랑(시인ㆍ21회) 이인영(시인ㆍ21회) 박재륜(시인ㆍ23회) 정훈(시인ㆍ23회) 이해랑(연극인ㆍ1929년 입학) 최태응(소설가ㆍ1930년 입학) 이쾌대(화가ㆍ25회) 오장환(소설가ㆍ1931년 입학) 정진숙(을유문화사 대표ㆍ26회) 김종영(조각가ㆍ28회) 유현목(영화감독ㆍ37회) 백문기(조각가ㆍ38회) 김응현(서예가ㆍ39회) 임영웅(연극인ㆍ46회) 박근형(탤런트ㆍ50회) 방영웅(소설가ㆍ53회) 김훈(소설가ㆍ58회) 최용건(화가ㆍ61회) 이문규(화가ㆍ63회) 송승환(연극인ㆍ67회) 이용(가수ㆍ67회) 정흥순(영화감독ㆍ71회) 이승환(가수ㆍ76회) 이훈(탤런트ㆍ82회) 구본승(탤런트ㆍ84회) 유지태(영화배우ㆍ87회) 김동완(가수ㆍ90회) 이동건(탤런트ㆍ91회)

■ 기타

안창남(한국 최초 비행사ㆍ1915년 입학) 한창우(전 경향신문 사장ㆍ21회) 김성집(48년 역도 3위로 최초 올림픽 메달리스트 48년 역도 3위ㆍ29회) 임택근(전 MBC 아나운서ㆍ43회) 길보형(전 육군참모총장ㆍ54회) 이진강(서울시변호사협회 회장ㆍ54회) 차광웅(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ㆍ55회) 신동파(농구감독ㆍ55회) 차인태(전 MBC 아나운서ㆍ55회) 김종학(프로듀서ㆍ61회) 신태영(서울고검 부장검사ㆍ65회) 최희암(농구감독ㆍ66회) 손석희(방송인ㆍ67회) 진필중(야구선수ㆍ83회) 임선동(야구선수ㆍ84회) 서장훈(농구선수ㆍ85회) 현주엽(농구선수ㆍ86회)

또 휘문의 교풍을 ‘자유분방함’과 ‘문인적 기질’로 이야기하는 것도 학교 초창기 휘문 특유의 교육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휘문은 개교 초창기부터 체육 명문으로 통했다.

1907년 야구부를 창설했고, 같은 해 <황성신문>에 휘문이 황성기독교청년회 팀과 야구 경기에서 17대 8로 승리한 것을 보도한 것이 우리나라 신문 사상 최초의 스포츠 보도기사로 기록됐다. 그만큼 휘문인은 스포츠 명문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다.

또 휘문은 1920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을 상대로 합법적인 노동단체인 ‘대한노동공제회’를 조직해 투쟁을 전개한 역사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휘문은 일제에 대한 문화적 저항의 상징이었던 한글운동의 모태가 된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졌다.

1921년 당시 교장 임경재, 교사 권덕규, 가람 이병기 등을 비롯하여 교우 최두선, 한글학자 주시경, 장지영, 이승규 등이 휘문 기숙사에 모여 ‘조선어연구회’를 결성했다. 이후 연구회는 1931년 ‘조선어학회’로, 1949년에는 ‘한글학회’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밖에도 휘문은 1923년 창덕궁으로부터 악기 72점을 기증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취주악대를 창설하고 오늘날까지 휘문을 상징하는 클럽으로 자리잡고 있다. 매년 열리는 학교 페스티벌인 ‘한티축제’가 주변의 여고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축제가 된 것도 휘문의 이런 ‘끼’가 면면이 이어져 오기 때문이다.

휘문은 100년의 명문 사학답게 휘문 출신들은 한국 근현대사에 수많은 족적을 남겼다. 특히 휘문은 숱한 한국 최초의 기록을 갖고 있다. 우선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이 휘문 출신이고,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 역도 미들급 경기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첫 메달(동)을 딴 김성집 역시 휘문인이다.

또 휘문은 둘째 가라면 서러울 문화ㆍ예술계 산실이다. 소설가로는 박종화, 이무영, 이태준, 김유정, 김훈 등을 비롯해서, 시인으로는 박용철, 홍사용, 정지용, 김영랑 등이 있다. 특히 정지용은 휘문 출신이면서 이 학교 영어교사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 언론인이었던 장지연도 휘문의숙 숙장(교장)을 지냈다. 이밖에도 영화감독 유현목, 연극인 임영웅, 탤런트 박근형 등 휘문이 배출한 문화ㆍ예술계 인사는 열거하기에 벅찰 정도다.

1978년은 휘문에게 100년 역사 중 또 다른 획을 그은 해였다. 교사(敎舍)를 지금의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전한 것이다. 이전 당시만 해도 강남 허허벌판에 교사만 덩그러니 세워져 걱정도 많았지만 지금은 강남의 입시 1번지에서도 제일의 명문으로 자리잡았다.

최근 한 중앙 일간지가 분석한 한국 사회의 파워엘리트에 관한 기사에 따르면, 휘문은 1970년대생 이후 전국 고등학교의 엘리트 배출 순위에서 3위를 차지할 정도다.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학교와 4만여 동문들은 뛰어난 입시 성적뿐만 아니라, 자유분방한 문사적 교풍을 이어갈 수 있는 묘안 찾기에 머리를 맞대고 있다.

또 100주년을 맞아 교내 기념탑을 건립하고, 5월 15일에는 잠실체육관에 동문들이 모여 ‘휘문인 큰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 11월 28일에는 ‘휘문 100년’ 편찬 기념회도 열 예정이다.


인터뷰 - 김선규 교장
"자유인 · 선비 기질 휘문 전통 이어갈 것"

휘문고 김선규 교장은 휘문고를 졸업하지는 않았지만 1976년 국어교사로 부임한 이래 30년 동안 휘문인을 길러낸 또 다른 ‘명예 휘문인’이다. 휘문고가 종로구 원서동 교사를 떠나 강남구 대치동에 둥지를 튼 것이 78년이니 김 교장은 대치동 휘문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셈이기도 하다.

김 교장은 휘문의 교풍에 대해 ‘선비적 기질’과 ‘자유 분방함’으로 요약했다. 그는 “과거 김유정, 이태준, 이무영, 김영랑, 정지용을 비롯 근래의 방영웅, 김훈 등 걸출한 문학인을 특히 많이 배출한 것도 이런 교풍에 힘입은 바 크다”고 풀이했다.

그는 아직도 월탄 박종화 선생을 기념해 만든 ‘희중(稀重) 문학상’은 선배들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김 교장은 사실 대치동 휘문고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입시 1번지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학교가 됐다는 점이라고 했다.

입시 성적면에서 과거 원서동 시절보다 괄목한 성장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선배 동문들도 훌륭한 입시 성적으로 휘문인의 사회적 영향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는 데에 자부심이 대단하다.

또한 과거 선배 동문을 말하는 원서동 세대와 70년대 후반 졸업생들인 대치동 세대 간도 큰 단절없이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 휘문고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김 교장은 또 “가을 축제 때 주변 여학교로부터 가장 큰 사랑을 받는 게 휘문 축제”라며 “우리 학생들은 공부도 잘 하지만 멋지게 노는 데도 빠지지 않는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김 교장은 “기라성 같은 문인들과 예술가를 배출했던 문예반과 합창반의 전통이 과거와 같지 않은 상태”라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던 교풍으로 이름났던 휘문의 전통이 요즘은 입시교육 탓에 이어가기 힘든 상황이 된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앞으로 입시 성적에만 만족하지 않고, 100년 휘문의 전통도 학생들이 몸소 체험하고, 이를 다시 이어갈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 어떤 것인지 교우회 등과 의논할 것”이라고 밝혔다.

개교 100주년을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는 “아직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동문들이 불쑥 찾아와 선뜻 후배들을 위한 정성어린 돈을 내놓을 때 휘문의 힘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 교장은 개교 100년을 맞는 5월 1일에 교내에서 대대적 개교 기념행사를 여는 것은 물론, 같은 달 15일에는 잠실체육관에서 동문들이 대거 모여 ‘휘문인 큰 잔치’도 벌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