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트랜스젠더로 살아가기

성(性)전환자(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미리 알아서 생긴 선입관 때문이었을까. 처음 마주한 최정은(30ㆍ가명) 씨와 한영일(27ㆍ가명) 씨는 언뜻 봐서는 타고난 성과 현재의 성을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들의 외모에선 각각 남성과 여성의 흔적이 아직은 약간씩 남아 있었던 것.

하지만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눌수록 본래의 성은 희미해졌고 반대로 현재의 성은 더욱 또렷하게 다가왔다. 최 씨와 한 씨는 ‘천생’ 여성과 남성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들에게 ‘전환’은 단순한 바꿈이 아닌 제자리를 찾아가는 ‘복원’이었던 셈이다.

성전환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이 바뀌어가고 있다. 최초의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가 금단의 벽을 조금씩 허물어온 데 이어, 최근 대법원은 성전환자의 호적상 성별 정정 신청을 허가하는 결정을 내려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불과 5~6년 사이에 일어난 획기적 변화다.

그러나 이 같은 변화의 기운은 대부분 성전환자들에게는 아직 남의 일처럼 여겨질 뿐이다. 우리 사회 저변에서는 여전히 성전환자들을 ‘아웃사이더’로 취급하는 시선이 만연해 있다. 연예인 하리수는 하나의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쉽사리 받아들이지만 일상에서 우연하게라도 만나는 평범한 성전환자들은 멸시와 배척의 대상일 뿐이다.

최 씨와 한 씨가 성전환자로 살아온 짧지 않은 세월은 그 같은 냉혹한 현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들은 가정, 학교, 직장, 그 어느 곳에서도 따뜻한 안식은 얻지 못했다. 고독과 혼란, 아픔만이 그들의 삶을 점철한 단어들이다. 두 사람이 털어놓는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로 살아가기’, 그 가슴 아린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성 정체성 혼란

“다섯 살 때 사촌 남동생과 함께 목욕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우리를 씻겨주던 어머니한테 무심코 ‘엄마, 난 언제 고추가 생겨?’하며 물었었죠. 어머니는 웃어 넘겼지만 제 기억에는 그때가 스스로를 남자로 생각하게 된 최초의 사건이 아니었나 싶어요.”

한 씨의 기억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또래 여자 아이들과는 너무나 다른 생각과 행동을 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이소룡과 성룡이 나오는 홍콩 무협영화에 흠뻑 빠져들었다. 약한 여자를 구하는 영웅적 주인공의 모습에 매료됐던 것이다. 4학년 때부터는 아예 머리를 남자애들처럼 자르고 남자 옷을 입고 다녔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본격적으로 체력을 기르기 위해 신체 단련 운동을 했다. 태권도, 합기도 등 격투기를 배웠고 아침마다 모래주머니를 달고 뜀박질도 했다. 오토바이도 이때 처음 타기 시작했다. 본디 자기 주장이 강하고 활달한 편이었던 탓에 부모님도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최 씨가 스스로를 여자로 여긴 것도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다. 또래 남자 아이들이 골목을 뛰어다니며 놀 때 그는 집에서 어머니의 가사일을 따라 했고 소꿉놀이를 즐겼다.

남녀를 구분해서 생활 지도를 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혼란이 심해졌다. 그때부터 최 씨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왜 이럴까 하는 고민도 깊어졌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어머니 화장품을 몰래 자기 방으로 갖고 와서 수시로 화장하는 연습을 했던 것.

“어렸을 때 이미 나는 여자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털어놓지는 않았어요. 부모님도 매우 엄한 분들이어서 감히 말을 끄집어낼 생각을 못했죠.”

가정, 학교에서 깊어지는 갈등과 불화

최 씨는 자신의 ‘본성’대로 살지 못하는 게 갑갑했지만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단발머리 여학생처럼 헤어스타일을 가꾸기도 했다.

빈혈 증세로 자주 병원 신세를 지는 데 다 평소 말수도 극히 적어 ‘열외’ 학생으로 분류된 덕분에 머리 기르는 일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다만 아버지가 가끔 못마땅한 표정으로 꾸지람을 내리면 할 수 없이 깎는 시늉을 해야만 했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집을 떠나게 됐을 때는 오히려 마음이 너무 편했어요. 부모님 눈치 볼 필요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으니까요. 별별 학생들이 다 모이는 캠퍼스에서는 그냥 ‘개성이 강한 친구’ 정도로 보여질 뿐이니 행동에 제약은 없었던 셈이죠.”

최 씨가 주변 시선을 어느 정도 의식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한 씨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모색하며 살아온 경우다. 그 덕분에 학창 시절부터 모진 경험도 적잖이 했다.

한 씨는 남녀공학이었던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매우 활동적인 여학생’으로 여겨졌다. 공부도 잘하고 학생 활동도 모범적으로 하는 데다 운동까지 잘해 친구들뿐 아니라 선생님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여자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여자 친구들과는 이야기가 안 통했을 뿐 아니라 쳐다보기도 싫은 교복 치마를 입어야 했다. 여성성을 강조하는 학교에서 그는 숨이 막힐 듯했다.

그 무렵 한 씨는 첫사랑을 하게 된다. 같은 학교 1년 선배였다. 물론 남자와 여자로서의 만남이었다. 그러자 “쟤, 남자 아니냐”, “동성애자일거야” 등과 같은 소문이 무성하게 퍼져나갔다.

결국 한 씨는 2학년 1학기 때 여자 친구와 가출을 감행하고 만다. 두 달 뒤 돌아왔지만 곧바로 자퇴서를 내고 학교를 떠났다.

거친 사회로의 첫발, 그러나 험로만이

한 씨는 학교를 그만둔 뒤 집에서도 나와 자취를 했다. 얼마 후에는 여자 친구와 동거를 시작했다.

독학으로 공부한 컴퓨터 실력 덕분에 한 온라인게임 업체에서 프로그램을 코딩하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번 돈으로 생계비와 여자 친구 학비 등을 대며 틈틈이 대입 시험을 준비했다.

매끄러운 일솜씨를 보이자 회사에서 몇 달 뒤 정규직을 제의해 왔다. 그러나 조건은 좋았지만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서 남자 행세를 해온 터에 차마 주민등록등본과 신분증을 제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닥치는 대로 일자리를 구했다. 주로 치킨집, 중국집 등에서 배달하는 일을 했다.

한 씨는 어렵게 돈을 벌어가며 여자 친구도 대학에 보냈고 자신도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와 은밀한 시간을 보내는 현장을 본 것.

“나는 온전한 남자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밀려들더군요. 여자 친구와 헤어진 뒤에도 그런 자괴감 때문에 수 차례 자해를 하기도 했고 심지어 자살을 떠올린 적도 있었어요. 자포자기하는 심정에다 돈도 없어서 결국 대학도 중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최 씨는 방위산업체에서 군 복무를 대신했다. 남자들만의 세계인 군대에는 도저히 갈 수 없어서 생각해낸 선택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가는 데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방위산업체 복무 기간을 마친 뒤부터 상황은 꼬여만 갔다. 무엇보다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려 50~60차례나 지원서를 냈지만 마지막 면접에서 퇴짜를 맞기 일쑤였던 것.

“입사 서류에는 남자로 돼 있는데 외모는 여자처럼 보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이후 최 씨는 평범한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편의점이나 술집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하며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돈을 버는 게 고작이다.

직업 선택의 기회마저 박탈

사실 성전환자들에게 보통 사람들이 다니는 직장은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다. 전문적인 지식이나 능력이 있어도 이를 써먹을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다. 단지 성전환자라는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성전환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무척 제한적이다.

최 씨처럼 남자에서 여자로 전환한 경우(Male to FemaleㆍMF)는 대부분 유흥업소로 빠질 수밖에 없고 한 씨처럼 여자에서 남자로 전환한 경우(Female to MaleㆍFM)는 막노동이나 배달, 운전 같은 일만 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간혹 형제나 친구 등의 호적을 빌려 취업하는 경우도 있는데, 불의의 사고라도 당하면 산재나 보험 처리조차 받을 수 없다고 한다.

/ 임재범 기자

이에 대해 최 씨는 “MF들은 일은 힘들어도 취업이 쉽고 돈벌이도 좀 되니까 밤업소 쪽으로 많이 간다”며 “하지만 돈을 벌어도 대부분 성형 수술 비용으로 나가거나 믿었던 주변 사람들한테 사기를 당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탄식했다.

한 씨도 “대다수 성전환자들은 일정한 직업을 구하기가 어려워 금전적으로 쪼들리게 되고 결국 이 때문에 경제적 빈곤의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며 안타까움을 털어놓았다.

몸의 정체성 찾기 위한 준비

두 사람은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완벽한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최 씨는 3년 전부터 여성 호르몬을 투여하기 시작했고, 한 씨는 그보다 짧은 1년7개월 동안 남성 호르몬을 주입해 왔다. 호르몬 치료는 자신이 원하는 성으로 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성전환 수술을 받기 전에 몸을 서서히 준비 상태로 만들어가는 수단인 것이다.

그런데 호르몬 주사를 맞는 것도 그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보통 일주일이나 보름에 한 번 정도 1~2ml의 양을 계속 주입해야 하는데, 그 부작용으로 간과 신장의 건강이 조금씩 나빠지는 것이다.

경제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다. 호르몬은 보험 적용이 안 되는 탓에 병원에서 부르는 게 값이다. 한 번 주사를 놔주면서 10만원씩 받는 병원도 있다고 한다. 때문에 상당수 성전환자들은 처방전을 끊어 한꺼번에 10회분 가량의 호르몬을 저렴하게 구입해 직접 투여하는 방법을 쓴다.

두 사람은 수술을 받을 계획도 이미 잡아 놓았다.

한 씨는 올 겨울 성전환 수술의 ‘메카’인 태국으로 건너가 가슴, 자궁을 적출하는 1차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다. 최 씨는 수술 비용이 아직 마련되지 않아 새로운 탄생을 내후년쯤으로 기약하고 있다. 현재 두 사람이 사귀고 있는 연인들도 수술에 적극 찬성하고 있다.

“가장 큰 소망이요? 모든 성전환자에게는 수술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게 유일한 꿈이나 마찬가지죠. 또 ‘트랜스’라는 꼬리표를 떼고 남자 아니면 여자로 봐주길 바라는 마음도 간절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거죠. 트랜스젠더들은 가족으로부터도 소외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가족을 구성하려고 하는 욕구와 애착이 무척 커요. 정말 저를 이해하는 동반자를 만나 예쁜 아이들도 입양해 알콩달콩 살고 싶어요.”

원치 않는 성의 육체를 마치 천형(天刑)처럼 걸머지고 태어난 성전환자들. 그들은 그 굴레를 벗어 던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을 현대 의학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더욱 절실한 것은 정작 주변의 따뜻한 배려와 관심, 그리고 격려가 아닐까. 그들은 극소수이지만 또한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일부이기 때문이다.

주사 맞으면 어떻게 변할까

성전환자들은 호르몬 주사를 처음 맞는 순간, 생물학적 성(性)과의 본격적인 결별로 접어든다. 성기를 바꾸는 외과적 수술을 하기 전에라도 호르몬을 통해서 원하는 성의 특징들을 어느 정도는 갖출 수 있기 때문다.

실제 최정은 씨와 한영일 씨는 외견상 각각 여성과 남성의 면모를 적잖이 갖추고 있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전환기' 단계로 보는 게 더 정확할 듯했다. 그들은 호르몬의 효과는 강력했다고 털어놓는다.

먼저 여성이 남성 호르몬을 주기적으로 맞게 되면 생리가 멈추고 음핵이 커지며 털이 난다. 음성도 점차 굵어지는데 '이영애 목소리'가 '최민식 목소리'로 바뀔 만큼 변화가 크단다. 한 씨의 경우엔 머리카락이 빠지고 때아닌 여드름이 나는 부작용을 겪기도 했다고.

남성이 여성 호르몬을 투여 받는 경우도 큰 변화가 뒤따른다.

가슴이 나오고 피부가 고와지며 남근의 발기 강도나 횟수가 눈에 띄게 저하된다. 아울러 근육량이 줄어들면서 힘도 빠진다. 최 씨는 호르몬 투여를 시작한 후 어느날 물건을 들다가 허리가 삐끗하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의 '남자'였을 땐 가뿐히 들어올릴 무게였지만 '여자'로서는 벅찼던 것.

어느 쪽이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후유증은 피로감이 쉬 생기고 가끔 어지럼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간과 신장이 나빠지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부작용. 그만큼 다시 태어나는 데는 적지 않은 '산고'를 치러야 하는 셈이다.

가족들도 우리 마음을 몰라요

최 씨의 형제들은 그를 '여자 같은 남자' 정도로 여긴다. 아버지의 생각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어머니는 최 씨가 성전환자라는 사실을 안다. 1년 반 전쯤 그가 자신의 비밀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최 씨의 어머니는 처음엔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요즘은 자식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마음 고생을 얼마나 했을까 측은한 생각도 든다. 하지만 1년에 겨우 한두 번이지만 자식을 볼 때마다 꼭 꺼내는 말은 "남자로 살아라"는 것이다.

한 씨의 부모는 그를 한동안 '동성애자'로 오판했다. 병원에 다니며 한 씨 문제를 상담한 적도 많았다. 그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많았던 아버지는 지난해 세상을 일찍 등졌다. 한 씨는 부친상을 치른 후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자신의 일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해도, 인정도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너를 믿어. 그 길(남자가 되는 것)로 가지는 않을 거다"라는 말만 되뇌일 뿐이었다. 다만 한 씨의 여동생은 이날 이후 그를 '오빠'라고 부른다고 한다.

대부분 성전환자들은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서든, 부모에 쫓겨나든 집을 떠나게 된다고 한다. 가족조차도 피붙이가 성전환자라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과 연을 끊은 채 외롭게 살아가는 성전환자가 적지 않다.

그들에게 가족을 찾아주는 일은 결국 우리 사회가 성전환자에 대한 인식을 멸시에서 포용으로 '전환'하는 것, 그 방법밖에는 없을 듯하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