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성별 변경' 허용으로 국회 법제화 길 열어

▲ 성전환자 호적정정을 허용하는 결정을 내린 대법원.
지난 6월 22일은 국내 성(性)소수자 인권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날로 남게 됐다.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ㆍ김지형 대법관)는 성전환 수술을 받은 50대 여성 A씨가 호적상 성별을 남성으로 변경해 달라며 낸 호적정정 신청 재항고 사건에 대해 성별 정정을 불허한 원심 결정을 파기하고 사건을 청주지방법원으로 돌려 보냈다.

대법원은 결정 요지에서 “성전환자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향유하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으며 이런 권리들은 질서유지나 공공복리에 반하지 않는 한 마땅히 보호돼야 한다”며 헌법상의 원칙을 강조했다.

이번 결정은 성전환자의 호적 정정을 허용하는 기본 원칙을 최초로 천명한 동시에 성전환자의 법률적 의미와 요건에 관한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는 게 대법원의 자체 평가다.

이에 따라 각급 법원에 계류 중인 동일 내용의 사건은 물론 앞으로 접수될 유사 사건들에 대한 심리와 판단의 지침이 마련된 셈이다.

대법원은 아울러 성전환자에 대한 구제는 의학적ㆍ법률적 요건과 절차 등에 관한 제반사항을 정한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해결 방법이라고 밝혀, 국회의 후속 입법 활동을 촉구했다. 성전환은 기존의 법에서 고려하지 않은 새로운 문제인 까닭에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입법적 결단을 통해 해결해야 할 사안이라는 것이다.

사실 국회 차원에서 성전환자 관련 법률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은 이미 16대 국회 때에 한 차례 있었다.

2002년 11월 당시 김홍신 한나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성전환자 성별변경 등에 관한 특례법’이 바로 그것. 이때는 입법 관련 공청회도 개최하는 등 열띤 논란이 이어졌으나 회기 만료로 법안이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 대법원 결정에 따라 국회의 성전환자 관련 입법 논의가 다시 활기를 띨 계기는 마련된 셈이다.

현재 국회 밖에서는 성소수자 단체, 인권 단체 등 50여 개 단체가 함께 뭉친 ‘성전환자 성별변경 관련법 제정을 위한 공동연대’(이하 공동연대)가 성전환자 관련법 제정을 추진하는 활동을 왕성하게 펼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민주노동당이 이 움직임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법 제정을 추진해온 공동연대는 산하 법제국에서 관련 전문가들과의 수 차례 논의와 검토를 거쳐 최근 법안 초안을 완성한 상태다. 민노당은 이를 토대로 오는 9월 정기국회 때 여야 의원들과 공동으로 ‘성전환자 성별변경 및 개명에 관한 특례법’(가칭)을 발의한다는 계획이다.

법안은 성전환자의 범위와 관련해 성전환 수술을 필수적인 요건으로 규정하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는 막대한 비용과 위험을 개개인에게 떠안기는 현재의 성전환 수술 시장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구태여 성기 성형수술을 원하지 않는 성전환자들까지 성별 변경을 위한 법적 요건에 맞추기 위해 수술대에 눕게 하는 폐단은 예방하자는 것이다.

대법원이 22일 결정에서 성전환자의 판가름 조건 중 하나로 제시한 ‘의학적 기준에 맞춰 성전환 수술을 받아 반대 성으로서의 외부 성기를 비롯한 신체를 갖춰야 한다’는 조항과는 정면 배치되는 셈이다.

이와 관련, 노회찬 민노당 의원은 “성전환자의 법적인 판별 기준에 외부 성기 성형을 조건으로 달지 않은 것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의 성전환자들에 대한 ‘보호 입법’의 취지를 살린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실제 상당수 성전환자들은 중ㆍ고교 자퇴 등으로 교육 기회를 박탈당하는가 하면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배척당한 끝에 극빈층 생활을 면치 못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때문에 열악한 성전환자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감안해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에 대해 최현숙 공동연대 운영위원장은 “성전환 수술은 비용도 비쌀 뿐 아니라 수술 위험성, 의료 사고 등의 간단치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며 “때문에 정소나 난소 정도만 제거하면, 즉 ‘영속적으로 생식 능력이 결여된 상태’만 되면 불가역적인 성전환으로 인정해주도록 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생식 불가능한 상태’만을 성전환자 성별 변경 조건으로 하고 외관 근사 수술을 필수적으로 요구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주 정부마다 다른 규정을 가진 미국에서도 몇몇 주에서는 수술을 요건으로 강제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 성전환자 성별변경 관련법 제정을 위한 공동연대의 기자회견.

공동연대 법안의 내용 가운데 또 눈길을 끄는 것은 성별 변경의 사실을 호적, 신분등록부 등의 공부에 남기지 말자는 대목이다. 성별 변경을 결정한 가정법원의 판결 자료에만 기록이 남도록 하고 나머지 모든 공부에는 성별 변경 사실 자체를 배제하자는 것.

이는 물론 성전환자들의 사생활을 최대한 보호하자는 취지다. 굳이 트랜스젠더라는 딱지를 개개인에게 붙여 놓지는 말자는 것이다. 현재는 성별 정정이 받아들여지면 호적 등본에 ‘남에서 여로 정정’ 또는 ‘여에서 남으로 정정’이라는 기록이 남는다.

이밖에 정부와 사회가 성전환자 인권 보호를 위해 해줘야 하는 몫도 있다.

최현숙 위원장은 “성전환자 치료와 수술 등을 위한 보건의료 시스템도 한시 바삐 갖춰야 한다. 또한 국민건강보험의 적용을 받도록 하는 등 국가가 성전환자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관리 체계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성전환자 조기 상담 시스템과 일반인들의 성소수자 인권 교육 등도 반드시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지 성별 변경만 인정할 게 아니라 성전환자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일종의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그 핵심에는 역시 ‘차이’를 인정하고 ‘소수’를 포용하는 성숙된 의식이 전제가 될 수밖에 없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