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핵심에 접근하는 단서 제공, 지능적 범죄 양상에 따라 수사기법도 고도화·과학화

서래마을 냉동고 영아 유기 사건으로 한국의 과학수사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유기된 영아 사체 2구, 프랑스인 주인 쿠르조 가족이 썼던 칫솔과 귀이개, 그리고 그의 부인 베로니크가 자궁적출 수술을 받을 때 병원측에서 채취해둔 자궁조직 시료. 여기에서 각각 추출된 유전자 분석을 통해 쿠르조 부부가 영아들의 부모로 밝혀짐으로써 경찰은 사건의 진상에 한걸음 더 다가섰다.

당초 경찰은 서래마을 사건의 특이한 양상 때문에 수사에 난항을 겪는 듯했다. 또한 용의선상에 처음 올린 인물들도 필리핀인 가정부 등 쿠르조의 주변 여인들이었다. 누구든 심증적으로는 그렇게 추론하기가 십상이었다. 심지어 범죄학자들조차 그럴듯한 가설을 내세워 사건의 시나리오를 써내려 가기도 했다.

하지만 사건에 대한 이런저런 추측들은 유전자 분석이라는 과학수사 기법에 의해 일거에 효력을 잃고 말았다. 아울러 외곽을 맴돌던 경찰 수사도 핵심을 향해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과학수사의 힘이 빛을 발한 것이다.

과학수사는 쉽게 말해 과학을 활용하는 수사 또는 수사 방법의 과학화를 의미한다. 전자는 수사에 과학을 동원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수사를 과학적, 합리적, 논리적 원칙과 방법에 따라 한다는 것이지만 결국은 ‘똑똑한 수사’라는 점에서 같다고 볼 수 있다.

과학수사는 미궁에서 빠져나오는 빛

과학수사에는 사실상 모든 영역의 학문적 지식이 동원된다. 수사에 도움이 된다면 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공학은 물론 심리학, 사회학 등에 이르기까지 활용되는 학문 분야에 한계는 없다. 증거를 찾기 위한 기술적 측면에서도 시신 부검, 지문 감식, 거짓말탐지기 이용, 유전자 감식, 필적 감정 등 가능한 모든 감식 수단이 활용된다.

과학수사는 마치 과학이 발달한 현대의 수사 기법처럼 들리지만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 수준에 맞는 과학수사는 있어 왔다. 다만 현대 사회에서 과학수사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는 것은 그만큼 오늘날의 범죄 양상이 복잡다양하고 지능적이어서 수사 기법도 고도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일선 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과학수사의 영역도 덩달아 넓어질 수밖에 없다”며 “범죄자들도 과학적 지식과 수법을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을 잡기 위해선 한 수 위의 첨단 과학수사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올해 초 10만원권 자기앞수표를 정밀하게 복사한 위조 수표가 나돌아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사용된 장소가 유흥업소인 것으로만 밝혀졌을 뿐 위조범 일당에 대한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수사가 원점에서 헤매고 있을 때 결정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것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경찰이 위조 수표에 대한 감정을 의뢰해 오자 최근 자체 개발한 식별마크 분석 소프트웨어인 IPD(Identifier of Printed Document)를 이용해 위조 수표를 복사한 디지털 컬러 복합기의 제조사, 일련번호, 출력시각을 해독해낸 것이다.

국과수로부터 낭보를 받은 경찰은 일사천리로 추적 수사를 벌여 마침내 위조범 일당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만약 IPD라는 장비가 아직까지 개발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경찰의 수사는 한동안 미궁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날 혼인빙자 간음 사건이 검찰에 송치됐다. 이 사건은 남녀 당사자의 진술만 존재하고 다른 증거는 전무한 상황이어서 실체적 진실 규명이 곤란한 경우였다. 고민하던 수사팀은 피의자가 의대생이라는 점을 주목해 그의 노트북 컴퓨터를 조사하기로 했다. 혹여 노트북을 이용해 고소인과 밀어를 속삭였을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피의자는 웬일인지 노트북을 완전히 파손시켜 버린 상태였다. 수사팀의 의심이 확신으로 접어들었다. 수사팀은 곧바로 부서진 노트북의 하드디스크를 샅샅이 뒤져 임시 저장 파일에 남아 있던 피의자와 고소인 간의 은밀하고 사적인 채팅 내용을 증거로 확보할 수 있었다.

지난 2003년 경남에서는 9세 여아가 독극물을 먹고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수사 당국은 사건이 석연치 않은 점을 간파, 아버지 A씨를 살해 용의자로 검거했다. 그가 딸의 이름으로 보험에 가입한 뒤 보험금을 노려 천륜을 저버린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물증이 없어 수사가 난항을 거듭했다. 그러던 차에 피의자에 대한 ‘뇌파 분석’ 결과가 뜻밖의 돌파구를 열어줬다. 수사팀이 범행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과자와 음료수를 피의자에게 보여주자 뇌파가 급격한 변화를 보인 것.

뇌파 분석은 사람이 사물을 접할 때 특정 사물에 대해서 뇌파가 변하는 원리를 이용한 새로운 과학수사 기법. 피의자에게 범행에 관계됐을 법한 사물들을 보여준 뒤 특정 사물에 대해 ‘양성 반응’을 나타내면 이를 범행의 증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법원은 결국 검찰이 제출한 뇌파 분석 자료의 신빙성을 인정해 증거 자료로 받아들이고 A씨에 대한 구속영장도 발부했다.

이처럼 최근 과학수사 기법은 물증을 찾는 것은 물론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증거를 찾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경찰은 올해 사건 현장의 흔적들에서 범인들의 심리를 분석해내는 프로파일러(profilerㆍ범죄분석팀) 요원들을 본격 가동하는가 하면 검찰도 피의자의 심리, 행동, 진술을 종합 분석하는 기법을 개발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건져 올린 증거가 항상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거짓말 탐지기로 알려진 심리생리분석 기법을 거쳐 얻어진 증거가 법원에서 채택이 안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완벽 수사 위해 끊임 없는 진화 계속

대검 심리분석실 정재영 검사관은 “심리생리분석의 결과는 타당도가 85~90% 정도 되지만 검사관의 능력에 따라 들쭉날쭉한 단점이 있다”며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심리생리분석의 증거력을 높이기 위해선 표준화된 분석 절차와 기법 마련이 필요한 실정”이라고 밝혔다.

‘완전 범죄’를 꿈꾸는 범인들과 ‘완벽 수사’를 지향하는 수사관 사이에서 과학수사의 발전은 끝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정말로 범인의 마음을 그대로 읽어내는 날도 오지 않을까.

▲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 범죄심리분석 담당 형사들. 과학적 논리와 사고로 무장한 베테랑들이다. / 왕태석 기자
▲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 범죄심리분석 담당 형사들. 과학적 논리와 사고로 무장한 베테랑들이다.
/ 왕태석 기자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