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전자 감식계 대부' 최상규 박사 - 법생물학 개척자, 1991년 국내 최초 유전자 감식 기법 도입

어느날 야산에서 한 젊은 주부가 변사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곧 여인의 신원을 확인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용의선상에는 남편도 올랐지만 그는 아내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에 예비군 동원훈련을 받기 위해 군부대에 입소해 있었다. 완벽한 알리바이가 성립됐던 것이다.

사건의 단서는 의외의 곳에서 발견됐다. 그것은 피해자 남편의 운동화에 살짝 묻어 있던 ‘풀물’이었다. 수사 관계자는 혹시 하는 생각에 변사체 발견 현장의 풀을 채취해 신발에 묻어 있는 풀물과 성분 비교를 했다. 분석 결과 동일한 식물 성분으로 나타났다. 남편은 아내 몰래 보험에 든 후 사건 당일 군부대를 몰래 빠져 나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국내 범죄 수사에 ‘수사 식물학’이 처음 적용된 사례였다. 범죄 단서를 찾아낸 주인공은 최상규(62ㆍ이학박사)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유전자분석과장. 법생물학의 개척자인 그는 1991년 국내 최초로 유전자감식 기법을 도입하고 발전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최근 한국과 프랑스 양국의 관심사가 된 서래마을 냉동고 영아 유기 사건의 국과수 유전자 감식 결과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한다. 한 번도 실수가 없었던 전문가들이 내놓은 결과라서 틀릴 리가 없다”고 힘줘 말했다. 영아들의 부모로 밝혀진 프랑스인 부부측이 “한국의 DNA 조사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고 반박한 데 대해 국내 유전자감식계의 대부로서 쐐기를 박은 셈이다.

미국도 놀란 국과수 유전자 감식 작업

이 같은 그의 확신은 국내 유전자 감식 기술 수준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97년 발생한 대한항공 여객기의 괌 추락사고 때 국과수 요원들은 대거 사고 현장에 급파돼 희생자들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한 유전자 감식 작업을 미국측과 공동으로 벌였다. 그때 국과수 팀은 미국 팀보다 더 빨리 정확한 감식 결과를 내놓아 미국을 놀라게 했다.

“처음에 우리가 감식을 하겠다고 하니 별로 미덥지 못하다는 눈치였어요. 그래서 내가 미 연방수사국(FBI)에서 유전자 감식 연수를 하고 받은 자격증을 내보이니 그럼 같이 하자고 하더군요. 하지만 막상 우리 쪽이 더 신속하고 정확하게 감식을 끝내자 그 쪽도 입을 다물 수가 없었죠.”

최 박사는 유전자 감식의 쓰임새가 앞으로도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극미량의 단서로도 범죄 증거를 정확하게 밝힐 수 있는 첨단 수사기법이라는 점 때문이다.

유전자 감식 기술은 지금도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다. 개인 식별을 할 수 있는 유전자형의 종류가 많아져 교차 분석을 통한 정확도 역시 크게 높아지는 중이다. 분석 장비 또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예전에는 감식 작업의 상당 부분을 수작업에 의존해야 했지만 최근에는 유전자증폭기, 유전자자동분석기 등 첨단 장비들이 한꺼번에 수십 가지의 증거물을 분석할 수 있어 감식의 신속, 대량화가 가능해졌다.

최 박사는 유전자감식을 통해 범인을 잡는 것뿐 아니라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들의 굴레도 벗겨줄 수 있었기 때문에 더 큰 보람을 느꼈다고 현역 시절을 회고했다.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죄인을 만들지 말라’는 금언을 실천할 수 있었다는 것.

“사람의 유전자형은 바뀌는 게 아니니까 유전자 감식은 가장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돼요. 뭐가 됐든 ‘세포’만 있으면 다 밝혀낼 수 있어요.” 비록 은퇴는 했지만 유전자 감식에 대한 노학자의 애정과 신뢰 또한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