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옷감 등 생활용품에서 로봇·반도체 등 첨단소재로 활용세계서 '명품'으로 대접… 한류 새 문화 코드로 적극 개발해야

지난해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지페스티벌. 호랑이, 장승, 잉어 등 우리의 전통 한지로 만들어진 갖가지 등들이 파리 볼로뉴 숲을 밝혔다. 그러던 중 갑자기 비가 내려 파리 시민들은 등불 행사가 일찍 종료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한지로 만든 등불은 비온 뒤에도 끄떡없이 빛을 발했다. 파리 시민들은 ‘한지’의 힘에 놀라움을 나타냈다. 그리고 한지 패션쇼의 아름다움과 공예품, 다양한 생활용품에 또 한번 매료됐다.

한지의 보존성은 1,2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무구정광다라니경과 630여 년 된 직지심경을 통해 이미 입증된 바 있다. 한지의 힘은 그에 머물지 않는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한지가 최근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오랫동안 무심한 그늘에 가려 퇴화를 거듭했지만 한지의 가치를 알아본 이들과 한지 본연의 생명력으로 다시 깨어나고 있다.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과학, 문화, 의학, 생활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주요한 소재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지의 무한 변신이 진행 중인 셈. 한지 전문가들은 한지의 특성을 살려 산업에 활용할 경우 옷감에서 로봇 신소재에 이르기까지 쓰임새가 다양하다고 말한다.

인하대 김재환 기계공학과 교수가 이끄는 ‘생체모방 종이작동기 연구단’은 2003년부터 종이의 전기적 특성을 파헤쳐 그 움직임과 모양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김 교수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지원을 받아 최근 한지를 이용해 우주선 보호장비나 로봇을 제작하는 연구를 진행중이다. 한지의 긴 섬유소에 전기를 흘릴 경우 근육처럼 움직이는 현상을 이용해 로봇, 우주탐사선 개발에 응용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지만이 가진 전기적 특성과 보존성을 이용해 태양의 흑점으로 인한 전파장애를 막을 수 있다”며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가는 우주탐사선을 가볍고 비용 부담이 적은 종이탐사선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종이로 움직일 수 있는 물체를 만들면 탐사, 정찰용 초소형 무인 로봇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한지는 공예를 넘어 첨단산업 소재로도 활용된다. 스피커의 떨림판을 한지로 만든 한지 스피커는 원음을 가장 완벽하게 재생, 음악 마니아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기존의 스피커는 고음ㆍ저음ㆍ중음ㆍ우퍼 기능을 구현하는 4채널 스피커가 가장 이상적인 스피커로 알려져 왔다. 이보다 더 좋은 스피커는 한 장의 소재에서 4채널을 구현하는 ‘꿈의 스피커’이지만 음악 마니아들에게 그것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것으로 인식돼 왔다.

그런데 한지 스피커는 그러한 통념을 깨고 4개 채널에 해당하는 소리를 한지 한장에 담아 완벽하게 재생한다. 한지의 흡음성과 밀도가 뛰어난 특성을 활용한 것이다. 한국콘지 박시원 사장은 “스피커의 필수품인 울림판을 일반 펄프로 쓰면 소리가 90데시빌까지 나온다고 하면 한지를 넣으면 95데시빌 이상 나온다”며 한지의 우수성을 설명했다.

(사)한지산업기술발전진흥회 차우수 수석대표는 “한지 스피커는 한 장의 종이로 고음ㆍ저음ㆍ중음ㆍ우퍼 기능을 구현하는 외국에서는 상상도 못한 ‘꿈의 스피커’로 명상용으로, 인테리어 소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녀 수출상품으로 개발이 가능한 대표적인 문화기술상품으로 꼽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오토바이 헬멧이나 군인 헬멧에도 한지가 첨단소재로 개발 중에 있다. 한지 특유의 가볍고 견고한 데다 통풍성이 뛰어난 점을 응용한 것이다. 한국니트산업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한지실이 일반 면실보다 강도면에서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승공예가 최영준 씨는 “한지로 그릇을 만들면 새지도 않고 가볍고 튼튼하다”면서 “여기에 옻칠을 하면 돌처럼 단단해 이순신 장군이 옻칠한 한지 갑옷을 입었다면 왜구의 총구에도 쓰러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한지는 그밖에 차세대 반도체, 자동차 소재, 자동차 에어백 등에도 첨단소재로 활용될 전망이다.

최근 환경호르몬, 새집증후군, 아토피 등 환경 관련 문제가 전방위적으로 부각되면서 한지의 가치와 용도가 더욱 주목받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이는 스티로폼을 대체할 수 있는 한지 자재와 농사용 비닐을 한지로 만든 한지멀칭지가 그러한 예다.

한지로 만든 스티로폼 대체재는 단열자재로 손색이 없을 뿐더러 화재 발생시에도 연기에 중독돼 사망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게다가 항균성과 재활용이 가능하고 압축하면 프라스틱 용기를 대체할 수 있는 친환경 제품이다.

한지 멀칭지는 농사 후 검은 비닐을 수거하는 2차적인 환경오염을 방지 할 수 있을 뿐더러 논농사나 밭농사 때 한지 멀칭지를 깔고 농사를 지으면 3개월 후부터 한지가 부패되면서 자연적인 퇴비가 되어 농약을 사용 하지 않고도 농사를 지을 수 있다.

한지 멀칭지는 한지를 생산할 때 농작물에 맞는 무기물 영양소를 첨가하여 생산할 수 있으므로 농사에 필요한 영양분을 분야별 맞춤형 영양 멀칭지로도 손색이 없다.

한지로 만든 쌀포장지는 친환경 제품인 데다 냄새 제거, 벌레 방지, 밥맛을 좋게 하는 등 다양한 기능성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한국식품개발연구원 쌀연구팀의 이세은 박사는 “한지 쌀포장지는 다른 쌀포장지와 비교해 쌀의 수분량을 보존 밥맛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쌀포장지를 생산하는 ㈜금황특수제지 박영희 사장은 “한지 쌀포장지의 우수성을 안 일본식품 포장업체 사장이 직접 공장으로 찾아와 대량 구매해 갔다”면서 “국내에서도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사장은 한지 멀칭지 외에 닥섬유에 황토나 옥가루 등을 섞어 기능성을 강화, 친환경 건강 벽지, 발냄새를 제거하는 신발창, 고기 구을 빼 기름을 빼는 황토 구이판 등을 선보여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서울 강남에서 고기집을 운영하는 최우형(48) 씨는 벽지는 물론 등까지 모두 한지로 장식했다. 최 씨는 “한지가 냄새를 빨아들이는데 효과가 탁월하고 인테리어 측면에서도 아름답다”고 말했다.

경기도 분당에 사는 백명훈(32)) 씨는 “아기가 아토피 때문에 고생한 뒤 한의사의 권유에 따라 벽지를 한지로 바꾸고 음식물로 한지로 싸두었는데 상당한 효과를 봤다”고 말했다

국립산림과학원 조현진 박사는 “한지로 도배를 할 경우 한지 특유의 탈취성, 보존성, 통기성, 원적외선 방사량이 많아 냄새 제거는 물론 건강에도 좋다”고 말했다. 한지개발원 전영철 연구원은 “한지 이불, 베개, 벽지를 사용하면 아토피나 진드기 폐해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말했다.

한지는 최근 웰빙붐과 건강이 강조되면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조 박사는 “기존 담배 필터를 한지로 대체한 결과 니코틴, 타르, 일산화탄소 제거율이 8% 가량 향상됐다”고 말했다.

또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전자파와 관련해서도 한지가 탁월한 기능이 있다는 게 조 박사의 설명이다. 그는 “전화기를 한지로 덮고 외부에서 전화하면 반응이 없다”면서 “한지의 전자파 차단 효과가 뛰어났다”고 말했다.

한지공예를 하는 김분귀 주부는 “한지로 만든 뒤주에 쌀을 보관한 뒤로 벌레도 안 생기고 밥맛도 좋아졌다”면서 “한지 뒤주가 자동가습기 역할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씨는 한지가 실용적으로 튼튼할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편안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한지 천년, 비단 오백년’이란 말이 있듯 한지의 탁월한 기록성ㆍ보존성은 기록문화와 산업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 유럽 등에서는 일찍부터 중요한 기록물, 복원물에 한지를 사용해 왔으며 우리나라도 최근 중요 문서를 보존하는데 한지를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디지털 한지는 사진 영역까지 넘보며 신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주지역 벤처기업인 미래영상 김석란(44) 대표는 한지 고유의 장점을 한껏 살린 인쇄용 한지와 기능성 벽지를 개발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사진의 기본 기능이 기록성ㆍ보존성인데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200년을 못간다는 사실에 착안해 천년을 간다는 한지로 인화지를 만들 생각을 했죠.”

김 대표가 개발한 한지 브랜드 ‘여백’과 ‘천년사랑’은 일반 한지를 두세 겹 이어붙인 ‘이합지’나 ‘삼합지’를 감광유제로 특수 코팅한 것으로, 사진을 인화할 수도 있다. 또 일반 코팅과 달리 천연 약품을 한지에 배어들게 함으로써 한지의 통기성과 부드러운 질감을 그대로 유지해 호평을 얻고 있다.

쌍방형 대화가 가능하고 고객이 원하는 모든 것이 가능한 맞춤형 벽지도 있다.

한글로벌테크에서 개발한 ‘말하는 지사벽지’는 ??翅?벽지 및 블라인더로, 고객이 어느 곳을 여행하다 경치가 아름다워 간직하고 싶다면 원하는 디자인이나 600만 화소 이상의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풍경 경치를 나만의 작품으로 표현해 줄 수 있다. 아이들의 성장기록도 벽지에 구현할 수 있고 벽지에서 소리가 나는 다양한 경험도 할 수 있으며 말을 배우는 어린이가 벽을 만지면 말을 하기 때문에 재미있는 벽을 꾸며줄 수 있다.

한지는 종래 국내의 일반 공예를 넘어 세계시장서 겨뤄볼 만한 문화 코드로 인정받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만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한국 생활 7년째인 미국인 캘리(초등학교 영어교사)는 “미국에 있는 동생에게 ‘종이로 만들었다’며 한지로 만든 장신구를 보여주니까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직접 만져보고 깜짝 놀랐다”면서 “한지 공예품은 외국인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에서 한지 장신구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김경신 씨는 “한지로 만든 엑세서리를 보면 외국인들은 ‘정말 종이로 만들었냐’며 감탄한다”면서 “한국의 한지와 공예품들이 유럽에 많이 소개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 씨는 “유럽에서는 한지가 대개 일본 것으로 둔갑해 일본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프랑스 화가인 알랭 본느프와는 “12년 전 한국 친구를 통해 한지를 알게 된 뒤로 한국 예술을 좋아하게 됐다”면서 “프랑스에는 ‘사랑에 빠진 종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잉크(먹)을 빨아들이는 한지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면서 한지 예찬론을 폈다.

한지는 삼국시대 이래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며 아시아의 ‘명품’으로 대접받았다. 21세기 한지는 민족문화의 원형이자 무궁무진한 신성장 동력산업으로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한지가 왜 뛰어난가
전통방식 제조 '종이 수명 일천 년'

한지(韓紙)는 오랫동안 우리 풍토와 기후 속에서 자라나는 원료들-楮皮(저피)ㆍ桑皮(상피)ㆍ麻皮(마피)-을 가지고 우리의 전통 기구를 사용하여 만든 종이를 말한다.

종이는 중국 후한(後漢) 시대(서기 105년) 채륜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중국 고고학 발굴결과 그에 앞서 종이가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고 우리나라 역시 고구려 건국 초기부터 종이를 사용한 기록이 있어 우리의 종이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인지 아니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는 신라 시대에 제조된 무구정광다라니경(국보 제126호, 704~751년 제조)으로 중국에서 말하는 '백추지'이다. 삼국 시대에는 백추지가 주류를 이뤘고 고려 시대에는 '고려지'로 불리는 '견지(繭紙)','아청지(鵝靑紙)'등이 중국에서도 최고급지로 평가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태종ㆍ세종 때 조지서(造紙署)를 두고 종이를 생산할 정도로 수요가 많았고 '상화지(霜華紙)','백면지(白棉紙)'등이 유명했다.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종이가 대량 수입됐고 해방 후에는 양지가 점차 대중지의 위치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의 한지는 일본의 화지(和紙), 중국의 선지(宣紙)와 구별된다. 전북대 강진화 임학과 교수는 "3국 간의 종이는 사용 원료에 따라 차이가 난다"면서 "한지는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질기고 자연스러운 반면, 화지는 일본산 닥나무 껍질로 만드는데 조직이 치밀하고 매끄러우며, 선지는 중국 닥나무 껍질, 섬유와 볏짚 등으로 만들어 거칠고 약하다"고 분석했다.

세 나라의 고유 종이 중 한지가 우수한 것은 우리나라 닥나무를 비롯한 재료가 다른 나라에 비해 질적으로 나은 데다 종이 제조방식이 껍질을 벗겨 닥섬유질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지는 보존성이 뛰어나 전북대 김병기 중문과 교수는 "작품을 수백 년 보존하려는 작가들은 우리나라 한지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왕의 남자' 경극 분장에도 한지 사용

영화 '괴물' 이전까지 한국영화 흥행 최고기록을 경신한 '왕의 남자'에서 한지가 톡톡한 역할을 했다. 연산군이 보는 앞에서 하는 광대놀이 중 경극 장면이다.

'왕의 남자'에서 의상 제작, 진행을 맡았던 심현섭 디자이너는 경극 분장을 모두 한지로 했다.

심씨는 "종이 의상이 그 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지를 통해 한국적인 느낌을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 93년에 개봉한 중국 영화 '패왕별희'에서 사용되었던 것과 같은 원단을 사용하게 되면, 결국 아류작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영화의 한지 의상은 강원도 원주에 있는 원주한지(대표 장응렬)의 한지를 사용했다. 장응렬 대표는 "전통 한지에 자연 염색재료를 사용해 은근하고 친근한 색한지를 만들었다"면서 "영화에서 공길과 장생이 입은 한지옷의 재료가 됐다"고 말했다.

심현섭 디자이너는 "한지는 단순히 종이의 느낌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한지의 좋은 점은 그것이 여러 가지의 느낌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지는 때에 따라서는 가죽과도 같은 느낌도 나고 채색을 하게 되면, 물을 흡수하는 종이 자체의 특성으로 인해 그 안에서 여러 가지의 수채화와 같은 느낌을 줄 수도 있다"면서 "질감 표현도 다채로우며, 표현 가능성이 매우 자유로운 점도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