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법 강화·중국 선지 대량 수입으로 기반 붕괴… 제품 다양화·브랜드화로 국제 경쟁력 높여야

국내 한지 산업이 위기다. 한때 최고의 한지를 생산하며 수출을 주도하던 시대는 말 그대로 ‘역사’가 됐다.

한지 산업은 1980년대까지 90여 개 업체가 전국에 퍼져 있어 창호지, 순지, 색한지, 장판지, 화선지 등을 생산하여 국내에 공급하고 일본 등에 수출하며 비록 가내 수공업 형태였지만 산업으로서 당당히 자리매김하여 왔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수질 분야에 대한 환경법 강화로 국내 한지산업의 최대 기반인 전주지방의 한지업체들이 이전 과정에서 대거 사업을 포기한 데다 중국 선지의 대량 수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붕괴일로에 접어들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2006년 2월 현재 전국의 수록한지 제조업체는 불과 21 곳에 불과하다.

한지 산업의 명맥인 수록지 산업이 위기에 처한 것은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수록지를 생산하고 있는 경기 가평ㆍ용인, 충북 괴산ㆍ문경, 경북 안동ㆍ봉화ㆍ도계, 경남, 전남 장성 등의 업체들은 가내 수공업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 영세한 구조로 명맥을 유지하는 형편으로 회생이 어려운 상태이다.

한지의 산업화에 견인차 역할을 할 기계한지 역시 제 몫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계한지는 수록한지 생산이 발달한 전북 전주 완주 임실 남원과 경남 의령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하였고 규모나 시설 면에서 소규모 공장이 주를 이루고 있다. 금황특수제지, 지리산특산제지, 천양제지, 고려제지 등 9 곳이 있으나 몇몇 업체를 제외하곤 영세하다.

사정이 이러니 업체의 생존력이 불가능한 상태이고 한지의 명맥이 끊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전북의 한 한지업체 대표는 “사업이 영세하다 보니 가격 경쟁에서 밀리고 중국산 한지가 많이 들어와 버티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국내 유일의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117호) ‘한지장’이자 노동부 지정 ‘전승기능자’인 류행영(75) 씨의 현실은 우리나라 한지 산업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말해준다.

경기도 용인시 외곽에 있는 류 씨의 공방(고유한지연구소)은 낡은 비닐하우스 가건물에 문화재 지정 명패가 황량하게 보였다. 작업장 안은 희미한 형광등과 찢어진 창문에다 닥나무 껍질을 비롯한 한지 재료가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었다. 국가가 인정한 최고 명장의 공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했다.

“돈을 번다는 것은 꿈도 못꿔,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사는 거지. 제대로 가르치고 죽어야 하는데···.”

류 씨에 따르면 공방인 고유한지연구소가 용인시 도시개발사업 구역에 포함돼 조만간 헐릴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류 씨는 “지금과 같은 한지업으로는 희망이 없다”고 한탄했다. 다행히 지난해 9월 무형문화재 한지장으로 지정받으면서 매월 100만원 받는 것으로 근근히 작업을 하고 있다. 류씨는 한지장이 되면서 아들이 한지에 관심을 갖게 돼 맥을 잇게 될 여지가 마련됐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 한지 산업의 미래가 불확실해 고민이 크다고 토로했다.

한나라당 박찬숙 의원이 발의한 ‘전통공예산업진흥법’(현재 문광위 소위 계류 중)이 올 정기국회를 통과할 경우 그나마 형편이 조금 나아질 전망이다.

고사 위기에 놓인 한지 산업을 회생시키는 방안과 관련, (사)한지산업기술발전진흥회 차우수 수석대표는 한지생산업체를 보호ㆍ육성하고 한지장 확보 및 신분보장, 한지소비촉진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시했다.

아울러 종합적인 한지 산업을 발전시킬 추진기관으로 ‘한 브랜드 재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차 대표는 “한 브랜드 정책은 우리 고유 문화를 산업화하여 새로운 성장 동력 산업을 일으키는 것”이라며 “한 브랜드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민간 재단 창설이 시대적 과제가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태호 충북대 교수는 “우리나라로부터 제지법을 전수 받은 일본이 세계 수록지 시장에서 우뚝 선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면서 “다양한 분야에 독자적인 제지법을 개발하고 치밀한 세계화 전략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최 교수는 우리나라의 한지도 제품의 다양화, 브랜드화, 새로운 수요창출에 대한 노력과 국가적 지원체계 확립, 활발한 국제교류 및 홍보 체계를 수립할 것을 주문했다. 그래야만 한지가 충분히 국제 경쟁력을 갖춘 전통산업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최 교수의 설명이다.

정부는 지난해 8월 한국 전통문화 콘텐츠를 세계화한다는 전략 아래 범 정부차원의 ‘한(韓)브랜드 전략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처별로 6개 분야(한국어, 한식, 한복, 한지, 한옥, 한국학) 총 1001개 과제를 확정한 바 있다. 한지 경우 ‘한지 발전 기반 조성’,‘한지 진흥사업 추진’ ‘한지 교육 프로그램 운영’을 중점과제로 설정해 2009년까지 총 298억9,000만원을 지원하기로 돼있다.

그러나 올해 정부의 한지 사업 지원액은 당초 45억5,000만원에서 16억원으로 축소됐다. 한지 분야 관계자들은 “정부가 한지 산업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안이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한지 산업이 과연 안팎의 도전을 물리치고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40년 전통의 원주전통한지
"韓紙, 외국인들이 더 인정"

▲ 고 김영연 씨
▲ 김영연 씨 딸 김희연 씨

전북 전주와 함께 우리나라 한지산업의 양대 산맥인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원주전통한지(대표 윤순희)는 4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중견 한지 제조업체다. 설립자 김영연시(1985년 작고)는 우리나라 한지 역사를 이론적으로 개척한 인물이다.

일본 도쿄대 중문과를 졸업(1949년)한 김씨는 당시 일본이 수입하는 한지에 주목, 1968년 현재의 한지공장을 설립하고 국내는 물론 해외 세미나에 참가해 한지의 우수성을 세게에 알렸다.

부인 윤순희씨는 남편 사후 한지업을 계승하고 남편의 연구성과를 '한지의 발자취'(2005년)란 책으로 엮어냈다. 현재 원주전통한지에는 윤씨를 비롯해 딸과 사위, 아들 등 온가족이 참여하고 있다. 색한지, 의류용 한지, 순지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월 매출은 9,000만원에 이른다. 특히 오색 한지는 전국에서 유명 한지로 통한다.

윤순희 대표는 "운영에 큰 어려움은 없지만 자금회전이 부담될 때가 있다"면서 "다른 지역 영세업체들이 힘들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고 말했다. 윤 대표에게서 한지 기술을 배우고 있는 딸 김희연씨는 ""우리 한지가 얼마나 좋은 지 외국인들이 더 인정해준다"면서 "국민들이 한지에 애정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2006 한(韓) 브랜드 박람회'에 전시된 다양한 디자인의 한지 의상을 한 관광객이 보고 있다.
▲ 한지장 류행영 씨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