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 대행인 해보니…

늦깎이로 대학교에 들어가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는 여대생 김모(27) 씨는 틈만 나면 ‘알바걸’로 변신한다. 학비에 보태려고 나선 아르바이트 활동 중에는 하객 대행도 있다. 올 초 주말에 할 만한 알바가 없을까 하며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한번 해본 뒤 만족스러워 벌써 10번 정도 했다.

그가 하는 일은 신부 대기실에 가서 신부에게 안부도 묻고 격려도 해주고 수다도 떠는 데서 시작된다. 예식을 마치면 기념 촬영은 물론 폐백 드릴 때도 신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신부의 친구, 언니, 동생, 선후배 등으로 신분이 무시로 바뀌는 그는 하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꼭 맞는 사람 같다. 한두 시간 정도 대행 노릇을 하고 받는 돈은 2만~2만5,000원선. 맛있는 식사는 덤이다.

“처음엔 참 어색했는데 결혼하는 신부들을 보니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 생겨 잘하게 되더라고요. 신부들 중에는 가족 반대를 무릅썼거나 양친이 안 계신 경우, 너무 늦게 결혼해 들러리들이 올 수 없는 경우 등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어요. 세상이 각박해져 이런 알바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을 다 마친 후 신부들이 정말 고마워할 때는 보람도 커요.”

하객 대행의 수칙으로는 대행이라는 비밀을 엄수할 것, 사진 촬영에 반드시 참석할 것, 친근감 있게 행동할 것 등을 꼽았다. 대행을 하다 보면 결혼식에서 처음 보는 다른 대행들도 만나게 되는데 잠깐 머쓱하다가도 이내 융화된다고. 대행들은 ‘리더 대행’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통솔된다.

김 씨는 “간혹 신랑 친구들과 식사를 함께 하다가 ‘사전 정보’ 부족으로 진땀을 흘리는 경우도 있었다”며 웃었다.

직장생활과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는 열성파 여성 이모(34)씨는 얼마 전부터 자신의 전공인 문학을 살려 대행 서비스를 하고 있다. 그가 하는 일은 보고서나 브리핑, 프리젠테이션, 자기소개서 등 직장인, 학생들이 자주 부닥치는 ‘숙제’를 도와주는 일이다. 간혹 법원에 제출하기 위한 이혼 사유서 등도 의뢰가 들어온다.

“주로 의뢰인들이 이메일로 보내온 문건을 꼼꼼하게 살펴본 후 문장과 문맥을 다듬고 맞춤법이나 교정을 봐줍니다. 때때로 핵심이 빠졌으면 넣어주거나 전체 구도가 부실할 때는 살을 붙여주기도 하죠. 하지만 ‘보조’ 역할 이상은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워 놓았습니다.”

이 씨는 논문이나 리포트 대행처럼 불법적인 소지가 있는 의뢰는 절대 수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업체에서 그런 의뢰는 차단하기 때문에 실제 ‘완전 대행’을 요구 받는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의뢰인들은 ‘정말 못 쓰겠어요’라며 먼저 하소연부터 하는 경우가 거의 전부예요. 스스로 노력은 해봤는데 아무래도 제출용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 도움을 청한다는 거죠. 듣다 보면 딱해서라도 성의껏 해주기는 하는데, 다들 깎아달라고 하는 통에 돈은 별로 못 벌어요.(웃음)”

그럼에도 그는 “문학은 돈이 안 된다고들 하잖아요? 하지만 저는 제 전공을 갖고 작은 돈이라도 벌고 또한 제 능력도 유지, 향상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죠”라고 역할 대행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