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2007년 국제정세- 유럽연합27개국으로 늘어 다양한 갈등 존재… EU헌법 재추진 등 내실 주력키로

유럽연합(EU)이 숨고르기에 나섰다. 최근 몇 년간 숨가쁘게 진행됐던 EU 회원국 확대를 당분간 유보하고, 대신 ‘내부 단속’에 보다 힘을 쏟기로 한 것이다. 지난 14, 1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의는 중단기적으로 EU가 나아갈 방향을 확인한 자리였다. 여기서 정상들은 EU 확장의 속도를 줄이는 대신 외국인 노동자 유입, 난민, 인권 등 회원국 간 갈등을 부를 수 있는 정치ㆍ사회적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터키 EU가입 봉쇄 목적도

EU가 이처럼 ‘몸집 불리기’에 일시 제동을 건 것은 회원국 확대로 인해 야기되는 다양한 정치ㆍ경제ㆍ사회적 갈등 요인에 대한 기존 회원국 국민의 불안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일종의 ‘확장 피로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존 서유럽 15개국과 2004년 대거 가입한 동유럽 10개국 간 격차가 궁극적으로 EU의 결속력을 흔들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이다.

장기적으로 EU 외연을 확장하는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우선 EU 내부를 공고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음직하다. 또 내년 1월 1일 공식 가입하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개혁이 미흡했음에도 목표연도를 맞추기 위해 타협했던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루마니아의 EU 가입 축하행사 장면
따라서 당분간 EU 식구는 이 두 나라를 포함해 27개국으로 꾸려질 가능성이 커졌다. 정상들이 회의에서 앞으로 가입 후보국들에 대해 사법개혁, 부패척결 등 개혁 이행 여부를 보다 꼼꼼히, 철저히 점검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번 합의로 가입후보국 중 선두주자였던 크로아티아의 가입은 당초 예상됐던 2009년에서 2010년 이후로 늦춰지고, 알바니아, 보스니아_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등 예비후보국들의 가입 협상도 그만큼 더 뒤로 밀리게 됐다.

정상들이 추가 회원국 가입에 제동을 건 이유는 또 있다. 지난해 좌초됐던 EU 헌법의 부활을 위해서다. 주제 마누엘 바로수 EU 집행위원장은 “확장은 EU 개혁에 달려 있다”며 ‘헌법 부활 합의 전 확장은 없다’는데 회원국들 사이에 묵시적 합의가 이뤄졌음을 시사했다. 내년 상반기 의장국을 맡게 될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헌법과 확장은 긴밀히 연계돼 있다”며 “회원국에 헌법 부활 문제를 전담하는 특별대사를 임명하자”고 촉구했다.

지난해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EU 회원국 전체에 구속력을 발휘할 수 있는 EU 헌법을 국민투표로 부결시켜 ‘유럽합중국’을 지향하려는 통합파들에게 큰 충격파를 던졌다. 동유럽국가가 회원국으로 들어오면 올수록 부유한 기존 서유럽 국민의 거부감은 더욱 커져 EU 헌법 비준에 결코 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터키의 EU 가입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정상들이 ‘속도조절론’을 들고 나왔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터키와 가입 협상을 진행 중이던 EU는 터키가 EU 회원국인 키프러스에 항구와 공항을 완전 개방하는 것을 거부한 점을 들어 터키의 가입 협상을 부분 중단시켰다. 회원국 간에는 상품과 인력의 완전한 자유 이동이 보장돼야 하는데, 터키가 키프러스와의 역사적 배경을 들어 이에 반대한 데 따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EU는 이슬람 국가로 기독교 문명의 유럽과는 여러모로 이질적 요소를 갖고 있는 터키에 대해 반감을 가져왔다. 인구만도 7,100만 명에 이르는 대국이어서 자칫 유럽의 정체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적지 않았다. 터키와 키프러스와의 역사적 적대관계가 가입협상을 제한하는 표면적인 이유지만, 이면에는 터키를 받아들이는 데 거북해 하는 유럽의 심리가 깔려있다고 봐야 한다.

의사결정 과정에 충돌 잦아

몸집이 불어나면서 회원국 간 국가이기주의가 팽배해 EU 전체의 의사결정 과정이 심각한 장애에 부닥치는 것도 EU가 안고 있는 큰 고민이다. 25개국으로 비대해지다보니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신구 회원국들이 충돌하는 경우도 잦아졌기 때문이다.

10월 핀란드 라티에서 열린 EU_러시아 정상회의에서는 폴란드의 반대로 EU와 러시아 간 포괄적 경제협력 협상이 결렬됐다. 러시아가 자국산 쇠고기에 대해 1년째 금수조치를 취하는 데 반감을 품은 폴란드가 이의 해제를 요구하며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미국의 동의를 끌어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의 한 고비를 넘긴 러시아로서는 다음으로 EU의 국가들의 비준이 절실한데, 이런 러시아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러시아 정부도 곧 정회원국이 되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동물보건 위생상태를 이유로 내년 1월 1일을 기해 EU산 육류수입 전면 중단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만약 러시아와 EU의 앙금이 풀리지 않는다면 러시아는 WTO 가입에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고, EU는 회원국의 에너지 수급을 좌지우지하는 러시아의 에너지를 이용하는 데 심각한 난관에 부닥칠 수 있다.

지난달에는 체코가 자국산 맥주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회원국의 주류세 인상 조치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터키의 EU 가입 협상이 9월부터 중단된 것은 터키와 적대관계에 있는 키로러스의 거부권 때문이었다. EU가 미국의 GPS(위성항법장치)에 대응해 추진 중인 새 위성항법체제 구축사업인 갈릴레오 프로젝트를 놓고도 신구 회원국들이 대립양상을 보이고 있다. 몰타와 체코 등 신규 회원국들과 독일 스페인 등 구 회원국들이 프로젝트 본부 유치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다.

EU 회담을 할 때면 회담장이 무려 20개의 공식언어 통역사들에게 둘러싸이는 진풍경을 연출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이 많은 공식 언어를 번역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도 엄청나다.

이 때문에 브뤼셀에서의 이번 정상회의에서는 단일국가나 소수 회원국들이 다수의 의사를 방해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현재의 만장일치에서 가중치를 둔 다수결로 의사결정 방식을 개선하는 방안도 심도있게 논의됐다. 그러나 가중치를 누구에게 얼마나 부여할 것인가를 놓고도 회원국마다 이견이 분분해 언제 합의안이 도출될지는 예상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로이터 통신은 “기존 회원국 간 협상을 이끌던 비공식적이고 편안한 과거 분위기는 사라지고 공식적이고 딱딱한 분위기가 자리잡고 있다”며 2004년 ‘빅뱅’ 이후의 분위기를 전했다. 2007년엔 EU가 ‘바람잘 날 없는 가지 많은 나무’가 될지, 화목한 대가족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