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춘 교수'우리 시대의 얼굴展'

주간한국이 지난 한 해 표지에 실린 초상화 30점을 모아 17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우리시대의 얼굴전(展)’을 갖습니다. 그림은 재중동포 출신의 화가인 이광춘 경기대 교수가 그렸습니다. 초상화 인물들은 모두 그 주일에 가장 화제를 모은 명사들입니다. 따라서 이번 전시회는 우리 시대의 역사이자 문화의 기록입니다. 주간한국은 전시회를 앞두고 의미 및 초상화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갈수록 침체돼가는 우리 사회의 소중한 초상화 문화가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 편집자 주


동서양을 막론하고 초상화는 우리의 중요한 문화 요소로 정착되어 왔다. 과거 인물과 각 시대 세대들과의 정신적 교감과 동질성 공유의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해왔던 것이 초상화이다. 따라서 그것은 한 가문만이 아니라, 보다 넓은 범주의 공동체가 보존할 공공 문화재로서의 기능과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를 공부할 때도 오늘에까지 그 인물의 재현성과 예술성이 잘 보전된 초상화는 풍속화 못지않은 역사적 상상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종종 사진과 비교되곤 하지만 말로 설명하기 힘든 아우라(aura)가 바로 생명력이며, 근간이다.

역사적으로 어떤 거장도 대표작을 꼽는 데 있어 초상화가 빠지는 경우는 없다. 그만큼 초상화의 문화적 의의가 적지 않다. 렘브란트, 루벤스, 마네, 르노와르 등의 역사적 거장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피카소와 같은 현대미술 작가들이 그린 초상화도 부지기수다. 이토록 한 작가에게 있어 초상화가 중요한 비중을 갖는 것은 그 어떤 작품들보다 당대의 인물과 작가의 생애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가치가 있지만, 한 작가의 예술적 경험이 집적된 아우라가 묘미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서도 초상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서양의 것에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우리 그림 속의 인물들을 통해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이 형성된 것을 그리 단순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이재언 미술평론가
따라서 사진이 등장한 이후에도 초상화는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 흔들림 없는 아성을 지켜온 것이다. 사진은 사진대로, 초상화는 초상화대로 발전해 온 것이다. 그런데 유독 우리만이 최근 초상화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과거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볼 수 있었던 인물의 초상, 그리고 한 가문의 가풍과 역사를 한눈에 짐작케 하는 초상이 이제는 거의 종적을 감춘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그것이 사진 때문인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틀린 지적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의 얼굴을 예술표현과 심미의 원천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의 각박해진 정서에도 원인이 있지 않을까. 우리는 저명인사의 모습을 다양한 매체들에 비쳐진 하나의 아이콘으로 신원 확인만 할 뿐, 정작 심미적으로 바라볼 여유를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초상화 문화가 퇴조한 데는 사실 화가들에게도 일부의 책임이 있다. 인물화 자체를 기피하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인물화가 다른 그림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묘사력과 표현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언제부터인지 우리 화단에서 좋은 인물화 보기가 힘들어졌다. 서양화나 동양화에서 기념비적인 인물 초상을 그리는 작가가 없다는 것이 바로 우리 화단의 현실이다. 이런 화단 현실 속에서 이광춘 교수의 등장은 큰 의미를 갖는다.

이광춘 화백은 작가의 재능과 화력에 비해 일반에게 그렇게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다. 아무래도 중국 태생으로서 국내 미술계에서의 발돋움이 그리 쉽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를 아는 지인들은 작가의 천부적 재능과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이름이 우리 미술계에 회자될 날이 올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전통 수묵과 채색을 융합한 작가의 등장은 우리 미술계에 대단히 신선한 활력소가 되고 있다. 5년에 한 차례 열린다 하여 미술의 올림픽이라 할만한 제6회 ‘중국 國展’에서 銅質賞(동메달)을 당시 재중 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수상하는 등 천재적 화재를 인정받은 사실을 새삼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작가만의 독특한 초상화법으로 그려진 조지 부시대통령 초상화 2점이 텍사스별장에 소장되어 있으며, 사마란치 전IOC위원장 초상이 로잔느 국제올림픽 위원회본부에 소장되어 있을 정도면 작가의 경력과 기량을 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작가만의 독특한 초상화란 이렇다. 기운이 넘치는 호방한 수묵의 필치와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 디테일이 대비적으로 결합되어, 인물마다 가지는 개성과 그 내면을 밖으로 표출시키는 데 대단히 탁월한 기량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이러한 화법은 역사적으로 익숙한 정적이고 근엄한 분위기의 초상화와는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잔 붓에 의존한 그리기를 벗어나 시원하고 강렬한 필치가 인물 대상의 생애를 설명하고 있는 듯이 전해지는 것은 물론, 작가가 대상을 심미적으로 음미한 경험까지도 표정의 묘사에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많은 영상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와도 질적으로 다르다. 작가의 그림은 한 순간의 표정을 포착한 듯한 동세가 반영되어 있으면서도, 그 대상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패러다임을 경험적으로 도출해낸 결과물이다. 따라서 매체 속에 등장한 한 인물에 대한 수많은 국면들이 종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작가는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인물 30인의 초상화를 주간한국의 기획으로 착수하여 1년여 기간에 걸쳐 완성을 하였다. 작가의 초상들은 한눈에 그 인물의 신원만이 아니라 내면까지도 표현하고자 한 혼신과 각고의 산물로 그려낸 작품들이다. 우리 동시대에 한동안 단절되었던 초상화 문화의 부활을 알리는 것으로서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나약해진 우리 화단에 활력소 역할을 할 작품들로서도 의미를 가질 것으로 확신한다.

또한 작가의 초상화는 외국 땅에서 태어나 조국으로 돌아와 창작을 하고 있으면서, 누구보다 조국의 안정과 단합을 희망하고 기도하는 염원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안타까운 것은 대한민국 건국 초기 혼란기에 애국심을 발휘한 수많은 영웅들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한 점 제대로 없다는 것이다. 한 점의 초상화가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자료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다. 초상화가 갖는 고유의 아우라가 오랜 시대를 통해 공동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갖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해관계나 수단만으로 바라본 매체 속의 얼굴이 아닌, 초월적이고 중립적인 예술작품 속의 모습들. 이는 보다 큰 시대적 이상을 담고 있는 이벤트이기도 하다. 우리가 반세기쯤 지나서 아무 편견 없이 관조하게 될 ‘그때 그 인물들의 초상’이라 상상하자. 요컨대 우리 후세가 가장 아름답게 기억하고, 보전하고 싶은 모습을 담은 그림들로서 말이다.


이재언 미술평론가 jean00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