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창 화백이 생전에 극찬… 부시, 사마란치 초상화도 그려줘

“대상을 꿰뚫어보는 세련되고 힘찬 필치가 인물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화의 대화가로 평가받고 있는 고(故) 운보 김기창 화백은 1988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중인 중국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던 중 5점의 인물화를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직접 작가를 만나 그의 천부적 재능을 칭찬하고 작고할 때까지 동양화의 동반자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이어갔다.

김기창 화백이 한눈에 재능을 알아 본 작가는 재중(在中) 동포인 이광춘 화가(49ㆍ경기대 교수)이다. 이광춘 교수는 한ㆍ중ㆍ일 3국을 넘나들며 작품활동을 하면서 지난해 <주간한국>에 이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들을 고품스런 수묵화로 선보였다. 이번‘우리 시대의 얼굴전’은 이 교수의 작가적 재능과 화력(畵力)을 통해 우리 현대사를 즐겁게, 그리고 진지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장(場)인 셈이다.

이 교수는 자신의 인물화에 대해 “내 삶의 ‘18번’과 같다”고 말한다. 그만큼 인물화에 애착을 갖고 있고 자신의 예술성을 유감없이 발현할 수 있는 분야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화단에 알려졌듯 재중동포 3세 화가다.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무단장(牧丹江)시에서 출생. 루쉰(魯迅)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후 1982년 졸업과 함께 국가에서 월급, 집을 주고 창작 지원금까지 주며 창작 활동에 전념케 하는 명예의 ‘흑룡강성 화원’ 회원으로 발탁됐다. 84년에는 5년마다 한 차례 열리는 제6회‘중국 국전(國展)’에서 ‘춘효(春曉, 봄날의 새벽)’라는 작품으로 재중 한인으로는 최초로 동상인 동질상(銅質賞)을 받으며 최고 반열의 화가로 발돋움했다.

그때 중국에서 수학하며 쌓은 실력이 그의 수묵 인물화의 탄탄한 근간을 이룬다. “당시 중국 예술은 정치에 봉사하는 양태였어요. 예로부터 궁중에서 왕을 위해 인물화를 그렸던 것처럼 인물화는 화가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작업이었고 이를 잘 해야 인정받을 수 있었죠.”

그가 중국 국전에서 인정받은 천재적 재능은 특히 인물화에서 두드러진다. 그의 독특한 초상화법으로 그려진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 등 세계 유력 인사들의 초상화가 그들의 집무실이나 자택에 걸려 있고 국내 그룹총수를 비롯한 유명인사 상당수도 그가 그린 초상화를 소장하고 있다. 소장가들이 현대사에 기록될 만한 인물이라는 점에 대해 이 교수는 “초상화는 단순한 개인의 얼굴이 아니고 삶의 궤적이며, 인물에 따라 역사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의 인물화는 전통적인 중국 대륙적 색채와 구도에서 출발해 한국과 일본의 화풍을 섭렵하면서 그 깊이를 더했다. 87년 일본에 유학을 간 후 도쿄에서 2차례 개인전을 가졌고 중국에서 4차례, 한국에서는 89년 백상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무려 8차례나 전시회를 열어 한ㆍ중ㆍ일 고유의 기법과 변화, 색채감각 등을 자기 것으로 수용해 발현해냈다. 수묵화 특유의 담채를 최대한 살리는 그만의 특별한 습필(濕筆)로 ‘기운생동(氣韻生動)’의 생생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초상화는 누구나 그릴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공감을 끌어내기는 어렵다. 대상, 인물을 닮게 그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인물이 지니고 있는 성격, 교양, 학문 등이 얼굴에 배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인물의 형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표현하는데 무게를 둔다”고 말한다. 같은 인물을 그리더라도 제각각 그 속에서 우러나오는 인물에 대한 느낌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신사조(傳神寫照, 사람의 초상을 그려 그 정신을 전함)’화풍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서양 인물화가 인물의 자세와 공간 비율을 반영해 동적(動的)인 반면 동양 인물화는 움직임이 없고(靜的) 눈빛으로 사람을 드러내는 것이 특징인데, 이 교수는 이를 융합해 동적이고 정적인 독특한 인물화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시대를 반영하는 30인의 전시 초상화 중 정치인들에게선 야망의 눈빛이, 경제인들은 자신만만한 모습, 문화ㆍ학계 인물은 직업적 정서가 배어 있고, 체육계 인물에게선 특유의 승부의욕이 느껴진다.

예컨대 올해 대통령선거의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관상에 비해 그의 삶의 이력과 도전 의지를 담은 강렬한 눈빛이 미래를 향하는 인상이고,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약간 찡그린 얼굴이지만 외부 압박을 물리치는 결연한 의지의 소유자임을 느끼게 하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이야기하는 모습에선 지혜와 성실한 인상을 읽을 수 있다.

이 교수는 제대로 된 초상화가 되려면 인물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전형적 순간’을 포착하는 게 중요하지만 인간은 어느 한 시점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기에 대상 인물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고 말한다. 관상(觀相)은 심상(心相)의 발현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교수는 요즘 ‘구상이면서 추상이고, 추상이면서 구상’인 종래의 동양화법과는 완연히 다른 회화에 천착하고 있다. 동양회화의 본래적 속성과 의미를 부단히 찾아가면서 현재의 시간 축 위에 환생시키는 방식이다. 동양화 장르의 풍부하고 깊은 전통과 서양현대미술의 참신함을 융합,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고 구상과 추상을 다 포함하며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심미관(心美觀), 즉 ‘의상(意象)’이 최근 이 교수의 회화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이 교수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수묵 인물화와 그의 의상(意象)에 바탕한 새로운 회화세계의 작품들은 서울 인사동 선(選)화랑에서 1월 17일부터 31일까지 감상할 수 있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