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시대의 뉴실버 웹버족정보화에 눈뜬 노인들 인터넷 카페 등 통해 제2의 삶 찾아새 친구들 만나고 손주들과도 사이버 대화 '회춘의 묘약'

"인터넷이 노인들을 사회로부터 소외시켰지만 이제 정보화로 무장한 노인들에게 인터넷은 사회 재참여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늙은이가 되면

미운 소리 우는 소리 헐뜯는 소리

그리고 군소릴랑 하지도 말고

이기려 하지 마소. 져 주시구려.

많은 돈 남겨 자식들 싸움하게 만들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많이 뿌려서 산더미 같은 덕을 쌓으시구려.

늘그막에 내 몸 돌보고 모두가 받들어 준다나?

아프면 안되오. 멍청해도 안되오.

늙었지만 바둑도 배우고 기체조도 하시구려.

어차피 삶은 환상이라지만 그래도 오래오래 사시구려.(일부 생략)

인터넷 ID명 ‘노신사’를 사용하는 노인이 자신이 운영하는 포털 사이트 카페에 올린 ‘사이버 발언’이다. 비슷한 연배의 카페 회원들은 황혼의 단상과 지혜가 담긴 잠언 같은 그의 말에 연방 고개를 끄덕인다.

등산을 취미로 가졌다는 ‘노신사’는 카페 한켠에 산행에 대한 정보와 함께 자신이 올랐던 전국 명산의 풍광을 사진으로 옮겨 놓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전문가급의 식견을 바탕으로 야생식물, 꽃, 분재 등에 대한 흥미로운 글과 정보도 수시로 올려 놓는다.

노인 문제도 빼놓을 수 없는 관심사다. 건강이나 복지 문제에서부터 고령화사회에 대한 전망까지 다양한 이슈를 직접 쓰거나 옮겨 놓아 읽을거리가 풍성하다. 이러다 보니 서로 뜻이 맞아 이곳을 ‘사이버 사랑방’으로 삼은 실버 회원들 숫자만도 400명을 훌쩍 넘었다. 이들이 주고받는 다양한 정보와 지혜로 카페는 날로 풍성해지고 있다.

싸이질 장년층 3년새 25배 폭증

‘디지털 실버를 위하여’라는 기치를 내건 ID명 ‘뱀부’의 블로그. ‘뱀부’는 자신의 프로필을 상당 부분 밝히고 공개적으로 블로거 활동을 하고 있다. 블로그 첫 화면에는 30대 시절부터 칠순에 이른 지금까지 그의 삶의 궤적이 사진으로 재현된다.

‘뱀부’는 2004년 초에 블로그를 개설했을 만큼 실버 세대로는 이례적으로 정보화에 빨리 눈뜬 편이다. 블로그에 올린 수많은 정보들 중에서도 유독 정보기술(IT) 관련 뉴스가 눈에 많이 띄는 것도 이채롭다.

그런데 알고 보니 칠순 노인은 쟁쟁한 이력의 소유자다. 각종 실버 정보검색대회에서 입상한 적이 수두룩하고 IT관련 국가기술자격증도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다. 이런 능력 덕분에 여러 기관에서 강사로도 위촉돼 활동을 했다. 우연히 블로그를 방문한 젊은 네티즌들도 그의 높은 정보화 내공에 감탄해 ‘디지털 전도사’라는 애칭을 주저 없이 헌정한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노인과 컴퓨터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우리나라가 손꼽히는 IT강국으로 거듭나는 동안에도 노인들은 컴퓨터, 인터넷과는 관계 없는 계층으로 치부됐다. 2000년대 들어 노인 정보화를 북돋운다는 취지로 정부, 지방자치단체, 대학교 등이 실버 정보검색대회를 수시로 개최했을 때도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키보드를 두들기는 노인들의 모습은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보기 드문 ‘천연기념물’로만 비쳐질 뿐이었다.

헌데 IT혁명이 세상을 송두리째 바꾸다시피 한 것처럼 정보화의 물결은 노인 계층에게도 서서히, 그러나 거센 파도처럼 다가서고 있다. 정부의 노인 정보화 정책에 따라 정보활용 기술을 습득한 노인 계층이 두터워지면서 디지털 문명에 적극 동참하는 노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름하여 웹버(Webver)족. 이는 인터넷을 뜻하는 웹(Web)과 노인을 뜻하는 실버(Silver)의 합성어로 ‘디지털 라이프’를 즐기는 정보화된 노인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과거 유행한 실버 네티즌, 노(老)티즌 같은 말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셈이다. 그러나 눈여겨볼 것은 웹버족이 단지 인터넷을 ‘사용’할 줄 아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각종 정보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특성을 지녔다는 점이다.

웹버족이 구사하는 컴퓨터 활용기술도 매우 다양하다. 한국정보문화진흥원(KADO)이 2005년 펴낸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정보화 교육을 받은 노인들의 약 74%가 한글문서 작성과 이메일을 할 수 있다고 답변했고, 약 30%는 엑셀이나 파워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또한 정보화 교육을 받은 노인들의 약 3분의 1은 일상생활에서도 정보화 기술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령 응답자의 약 37%가 블로그나 카페에 가입해 온라인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약 32%는 인터넷으로 차표 구매, 컴퓨터 게임과 쇼핑 등을 하고 있었다. 이밖에 약 25% 가량은 포토샵이나 인터넷 뱅킹을 하고 있다고 응답해 눈길을 끌었다. 홈페이지를 갖고 활용할 수 있다(약 24%)거나 공공기관의 증명서를 인터넷으로 발급 받는다(약 18%)는 응답도 제법 나왔다.

실버 바람은 1,900만 회원을 자랑하는 SK커뮤니케이션즈(SK컴)의 미니홈피 ‘싸이월드’에도 불고 있다. SK컴에 따르면 싸이월드 회원 가운데 50대 이상 장년층 회원은 올 1월 현재 약 95만 명으로 2004년 약 3만8,000명에 비해 무려 25배나 폭증했다. 전체 회원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04년 1%에서 현재 5%로 늘어났다.

칠순의 블로거들도 인터넷서 활동

떨어져 사는 아들과 며느리 생각에 자녀들의 사진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싸이질’에 재미를 붙인 이삼숙(61·여) 씨. 그의 미니홈피는 첫 화면부터 60대 노인의 것으로는 생각 못할 만큼 화려한 디지털 아이템으로 꾸며져 있다.

이 씨는 매일 다이어리 코너에 하루의 일상과 강아지 키우는 이야기, 주부로서의 인생 이야기 등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다. 또 사진첩 코너에는 가족 사진과 직접 찍은 사진을 올리는가 하면 자신만의 노하우가 담긴 요리법과 여행정보, 패션정보 등도 기록해 두는 등 미니홈피를 통해 디지털 황혼을 즐기고 있다.

SK컴 홍보실 관계자는 “인구 고령화가 진행되고 인터넷 문화가 대중화되면서 싸이월드를 이용하는 중장년층이 늘고 있다”며 “최근에는 노인 대상 컴퓨터 강좌에서도 미니홈피 사용법 강의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전했다.

가장 많은 블로거들이 활동하는 네이버의 경우에도 블로그 검색을 하다 보면 실버 블로거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이에 대해 네이버 관계자는 “전체 블로거들의 연령대별 분포를 조사해 보지는 않았지만 50대 이상의 고령 블로거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노인들이 정보기술 활용 능력을 갖춤으로써 생활의 활력이 크게 높아졌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마이크로소프트(MS)와 KADO가 지난해 연말 정보화 교육을 받고 있는 노인 400명을 대상으로 공동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보화 교육 이후의 변화로 ‘자신감이 생겼다’ 또는 ‘생활이 즐거워졌다’는 응답이 무려 98%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친구가 많아졌다’(91%), ‘몸이 건강해졌다’(89%), ‘자녀나 손주들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90%) 등의 긍정적 변화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좀 과장하자면 정보화가 노인들에게는 ‘회춘의 묘약’과도 같은 효력을 발휘한 셈이다. 이에 대해 2년 전 대학교에서 무료 정보화 교육을 받고 인터넷에 눈을 뜬 70대 초반 할머니는 “인터넷에 자주 들락거리다 보니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졌다”며 “게다가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밖(오프라인 공간)에서도 자주 만나 웃고 즐기다 보니 늙을 새가 없는 것 같다”고 자랑했다.

실제 카페나 블로그 등 온라인상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웹버족은 오프라인 상에서도 정기 모임을 갖는 등 대인관계가 다시 활발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반려자 없이 혼자 살아온 노인들은 ‘황혼의 로맨스’를 만나기도 한다고.

이와 관련, 한국MS 관계자는 “그동안 디지털화의 급진전으로 인터넷이 노인들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지만 이제 정보화된 노인들에게 인터넷은 오히려 사회 재참여의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KADO 정보격차해소연구센터 조사연구팀 이재웅 선임연구원도 “인터넷을 접한 장·노년층은 대부분 가족이나 주변과 의사소통 정도가 높아진다”며 “그 덕분에 사회생활 적응도와 삶에 대한 만족도 역시 함께 올라간다”고 분석했다.

정보화와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떠밀려 한동안 ‘뒷방 늙은이’ 신세를 면치 못했던 실버 세대. 하지만 바로 그 인터넷을 손아귀에 쥔 ‘사랑방 웹버’들은 세상의 중심으로 당당하게 복귀하고 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