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쿼터제 축소로 설자리마저 좁아져… 총체적 위기 내몰린 한국영화

‘천년학이 거미줄에 걸렸다’, ‘거미와 천년학이 싸우면 거미가 이긴다(?)’, ‘거미가 천년학을 잡아 먹었다(?)’….

동물원에서 벌어진 싸움 얘기라고? 아니, 한국 영화계에서 최근 일어난 일이다. 극장가에서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 <스파이더맨3>이 거장 임권택 감독의 야심작인 <천년학>을 일방적으로 압도한 것을 희화적으로 표현해 나도는 말이기도 하다.

‘잘 나가는 듯만 하던’ 한국 영화의 위기론이 최근 불거지고 있다. 외견상으로도 한국영화를 찾는 관중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히트작이라고 할 만한 영화도 보이지 않아서다. 또 한국 영화를 찍는 데 투자자들이 돈을 대지 않는다는 얘기까지도 솔솔 흘러나오는 지경이다. 굳이 <스파이더맨3>와 한국영화들과의 대결 결과 때문에서만은 아니다.

“한국 영화가 이번엔 진짜 위기에 처해 있다.” “아니다. 한국 영화가 위기라는 얘기는 몇 년 전부터 있어왔다. 위기라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식상한 주제다.”

한국 영화에 ‘위기’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실상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지난해 <왕의 남자>와 <괴물>이 1,000만 관중 시대를 열 때조차도 ‘위기’라는 지적은 있었고 스크린 쿼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위기론은 어김없이 제기됐다. 그럼에도 한국 영화는 지난 수년간 끊임없이 위기설을 넘어 전진해 온 것은 사실이다.

위기설 얘기가 너무 많이 나와서일까? 한국 영화가 위기라는 주장은 사실 일반에게 심각하게 와 닿지 않는 측면도 없지 않다. 양치기 소년이 ‘늑대가 온다’고 몇 차례 거짓말을 하다 막상 늑대가 나타났을 때 ‘늑대가 왔다’고 진실을 말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은 듯.

하지만 이번에는 한국 영화 위기의 징후들이 과거의 위기설 때와는 차원을 달리 한다는 데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공감한다. 예전에 비해 보다 구체적인 결과에서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고 이들 문제 대부분은 구조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는 물론 제작사 등 영화인들 사이에서 체감되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도 종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다.

‘한국 영화를 찾는 관객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 상영관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한국 영화의 제작 편수도 크게 감소했다. 무엇보다 한국 영화를 만드는 데 더 이상 돈을 대지 않으려 든다’, ‘히트작도 없다. 한국 영화 중에 볼 만한 게 별로 없다’, ‘영화관들조차도 할리우드 영화를 틀면 수익이 더 난다’…. 최근 영화가에서 심심찮게 오가는 이런 얘기들은 한국 영화의 위기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한 위기설은 올해 들어 한국 영화의 신통찮은 흥행 성적표로 이어지며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일례로 지난해 이맘 때쯤 이미 <왕의 남자>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가도를 질주했던 것에 비하면 올해엔 아직까지 대규모 흥행작으로 떠오르는 한국 영화가 없다. 관중 수 100만 명을 넘으며 몇몇 작품이 선방하고는 있지만 입소문을 몰고 다니며 화제를 일으킬 만한 작품이 보이지 않는 것.

올해 들어 한국 영화의 부진은 통계 자료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올 1분기 한국영화 상영 편수는 총 32편으로 전년 동기 대비 1편 늘었지만 관객 수는 41.9%나 급감했다. 덩달아 이 기간 한국영화 점유율도 전년 동기 69.6%에 훨씬 못 미치는 48.9%로 크게 떨어졌다.

반면 같은 기간 할리우드 영화 점유율은 지난해 30.4%에서 두 배 가까이 훌쩍 뛰어올랐다. 외국 영화는 전년 동기보다 32편이나 증가한 90편이 상영됐는데, 관객은 39.0% 급증했고 점유율 또한 51.1%로 한국 영화를 추월했다. 그간 국내 시장에서 국산 영화의 점유율이 50% 이상을 유지해 오는 등 한국 영화산업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해온 궤적과 크게 엇갈리는 대목이다.

시장에서 한국 영화들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대작이 극명하게 대비된 사례는 <스파이더맨3> 개봉에서다. 지난 1일 개봉한 <스파이더맨3>은 무려 800여 개의 스크린을 장악, 개봉 6일 만에 257만 관객 동원이란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박스오피스에서도 연일 50%가 넘는 점유율을 보이며 경쟁 관계인 국산 영화들을 초라하게 만들 정도였다.

특히 <스파이더맨3>의 독주는 지난해 7월 스크린 쿼터제가 축소된 이후 한국 영화에 드리워진 대표적인 폐해로 꼽힌다. 쿼터제가 유명무실해지면서 우려되던 몇몇 할리우드 대작의 스크린 독점 현상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지난해 <괴물>이 스크린 600여 개를 차지한 것이 큰 뉴스가 됐었죠. 한 영화가 너무 많은 스크린을 가져간다고 주변에서 시샘도 많이 했지만 이제 600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박경필 영상투자협의회장은 “조만간 <캐리비안의 해적>까지 가세할 경우 <스파이더맨3>까지 합쳐 미국 영화 두 편이 국내 극장 스크린 1,000개를 동시에 휩쓸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이 같은 특정 외화의 스크린 독점 현상은 앞으로 한국 영화의 위축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염려를 현실화시키고 있다. <스파이더맨3>가 불러일으킨 논쟁이 한 예. “스크린 쿼터 제한이 풀려 극장에서 <스파이더맨3>만을 상영하니 관객들이 한국 영화를 덜 보게 되는 것이다.” “스크린 쿼터에 관계없이 미국 영화의 수준이 더 뛰어나니 극장에서 상영 기회를 더 많이 주고 또 관객들도 영화를 보는 것이다.”

실제 작품 수준의 우열을 떠나 스크린 쿼터라는 보호막이 풀려 버리면서 한국 영화가 시장에서 설 자리가 줄어들었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종전 같으면 쿼터제 때문에라도 극장에서 한국 영화를 상영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외화를 보려던 관객이 현장에서 한국 영화로 바꿔 보는 경우도 제법 있었지만 이젠 이마저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 돼버렸다.

또 한국 영화들이 극장에서 초기에 인기를 끌지 못하면 조기 종영돼 버릴 확률도 더욱 커지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영화감독조합 공동대표이자 <말아톤>을 만든 정윤철 감독은 “한국 영화계가 가뜩이나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스크린 쿼터제 축소라는 뇌관이 이번에 터져버린 것”이라며 “한국 영화의 위기설이 수 차례 제기돼 왔지만 이번만은 스크린 쿼터제의 축소라는 현실과 맞물려 심각한 상황”이라고 진단한다.

정 감독은 이런 이유 때문에 “앞으로 할리우드 영화의 대공세가 심화될 것이고 물량 유통 보장을 못 받는 한국 영화는 잘 되면 아주 흥하고 안 되면 완전히 망하는 ‘모 아니면 도’식 시장이 될 것”이라고 한숨을 내쉰다. 정 감독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불안’ 정도였지만 이번에는 ‘절감’이라고 상황의 심각성을 표현한다.

관객 동원력이 눈에 띄게 떨어진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한국 영화 개봉 편수가 올해 크게 줄어들 것이란 우려는 이미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지난해 한국 영화는 모두 108편이 개봉되며 양적으로 최대의 중흥기를 맞았다.

하지만 올해 영화인들이 예상하는 한국 영화 개봉은 60~70여 편. 지난해 하반기부터 투자가 위축되면서 제작 편수가 줄어든 데 따른 결과가 이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난달에는 새로 극장에 걸린 한국 영화가 없는 주간이 있었는데 이런 상황이 빚어진 것은 무려 3년 만의 일이다.

제작 편수가 줄어든다는 것은 제작의 원동력, 즉 돈이 한국 영화에 예전처럼 투자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과도 직결된다. 이런 현상은 무엇보다 한국 영화에 투자해서 그만큼의 수익을 거두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영화계에서는 지난해 제작된 108편의 영화 중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10~20%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 때문에 한국영화 전체적으로도 투자 제작 부문에서 1,000억원 가까운 손실이 난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한국 영화 전체 제작비 규모로 추정되는 5,000억원의 5분의1에 달할 만큼 큰 타격이다.

<왕의 남자>와 <괴물> 등 사상 최다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두 편이나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나머지 영화들의 실적이 어느 정도일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또 한류 붐의 지속에도 불구하고 해외 수출은 전년 대비 68.7%나 급감, 수익률 악화에 일조했다.

이처럼 부진한 지난 한 해의 성적표 때문에 올해 영화 제작사들은 돈 가뭄에 허덕이고 있다. 지난해 손실을 크게 본 투자자들이 영화 투자에 무척 신중한 자세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괴물>을 제작한 청어람이 김주혁과 손예진을 주연으로 내세우며 관심을 모았던 <낙랑클럽>이 제작비 80억원을 마련하지 못해 제작이 사실상 무산된 것은 최근 영화계의 자금 사정을 잘 대변해준다.

영화계의 한 인사는 “지난해 수익률이 나쁜 것도 있지만 영화 제작과 성공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있는 정서도 한몫을 한다”며 “투자한 만큼의 과실을 거두지 못하는데 자본이 더 이상 ‘밑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들어오기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라고 말한다. 특히 한국 영화시장은 이미 커질 대로 커져서 포화상태이기 때문에 앞으로 단기간의 시장 확대는 쉽지 않은 실정이다.

특히 정윤철 감독은 앞으로의 상황을 더 심각하게 바라본다. 지금 한국 영화의 어려운 상황은 서막에 불과하고 혹독한 암흑기는 이제부터라는 것이 그의 주장. 그는 “전체적인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한 혁명과 같은 상황”이라고 강조한다.

최근 기획예산처와 한국개발연구원이 주최한 공개토론회에서 영화 산업의 경쟁력 제고와 효과적인 지원 방안에 대해 발표한 산업연구원 최봉현 연구원은 한국 영화는 높은 연평균 성장률과 시장 점유율에도 불구하고 외화에 비해 확실한 경쟁력 우위를 보이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며 “우리 영화는 경쟁력의 원천인 산업 내부의 경쟁 요소들이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한번 침체가 시작되면 기반이 쉽게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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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식 차장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