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형 비리 재벌 총수들 줄줄이 집행유예… 실형받은 경우는 김우중 회장 등 3명뿐형집행정지 이어 사면받는 사례 많아… 법조계 전관예우 관행도 불공정 재판 영향

1988년 10월, 88서울올림픽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시점에 서울 한복판에서 4인조 무장탈주범이 인질극을 벌여 전국을 뒤흔들었다. TV로 중계된 당시 사건 현장에서 주범인 지강헌은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을 절규처럼 내뱉은 뒤 최후를 맞았다.

그 때 지강헌이 남긴 말은 오늘날까지 우리사회의 부조리를 개탄하는 시대어가 됐다.

최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대한 법원의 관대한 판결이 나오면서 적잖은 사람들이 ‘과연 법은 모든 국민에게 평등한가’라는 의구심과 함께 ‘돈의 위력을 실감했다’는 허탈감을 토로했다.

지강헌 사건이 발생 20년째를 맞았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상징되는 우리사회의 법조 불신은 여전하고 광범위하다. 지난 4월 법의 날을 맞아 본지가 인터넷 법률포털사이트 로마켓과 함께 법률서비스를 한번이라도 이용해 본 경험이 있는 전국의 성인남녀 5,0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법조(법원ㆍ검찰ㆍ변호사)에 대한 불신은 56%에 달해 신뢰율 20.5%보다 두배 이상 높게 나타났다.

사법불신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법조비리가 62.6%로 압도적인 지적을 받았다.(판사의 권위적 태도 19.0%, 판결 불만 13.7% 순)

국민들이 ‘유전무죄’라는 불공정한 재판의 최대 원인으로 꼽은 법조비리는 때마다 불거져 법조 불신을 자초했다. 의정부(98년 2월)와 대전(99년 1월) 법조비리가 대표적으로 판사들이 변호사들로부터 정기적으로 금품을 받았는가 하면 변호사가 법원ㆍ검찰의 전·현직 간부는 물론 일반직원, 경찰관 등 100여명을 관리해온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법조 주변에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불공정 수사와 재판이 횡행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2005년 11월에는 법조브로커 윤상림씨와 연루된 전ㆍ현직 판검사 등이 수사대상에 올랐는가 하면 지난해 7월 법조브로커 김홍수 사건은 법조 불신을 가중시켰다. 당시 김씨로부터 사건청탁과 함께 거액을 받은 혐의로 차관급인 부장판사가 구속기소됐고 사건에 연루된 현직 검사가 사표를 제출했지만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렇다 보니 본지의 4월 여론조사에서도 법조 3륜으로 불려지는 법원(판사), 검찰(검사), 변호사협회(변호사)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낮게 나타났다. 법원이 상대적으로 신뢰받는 집단으로 조사됐지만 16.8%에 불과했고 검찰과 변호사협회에 대한 신뢰도는 각각 3.6%와 3.1%에 불과했다.

정태수 한보그룹 전 회장,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김현철 씨

법조 불신을 가중시키는 ‘유전무죄’의 요인으로 ‘전관예우’가 있다. 판ㆍ검사를 지낸 변호사를 거기에 걸 맞게 대우해 준다는 뜻인데, 결국 기소-불기소, 유죄-무죄, 형량 등을 결정하는데 전관을 대접해 준다는 소리다. 심할 경우 유죄를 무죄로 만들어 준다고 해서 ‘유전무죄’라는 말도 나왔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김동철 대통합민주신당 의원이 2000~2004년 8월 퇴직한 법관 31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95%가 변호사로 개업했고, 그 중 89.8%가 마지막 임지에서 문을 연 것으로 나타났다. 검사도 93%가 개업했으며 장소는 그 중 75%가 최종 근무지나 그 인근이었다.

무소속 임종인 의원은 “1990년 이후에 퇴임한 대법관들의 수임사건을 조사한 결과,13명의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맡은 사건의 63%가 대법원 상고사건”이라며 “법조계 폐해의 핵심인 전관예우의 몸통은 대법관”이라고 주장했다.

임 의원은 “대법관을 비롯한 법조계의 전관예우를 없애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본지의 4월 여론조사에서도 ‘전관예우’에 대해 응답자의 93%가 ‘법원의 판결이나 검찰의 결정에 영향을 준다’고 답했다.

국민 일반이 ‘유전무죄’재판을 가장 실감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과 이른바 ‘가진자’‘화이트칼라’로 대변되는 특권층 간의 차별화된 법적용이다.

법원은 일반형사범, 심지어 생계형 범죄에 대해서도 가혹한 처벌을 하면서 죄질과 피해 규모에서 훨씬 큰 재벌ㆍ권력형 비리에 대해서는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해 왔다.

지난해 2월 두산그룹 총수 일가에 대한 법원 판결은 대표적인 예. 두산그룹 총수 일가는 회삿돈을 개인의 사유재산처럼 주무르고 300억원 대의 비자금을 만들어 가족자금 등으로 사용한 혐의로 그룹 오너 형제들이 불구속 기소된 상태였다. 특가법상 횡령은 징역 5년 이상의 선고가 가능한 중대 범죄다. 그러나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행위에 대해 모두 유죄를 인정하면서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마찬가지로 1조9,000억원대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기소됐던 최태원 SK회장은 ‘경영판단’을 이유로 징역 3년ㆍ집행유예 5년(상고심 진행중)이 선고됐다.

참여연대회원들이 13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돈 앞에 무너진 대한민국 헌법'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세워놓고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김승연 한화 회장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정치자금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김승연 한화 회장은 1심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된 뒤 항소심에서는 벌금형으로 감형됐다. 당시 재계와 법조계에서는 김 회장의 대한생명 임원직 유지를 위해 법원이 속보이는 판결을 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밖에 12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이중근 부영 회장은 ‘떼먹은 법인세 대부분을 납부했다’는 이유로 징역3년, 집행유예 5년을, 하이닉스는 1조 8,000억원 분식회계 사실이 밝혀졌지만 경영진 모두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재벌 재판 중 1,2심 모두 실형이 선고된 경우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임창욱 대상그룹 회장, 나승렬 거평그룹 회장 등에 불과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합법적으로 보장된 ‘형집행정지’제도를 활용, ‘유전(권력) 무죄’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한다. 본래 형집행정지 제도는 재소자 인권을 위한 제도이나 권력자들은 건강문제를 이유로 바깥 출입을 자유자재로 하는 방편으로 활용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시절 권력실세로 통하던 권노갑 전 의원과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각각 고혈압 등 지병과 녹내장 등을 이유로 형집행정지를 받아 구치소 대신 병원이나 사택에서 지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는 97년 특가법상 알선 수재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같은 해 11월 보석으로 풀려난 뒤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아오다. 99년 7월 징역 2년의 형이 확정됐지만 곧바로 8월 15일 사면됐다. 권영해 전 안기부장도 당뇨 합병증을 이유로 5년 넘게 형집행정지의 혜택을 누리다 지난 2월 사면됐다.

형집행제도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인물은 정태수 전 한보그룹 총회장이다. 정 전 회장은 ‘한보사건’으로 15년을 확정 선고받았지만 고혈압, 당뇨, 협심증 등을 이유로 5년 이상 형집행정지 상태로 지내다 2002년 대장암 진단서를 제시해 2002년 6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고 얼마 후 대장암을 이유로 사면까지 받았다. 대장암 진단서에 대해선 거액을 투자해 얻어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지강헌 사건이 남긴 ‘유전무죄’의 메시지는 불공정한 재판이 횡행하는 현실에서 아직 유효하다. 법조 불신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최근 정부와 사법부는 사법불신을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법적인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그 하나가 전관예우 관행을 방지하기 위해 전관변호사들을 특별관리하는 ‘법조윤리협의회’출범이다. 공직에서 퇴임하는 변호사는 2년동안 수임사건의 자료와 처리결과를 법조윤리협의회에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해 ‘유전무죄’의 가능성을 차단하자는 것이다.

또한 ‘화이트칼라’범죄의 불공정한 양형을 제어하기 위해 ‘화이트칼라 양형 기준’이 제시되고 일부 법원에서 실제 적용하고 있기도 하지만 국민의 눈높이는 이보다 훨씬 위에 있다. .

● 엄상익 변호사 "법조인들 양심에 눈떠야 진실이 이긴다"

“법적 논리가 아닌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도, 사물도 제대로 보이고 끝내 ‘진실’을 발견하게 되죠.”

엄상익(55) 변호사는 우리사회 법조불신의 원인이 되고 있는 ‘유전무죄’의 관행에 대해 독특한 일침을 놨다.

대도 조세형, 탈주범 신창원, 검찰이 ‘단군 이래 최대 사기극’이라고 한 JU 사건 등 우리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과 사건을 무수히 접한 엄 변호사는 ‘유전무죄’라는 불공정한 재판의 요체가 법조인의 양심에 있다고 말한다. 즉 법조인(특히 판사)이 마음의 눈으로 사건을 대하면 진실을 보게 되고 바른 재판을 할 수 있다는 것.

엄 변호사는 우리 사회에서 ‘유전무죄’의 폐해는 진실을 손쉽게 호도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말 그대로 돈과 권력이 있는 자가 법조라는 링에서 모든 무기(반칙까지)를 동원, 승리를 거둘 수 있게 구조적인 취약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경찰 조사에서, 검찰 수사, 재판에 이르기까지 사건담당자 뿐만 아니라 그 윗선까지 가장 가까운 변호사, 인맥을 총동원해 유리한 진지를 구축해 진실과는 다른 승리를 만끽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증거와 논리가 우선시되는 법조 현실에서 훈련된 거짓말이 순수한 진술보다 증거능력이 더 인정되고 돈과 권력은 증거를 만들고 바꾸기도 한다는 것. 엄 변호사는 널리 알려진 유명 연애인의 성범죄 사건, 여대생 청부 살인사건, 유명 섬유회사의 범인 조작 등에서 그러한 편린들을 분명하게 목도했다고 한다. 일부 사건에는 불리한 피고 쪽에서 정치권의 대선주자를 앞세워 법원을 움직이려고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엄 변호사는 사회경험이 일천한 법조인이 사법연수원에서 공식처럼 외우는 증거법칙으로 사건과 인물을 판단하는 법조현실에서 ‘유전무죄’의 불공정한 재판은 언제든 기생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현재 시범운용하고 있는 배심제도를 본격 도입,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고 사법연수생을 곧바로 판ㆍ검사로 임용하기보다 다양한 경험칙을 갖춘 변호사 중에서 판ㆍ검사를 선발하는 게 불공정한 재판을 줄일 수 있다고 전망한다.

“‘유전무죄’의 횡포가 아무리 기승을 부리더라도 재판관이 ‘마음(양심)의 눈’을 용기있게 지니면 진실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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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차장 jjpark@hk.co.kr